조조(曹操)가 오환을 정벌하고 공손강(公孫康)이 원상(袁尙), 누반(樓班), 오연(烏延) 등을 참함
헌제(獻帝)
주 001
건안(建安) 년간(196~219) 초기에 기주목(冀州牧) 원소(袁紹) 주 007
광양[군](廣陽郡) 주 016
건안 12년(207)에주 028 조조 주 029가 스스로 오환을 정벌하여주 030 유성[현](柳城縣) 주 031에서 답돈을 대파하고 그를 참했으며, 20여만 인의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았다.주 032 원상과 누반, 오연 등은 모두 요동[군]으로 달아났는데,주 033요동 태수(遼東太守) 공손강(公孫康) 주 034이 모두 참하여 [그들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다.주 035그 나머지 무리 만여 락(落)은 모두 중국[안의 내지]으로 천사(遷徙)되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주 036
각주 001)
초평(初平) 년간(190~193)에 구력거가 죽었는데,주 002이때 아들 누반(樓班)이 나이가 어렸지만주 003조카 답돈(蹋頓)이 군사적 전략을 갖추었기 때문에 대신 대인이 되어 3군(郡)주 004[에 있던 오환 무리들]을 모두 거느렸고,주 005무리들은 모두 그의 호령(號令)주 006을 따랐다.獻帝(181~234; 재위 189~234): 이름은 劉協이며, 靈帝의 아들이다. 中平 6년(189)에 6월 少帝 즉위 후 陳留王에 봉해졌다. 9월에 董卓이 少帝를 폐하고 皇帝로 옹립하였다. 初平 元年(190)에 董卓의 협박으로 長安으로 遷都하였다. 董卓과 그의 부장 李傕·郭汜 등이 계속 朝政을 장악하였다. 建安元年(196)에 또 曹操의 휘하에 들어가 許에 천도하여 曹操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각지에서 할거세력이 해마다 혼전을 벌여 後漢은 명목적으로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망하였다. 延康 元年(220)에 曹丕에게 禪讓하고 山陽公으로 폐위되어 後漢이 망하였다.
건안(建安) 년간(196~219) 초기에 기주목(冀州牧) 원소(袁紹) 주 007
각주 007)
와 전장군(前將軍)주 008
공손찬(公孫瓚)
주 009이 서로 대치하여 [싸웠으나]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자주 010
답돈이 사신으로 하여금 원소를 방문하도록 하여 화친하기를 구하였고 마침내 군대를 보내 [원소가] 공손찬을 공격하는 것을 도왔다.주 011
원소는 황제의 문서[制]를 위조하여 답돈과 난루, 소복연, 오연 등에게 모두 선우의 인수(印綬)주 012를 하사하였다.주 013후에 난루와 소복연이 부중을 이끌고 누반을 받들어 선우로 삼자 답돈은 왕이 되었지만,주 014
답돈은 여전히 계교와 방책을 주도하였다.주 015
袁紹(?~202): 후한시대 汝南郡 汝陽縣 사람이며, 字는 本初이다. 司空 袁逢의 庶子이다. 大將軍 何進의 辟召로 벼슬을 시작한 후 中軍校尉·司隷校尉를 역임하였다. 中平 6년(189)에 何進과 함께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으나, 누설되어 何進이 피살되자 아우 袁術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환관 2천여 인을 살해하였다. 董卓이 정권을 장악하자 冀州로 도망갔다가 初平 元年(190)에 關東州郡에서 董卓을 토벌하기 위해 起兵하자 맹주로 추대되었다. 初平 2년(191)에 韓馥을 몰아내고 冀州牧이 되었으며, 公孫瓚을 제거하고 河北 전역을 지배하였다. 曹操가 獻帝를 맞아들여 許로 옮긴 후 太尉·大將軍으로 삼았다. 建安 5년(200)에 曹操와 官渡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2년 후 병사하였다.
광양[군](廣陽郡) 주 016
각주 016)
사람주 017
염유(閻柔)
주 018廣陽郡: 秦始皇 21년(전226)에 燕을 멸한 후 설치하였다. 치소는 薊縣(현재 北京城 서북쪽)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北京市와 大興縣, 天津市 靜海縣, 河北省 廊坊·固安·永淸·覇州·淶水·涿州·定興· 易縣·新城·雄縣 등 市와 縣 지역에 해당하였다. 前漢初 燕國으로 改稱했다가 元鳳元年(전80)에 다시 廣陽郡으로 改稱하였다. 이때의 관할구역은 현재의 北京市와 大興縣, 河北省 廊坊·文安·固安·覇州 등 市縣지역이었다. 本始 元年(전73)에 廣陽國으로 바뀌었다. 後漢初 廢置되어 上谷郡에 병합되었다. 永元 8년(96)에 다시 廣陽郡으로 독립하였다. 三國 魏 太和 6년(232)에 또 燕國으로 改稱하였다.
각주 018)
는 젊어서 오환인과 선비인들 사이에 들어가 살았는데, 오환과 선비 종족 사람들(種人)이주 019의지할 정도로 믿음을 얻게 되자, 선비의 군사들을 이끌고 오환교위 형거(邢擧)를 살해하고 오환교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다. 원소는 은총으로써 염유를 위무하여 북변을 안정시켰다.주 020후에 원소의 아들 원상(袁尙)
주 021閻柔: 三國時代 廣陽郡(현재 北京城 서남쪽) 사람이다. 젊어서 烏桓人과 鮮卑人 사이에 섞여 살았으며 부족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後漢末 幽州牧 劉虞의 從事 鮮于輔 등의 추대로 烏桓司馬가 되어 胡·漢 수만을 이끌고 公孫瓚의 部將 鄒丹을 격파하였다. 이에 烏桓校尉 邢擧를 살해하고 烏桓校尉가 되었으며 袁紹의 총애를 받았고 北邊을 安撫하였다. 建安 5년(200)에 사자를 보내 曹操을 만나 투항하여 烏桓校尉에 임명되었다. 曹操가 河北을 평정하자 部曲과 鮮卑을 이끌고 名馬를 曹操의 군대에게 바쳤다. 三郡烏桓 정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워 關內侯에 봉해졌고, 曹操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다. 거느렸던 幽州와 幷州의 烏桓 만여 落을 이끌고 中原으로 遷徙하였다. 建安 17년(212)에 鮮卑 軻比能部 3천여 騎와 曹操를 따라 河間郡에서 田銀을 정벌하는 데 참전하였다. 曹魏 文帝시기 度遼將軍에 임명되고 縣侯에 봉해졌다.
각주 021)
이 [조조에게] 패하자 답돈에게 도망갔다.주 022袁尙(?~207): 後漢末 汝南郡 汝陽縣(현재 河南省 商水縣 서북) 사람이며, 字는 顯甫이다. 袁紹의 셋째 아들로 가장 총애를 받았다. 建安 7년(202)에 袁紹가 죽자 무리들은 장자인 元譚을 세우려 하였으나, 袁紹의 측근 審配 등이 袁尙에 아부하여 袁紹의 유언을 위조하여 袁尙을 후계자로 옹립하고 冀州를 거느리게 하였다. 建安 8년(203)에 袁譚이 曹操에게 黎陽(현재 河南省 淩縣 동쪽)에서 패하자 구원병의 파병을 거절하여 형제의 틈이 벌어졌고, 袁譚은 曹操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建安 9년(204)에 曹操는 이 기회를 틈타 본거지인 鄴(현재 河北省 臨漳縣 서남)을 포위하였고, 袁尙은 군대를 내보내 싸웠으나 패하여 冀州를 빼앗기고 달아나 둘째 형 幽州刺史 袁熙에게 달아났다. 建安 10년(205)에 袁熙의 部將이 반란을 일으키자 袁熙와 함께 遼西烏丸 蹋頓에게 투항하였다. 建安 12년(207)에 曹操가 三軍오환을 격파하자 袁熙와 함께 遼東太守 公孫康에게 의탁하였으나, 公孫康은 袁尙 형제를 죽여 曹操에게 수급을 바쳤다.
각주 022)
이때 유주와 기주의 10만여 호의 관리와 백성들이 오환의 땅으로 도망갔는데,주 023
원상은 그 병력에 의지하여 다시 중국을 도모하고자 하였다.주 024이때 조조(曹操)
주 025가 하북(河北)을 평정하니 염유는 선비와 오환의 무리들을 이끌고 [조조에게] 귀부하였다.주 026
조조는 곧 염유를 교위에 임명하였다.주 027
원문은 “及紹子尙敗, 奔蹋頓.”인데, 『三國志』에서는 “後袁尙敗奔蹋頓”이라고 하였다. 袁紹는 建安 5년(200) 관도에서 曹操에게 패하자 분을 이기지 못하여 建安 7년(202)에 죽었다. 袁紹의 부하들은 셋째아들 袁尙을 옹립하였다. 曹操는 이를 이용하여 靑州刺史 袁譚을 공격하여 靑州를 점령하였다. 후에 袁譚과 袁尙 형제가 반목하여 서로 싸우는 틈을 타서 曹操는 建安 9년(204)에 袁氏의 본거지인 鄴을 점령하였다. 이에 袁尙은 형인 袁熙가 있던 幽州를 달아났으나 袁熙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袁尙과 袁熙는 遼西烏丸에게 달아났다.
건안 12년(207)에주 028 조조 주 029가 스스로 오환을 정벌하여주 030 유성[현](柳城縣) 주 031에서 답돈을 대파하고 그를 참했으며, 20여만 인의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았다.주 032 원상과 누반, 오연 등은 모두 요동[군]으로 달아났는데,주 033요동 태수(遼東太守) 공손강(公孫康) 주 034이 모두 참하여 [그들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다.주 035그 나머지 무리 만여 락(落)은 모두 중국[안의 내지]으로 천사(遷徙)되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주 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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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獻帝(181~234; 재위 189~234): 이름은 劉協이며, 靈帝의 아들이다. 中平 6년(189)에 6월 少帝 즉위 후 陳留王에 봉해졌다. 9월에 董卓이 少帝를 폐하고 皇帝로 옹립하였다. 初平 元年(190)에 董卓의 협박으로 長安으로 遷都하였다. 董卓과 그의 부장 李傕·郭汜 등이 계속 朝政을 장악하였다. 建安元年(196)에 또 曹操의 휘하에 들어가 許에 천도하여 曹操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각지에서 할거세력이 해마다 혼전을 벌여 後漢은 명목적으로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망하였다. 延康 元年(220)에 曹丕에게 禪讓하고 山陽公으로 폐위되어 後漢이 망하였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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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袁紹(?~202): 후한시대 汝南郡 汝陽縣 사람이며, 字는 本初이다. 司空 袁逢의 庶子이다. 大將軍 何進의 辟召로 벼슬을 시작한 후 中軍校尉·司隷校尉를 역임하였다. 中平 6년(189)에 何進과 함께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으나, 누설되어 何進이 피살되자 아우 袁術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환관 2천여 인을 살해하였다. 董卓이 정권을 장악하자 冀州로 도망갔다가 初平 元年(190)에 關東州郡에서 董卓을 토벌하기 위해 起兵하자 맹주로 추대되었다. 初平 2년(191)에 韓馥을 몰아내고 冀州牧이 되었으며, 公孫瓚을 제거하고 河北 전역을 지배하였다. 曹操가 獻帝를 맞아들여 許로 옮긴 후 太尉·大將軍으로 삼았다. 建安 5년(200)에 曹操와 官渡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2년 후 병사하였다.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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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6)
廣陽郡: 秦始皇 21년(전226)에 燕을 멸한 후 설치하였다. 치소는 薊縣(현재 北京城 서북쪽)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北京市와 大興縣, 天津市 靜海縣, 河北省 廊坊·固安·永淸·覇州·淶水·涿州·定興· 易縣·新城·雄縣 등 市와 縣 지역에 해당하였다. 前漢初 燕國으로 改稱했다가 元鳳元年(전80)에 다시 廣陽郡으로 改稱하였다. 이때의 관할구역은 현재의 北京市와 大興縣, 河北省 廊坊·文安·固安·覇州 등 市縣지역이었다. 本始 元年(전73)에 廣陽國으로 바뀌었다. 後漢初 廢置되어 上谷郡에 병합되었다. 永元 8년(96)에 다시 廣陽郡으로 독립하였다. 三國 魏 太和 6년(232)에 또 燕國으로 改稱하였다.
- 각주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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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8)
閻柔: 三國時代 廣陽郡(현재 北京城 서남쪽) 사람이다. 젊어서 烏桓人과 鮮卑人 사이에 섞여 살았으며 부족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後漢末 幽州牧 劉虞의 從事 鮮于輔 등의 추대로 烏桓司馬가 되어 胡·漢 수만을 이끌고 公孫瓚의 部將 鄒丹을 격파하였다. 이에 烏桓校尉 邢擧를 살해하고 烏桓校尉가 되었으며 袁紹의 총애를 받았고 北邊을 安撫하였다. 建安 5년(200)에 사자를 보내 曹操을 만나 투항하여 烏桓校尉에 임명되었다. 曹操가 河北을 평정하자 部曲과 鮮卑을 이끌고 名馬를 曹操의 군대에게 바쳤다. 三郡烏桓 정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워 關內侯에 봉해졌고, 曹操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다. 거느렸던 幽州와 幷州의 烏桓 만여 落을 이끌고 中原으로 遷徙하였다. 建安 17년(212)에 鮮卑 軻比能部 3천여 騎와 曹操를 따라 河間郡에서 田銀을 정벌하는 데 참전하였다. 曹魏 文帝시기 度遼將軍에 임명되고 縣侯에 봉해졌다.
- 각주 019)
- 각주 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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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1)
袁尙(?~207): 後漢末 汝南郡 汝陽縣(현재 河南省 商水縣 서북) 사람이며, 字는 顯甫이다. 袁紹의 셋째 아들로 가장 총애를 받았다. 建安 7년(202)에 袁紹가 죽자 무리들은 장자인 元譚을 세우려 하였으나, 袁紹의 측근 審配 등이 袁尙에 아부하여 袁紹의 유언을 위조하여 袁尙을 후계자로 옹립하고 冀州를 거느리게 하였다. 建安 8년(203)에 袁譚이 曹操에게 黎陽(현재 河南省 淩縣 동쪽)에서 패하자 구원병의 파병을 거절하여 형제의 틈이 벌어졌고, 袁譚은 曹操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建安 9년(204)에 曹操는 이 기회를 틈타 본거지인 鄴(현재 河北省 臨漳縣 서남)을 포위하였고, 袁尙은 군대를 내보내 싸웠으나 패하여 冀州를 빼앗기고 달아나 둘째 형 幽州刺史 袁熙에게 달아났다. 建安 10년(205)에 袁熙의 部將이 반란을 일으키자 袁熙와 함께 遼西烏丸 蹋頓에게 투항하였다. 建安 12년(207)에 曹操가 三軍오환을 격파하자 袁熙와 함께 遼東太守 公孫康에게 의탁하였으나, 公孫康은 袁尙 형제를 죽여 曹操에게 수급을 바쳤다.
- 각주 022)
- 각주 023)
- 각주 024)
- 각주 025)
- 각주 026)
- 각주 027)
- 각주 028)
- 각주 029)
- 각주 030)
- 각주 031)
- 각주 032)
- 각주 033)
- 각주 034)
- 각주 035)
- 각주 036)
색인어
- 이름
- 헌제(獻帝), 구력거, 누반(樓班), 답돈(蹋頓), 원소(袁紹), 공손찬(公孫瓚), 답돈, 원소, 원소, 공손찬, 원소, 답돈, 난루, 소복연, 오연, 난루, 소복연, 누반, 답돈, 답돈, 염유(閻柔), 형거(邢擧), 원소, 염유, 원소, 원상(袁尙), 조조, 답돈, 원상, 조조(曹操), 염유, 조조, 조조, 염유, 조조, 답돈, 원상, 누반, 오연, 공손강(公孫康), 조조
- 지명
- 광양[군](廣陽郡), 유주, 기주, 하북(河北), 유성[현](柳城縣), 요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