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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曹操)가 오환을 정벌하고 공손강(公孫康)이 원상(袁尙), 누반(樓班), 오연(烏延) 등을 참함

  • 국가
    오환(烏桓)
헌제(獻帝) 주 001
각주 001)
獻帝(181~234; 재위 189~234): 이름은 劉協이며, 靈帝의 아들이다. 中平 6년(189)에 6월 少帝 즉위 후 陳留王에 봉해졌다. 9월에 董卓이 少帝를 폐하고 皇帝로 옹립하였다. 初平 元年(190)에 董卓의 협박으로 長安으로 遷都하였다. 董卓과 그의 부장 李傕·郭汜 등이 계속 朝政을 장악하였다. 建安元年(196)에 또 曹操의 휘하에 들어가 許에 천도하여 曹操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각지에서 할거세력이 해마다 혼전을 벌여 後漢은 명목적으로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망하였다. 延康 元年(220)에 曹丕에게 禪讓하고 山陽公으로 폐위되어 後漢이 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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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평(初平) 년간(190~193)에 구력거가 죽었는데,주 002
각주 002)
원문은 “獻帝初平中, 丘力居死”인데, 『三國志』에서는 “後丘力居死”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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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아들 누반(樓班)이 나이가 어렸지만주 003
각주 003)
원문은 “年少”인데, 『三國志』에서는 ‘少’字 대신 ‘小’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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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답돈(蹋頓)이 군사적 전략을 갖추었기 때문에 대신 대인이 되어 3군(郡)주 004
각주 004)
3郡: 『資治通鑑』에는 “蹋頓이 大人이 된 후 上谷大人 難樓와 遼東大人 蘇僕延, 右北平大人 烏延 등을 거느렸다.”는 기사가 있다(『資治通鑑』 卷63 「漢紀55」 〈獻帝 建安4年(199)條〉: 2013, “初, 烏桓王丘力居死, 子樓班年少, 從子蹋頓有武略, 代立, 總攝上谷大人難樓·遼東大人蘇僕延·右北平大人烏延等.”). 이 기록에 의하면 3郡은 上谷郡과 遼東郡, 右北平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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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던 오환 무리들]을 모두 거느렸고,주 005
각주 005)
원문은 “總攝三郡”인데, 『三國志』에서는 “總攝三王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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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들은 모두 그의 호령(號令)주 006
각주 006)
『三國志』에서는 “敎令”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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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랐다.
건안(建安) 년간(196~219) 초기에 기주목(冀州牧) 원소(袁紹) 주 007
각주 007)
袁紹(?~202): 후한시대 汝南郡 汝陽縣 사람이며, 字는 本初이다. 司空 袁逢의 庶子이다. 大將軍 何進의 辟召로 벼슬을 시작한 후 中軍校尉·司隷校尉를 역임하였다. 中平 6년(189)에 何進과 함께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으나, 누설되어 何進이 피살되자 아우 袁術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환관 2천여 인을 살해하였다. 董卓이 정권을 장악하자 冀州로 도망갔다가 初平 元年(190)에 關東州郡에서 董卓을 토벌하기 위해 起兵하자 맹주로 추대되었다. 初平 2년(191)에 韓馥을 몰아내고 冀州牧이 되었으며, 公孫瓚을 제거하고 河北 전역을 지배하였다. 曹操가 獻帝를 맞아들여 許로 옮긴 후 太尉·大將軍으로 삼았다. 建安 5년(200)에 曹操와 官渡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2년 후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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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전장군(前將軍)주 008
각주 008)
前將軍: 將軍의 칭호 중 하나이다. 周末에 설치되었고 秦代에도 존재하였다. 前漢時代에는 상설하지 않았다. 군대와 四夷를 관장하였다. 後漢時代에는 설치하지 않았으나 三國 曹魏 이후 설치되었다. 南朝 劉宋시기에는 後將軍·左將軍·右將軍과 함께 ‘四軍’으로 불렸고, 梁·陳시기에는 ‘四翊將軍’으로 불렸다. 北齊時代에는 前·後·左·右將軍을 합하여 ‘翊軍將軍’이라 불렀다. 北周時代에는 ‘四翊將軍’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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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公孫瓚) 주 009
각주 009)
公孫瓚(?~199): 遼西郡 令支縣 사람으로 字는 伯珪이다. 처음에 郡吏가 되었다가 후에 涿令·騎都尉를 역임하였다. 袁紹가 冀州를 점거한 후 袁紹와 서로 싸웠다. 初平 4년(193) 幽州牧 劉虞를 내쫓고 幽州를 차지했으나, 계속 袁紹에 패하여 建安 4년(199) 스스로 불을 지르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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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로 대치하여 [싸웠으나]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자주 010
각주 010)
원문은 “建安初, 冀州牧袁紹與前將軍公孫瓚相持不決”인데, 『三國志』에서는 “袁紹與公孫瓚連戰不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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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돈이 사신으로 하여금 원소를 방문하도록 하여 화친하기를 구하였고 마침내 군대를 보내 [원소가] 공손찬을 공격하는 것을 도왔다.주 011
각주 011)
원문은 “建遂遣兵助擊瓚”인데, 『三國志』에서는 “助紹擊瓚”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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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는 황제의 문서[制]를 위조하여 답돈난루, 소복연, 오연 등에게 모두 선우의 인수(印綬)주 012
각주 012)
印綬: 印과 인끈을 지칭하며, 모두 벼슬아치로 임명되어 임금으로부터 받는 標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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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사하였다.주 013
각주 013)
원문은 “紹矯制賜蹋頓·難樓·蘇僕延·烏延等, 皆以單于印綬.”인데, 『三國志』에서는 “紹矯制賜蹋頓·(難)峭王·汗魯王印綬, 皆以爲單于.”라고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三國志』의 裴松之注에서 인용한 『英雄記』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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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난루소복연이 부중을 이끌고 누반을 받들어 선우로 삼자 답돈은 왕이 되었지만,주 014
각주 014)
원문은 “後難樓·蘇僕延率其部眾奉樓班爲單于, 蹋頓爲王”인데, 『三國志』에서는 “後樓班大, 峭王率其部衆奉樓班爲單于, 蹋頓爲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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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돈은 여전히 계교와 방책을 주도하였다.주 015
각주 015)
원문은 “然蹋頓猶秉計策”인데, 『三國志』에서는 “猶秉” 대신 “多畫”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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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군](廣陽郡) 주 016
각주 016)
廣陽郡: 秦始皇 21년(전226)에 燕을 멸한 후 설치하였다. 치소는 薊縣(현재 北京城 서북쪽)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北京市와 大興縣, 天津市 靜海縣, 河北省 廊坊·固安·永淸·覇州·淶水·涿州·定興· 易縣·新城·雄縣 등 市와 縣 지역에 해당하였다. 前漢初 燕國으로 改稱했다가 元鳳元年(전80)에 다시 廣陽郡으로 改稱하였다. 이때의 관할구역은 현재의 北京市와 大興縣, 河北省 廊坊·文安·固安·覇州 등 市縣지역이었다. 本始 元年(전73)에 廣陽國으로 바뀌었다. 後漢初 廢置되어 上谷郡에 병합되었다. 永元 8년(96)에 다시 廣陽郡으로 독립하였다. 三國 魏 太和 6년(232)에 또 燕國으로 改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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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주 017
각주 017)
원문은 “廣陽人”인데, 『三國志』에서는 “廣陽”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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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유(閻柔) 주 018
각주 018)
閻柔: 三國時代 廣陽郡(현재 北京城 서남쪽) 사람이다. 젊어서 烏桓人과 鮮卑人 사이에 섞여 살았으며 부족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後漢末 幽州牧 劉虞의 從事 鮮于輔 등의 추대로 烏桓司馬가 되어 胡·漢 수만을 이끌고 公孫瓚의 部將 鄒丹을 격파하였다. 이에 烏桓校尉 邢擧를 살해하고 烏桓校尉가 되었으며 袁紹의 총애를 받았고 北邊을 安撫하였다. 建安 5년(200)에 사자를 보내 曹操을 만나 투항하여 烏桓校尉에 임명되었다. 曹操가 河北을 평정하자 部曲과 鮮卑을 이끌고 名馬를 曹操의 군대에게 바쳤다. 三郡烏桓 정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워 關內侯에 봉해졌고, 曹操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다. 거느렸던 幽州와 幷州의 烏桓 만여 落을 이끌고 中原으로 遷徙하였다. 建安 17년(212)에 鮮卑 軻比能部 3천여 騎와 曹操를 따라 河間郡에서 田銀을 정벌하는 데 참전하였다. 曹魏 文帝시기 度遼將軍에 임명되고 縣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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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젊어서 오환인과 선비인들 사이에 들어가 살았는데, 오환과 선비 종족 사람들(種人)이주 019
각주 019)
『三國志』에서는 “種人”의 ‘人’字를 생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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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할 정도로 믿음을 얻게 되자, 선비의 군사들을 이끌고 오환교위 형거(邢擧)를 살해하고 오환교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다. 원소는 은총으로써 염유를 위무하여 북변을 안정시켰다.주 020
각주 020)
원문은 “袁紹因寵慰柔, 以安北邊.”인데, 『三國志』에서는 “紹因寵慰以安北邊”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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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원소의 아들 원상(袁尙) 주 021
각주 021)
袁尙(?~207): 後漢末 汝南郡 汝陽縣(현재 河南省 商水縣 서북) 사람이며, 字는 顯甫이다. 袁紹의 셋째 아들로 가장 총애를 받았다. 建安 7년(202)에 袁紹가 죽자 무리들은 장자인 元譚을 세우려 하였으나, 袁紹의 측근 審配 등이 袁尙에 아부하여 袁紹의 유언을 위조하여 袁尙을 후계자로 옹립하고 冀州를 거느리게 하였다. 建安 8년(203)에 袁譚이 曹操에게 黎陽(현재 河南省 淩縣 동쪽)에서 패하자 구원병의 파병을 거절하여 형제의 틈이 벌어졌고, 袁譚은 曹操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建安 9년(204)에 曹操는 이 기회를 틈타 본거지인 鄴(현재 河北省 臨漳縣 서남)을 포위하였고, 袁尙은 군대를 내보내 싸웠으나 패하여 冀州를 빼앗기고 달아나 둘째 형 幽州刺史 袁熙에게 달아났다. 建安 10년(205)에 袁熙의 部將이 반란을 일으키자 袁熙와 함께 遼西烏丸 蹋頓에게 투항하였다. 建安 12년(207)에 曹操가 三軍오환을 격파하자 袁熙와 함께 遼東太守 公孫康에게 의탁하였으나, 公孫康은 袁尙 형제를 죽여 曹操에게 수급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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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조에게] 패하자 답돈에게 도망갔다.주 022
각주 022)
원문은 “及紹子尙敗, 奔蹋頓.”인데, 『三國志』에서는 “後袁尙敗奔蹋頓”이라고 하였다. 袁紹는 建安 5년(200) 관도에서 曹操에게 패하자 분을 이기지 못하여 建安 7년(202)에 죽었다. 袁紹의 부하들은 셋째아들 袁尙을 옹립하였다. 曹操는 이를 이용하여 靑州刺史 袁譚을 공격하여 靑州를 점령하였다. 후에 袁譚과 袁尙 형제가 반목하여 서로 싸우는 틈을 타서 曹操는 建安 9년(204)에 袁氏의 본거지인 鄴을 점령하였다. 이에 袁尙은 형인 袁熙가 있던 幽州를 달아났으나 袁熙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袁尙과 袁熙는 遼西烏丸에게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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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유주기주의 10만여 호의 관리와 백성들이 오환의 땅으로 도망갔는데,주 023
각주 023)
『三國志』에는 번역문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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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상은 그 병력에 의지하여 다시 중국을 도모하고자 하였다.주 024
각주 024)
원문은 “尙欲憑其兵力, 復圖中國”인데, 『三國志』에서는 “憑其勢, 復圖冀州.”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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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조조(曹操) 주 025
각주 025)
曹操(155~220): 沛國 譙縣 사람이며, 字는 孟德이다. 太尉 曹嵩의 아들이다. 孝廉에 천거되어 洛陽北部尉가 되었다. 황건적의 난을 토벌하였으며, 後漢末 군웅할거를 평정하여 華北을 통일하였다. 丞相을 거쳐 魏公, 魏王이 되었으나 찬탈하지 않았다. 저서에는 『孫子略解』, 『兵法接要』가 있고, 그의 詩歌를 모아 편찬한 『魏武帝集』이 있었으나 散佚되고 후세 사람이 『曹操集』을 輯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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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河北)을 평정하니 염유는 선비와 오환의 무리들을 이끌고 [조조에게] 귀부하였다.주 026
각주 026)
원문은 “閻柔率鮮卑·烏桓歸附”인데, 『三國志』에서는 “柔帥鮮卑·烏丸歸附”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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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곧 염유를 교위에 임명하였다.주 027
각주 027)
원문은 “操即以柔爲校尉”인데, 『三國志』에서는 “遂因以柔爲校尉, 猶持漢使節, 治廣甯如舊.”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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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안 12년(207)에주 028
각주 028)
『三國志』에서는 “建安十一年”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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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주 029
각주 029)
『三國志』에서는 曹操 대신 “太祖”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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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스스로 오환을 정벌하여주 030
각주 030)
원문은 “曹操自征烏桓”인데, 『三國志』에서는 “太祖自征蹋頓於柳城”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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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현](柳城縣) 주 031
각주 031)
柳城縣: 前漢時代 설치되었고, 治所는 현재의 遼寧省 朝陽縣 남쪽이다. 遼西郡都尉의 治所였다. 後漢時代 廢置되었고, 五胡十六國時代 前燕이 다시 설치하였다. 北魏 太平眞君 8년(447)에 龍城縣에 합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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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답돈을 대파하고 그를 참했으며, 20여만 인의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았다.주 032
각주 032)
원문은 “大破蹋頓於柳城, 斬之, 首虜二十餘萬人.”인데, 『三國志』에서는 “潛軍詭道, 未至百餘里, 虜乃覺. 尙與蹋頓將衆逆戰於凡城, 兵馬甚盛. 太祖登高望虜陳, (柳)[抑]軍未進, 觀其小動, 乃擊破其衆, 臨陳斬蹋頓首, 死者被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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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상누반, 오연 등은 모두 요동[군]으로 달아났는데,주 033
각주 033)
원문은 “袁尙與樓班‧烏延等皆走遼東”인데, 『三國志』에서는 “速附丸‧樓班‧烏延等走遼東”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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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태수(遼東太守) 공손강(公孫康) 주 034
각주 034)
公孫康: 公孫度의 아들이며, 대를 이어 遼東을 지배하였다. 曹操가 3郡의 烏桓을 정벌하고 柳城을 도륙하자 袁尙 등이 遼東으로 달아났는데, 公孫康은 袁尙을 참하여 조조에게 袁尙의 수급을 보냈다. 이 공으로 그는 襄平侯에 봉해지고 左將軍에 임명되었다. 曹丕가 즉위한 후 大司馬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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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 참하여 [그들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다.주 035
각주 035)
원문은 “遼東太守公孫康並斬送之”인데, 『三國志』에서는 “遼東悉斬, 傳送其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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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머지 무리 만여 락(落)은 모두 중국[안의 내지]으로 천사(遷徙)되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주 036
각주 036)
원문은 “其餘眾萬餘落, 悉徙居中國云.”인데, 『三國志』에서는 “其餘遺迸皆降. 及幽州‧并州柔所統烏丸萬餘落, 悉徙其族居中國, 帥從其侯王大人種衆與征伐. 由是三郡烏丸爲天下名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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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獻帝(181~234; 재위 189~234): 이름은 劉協이며, 靈帝의 아들이다. 中平 6년(189)에 6월 少帝 즉위 후 陳留王에 봉해졌다. 9월에 董卓이 少帝를 폐하고 皇帝로 옹립하였다. 初平 元年(190)에 董卓의 협박으로 長安으로 遷都하였다. 董卓과 그의 부장 李傕·郭汜 등이 계속 朝政을 장악하였다. 建安元年(196)에 또 曹操의 휘하에 들어가 許에 천도하여 曹操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각지에서 할거세력이 해마다 혼전을 벌여 後漢은 명목적으로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망하였다. 延康 元年(220)에 曹丕에게 禪讓하고 山陽公으로 폐위되어 後漢이 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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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원문은 “獻帝初平中, 丘力居死”인데, 『三國志』에서는 “後丘力居死”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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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원문은 “年少”인데, 『三國志』에서는 ‘少’字 대신 ‘小’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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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3郡: 『資治通鑑』에는 “蹋頓이 大人이 된 후 上谷大人 難樓와 遼東大人 蘇僕延, 右北平大人 烏延 등을 거느렸다.”는 기사가 있다(『資治通鑑』 卷63 「漢紀55」 〈獻帝 建安4年(199)條〉: 2013, “初, 烏桓王丘力居死, 子樓班年少, 從子蹋頓有武略, 代立, 總攝上谷大人難樓·遼東大人蘇僕延·右北平大人烏延等.”). 이 기록에 의하면 3郡은 上谷郡과 遼東郡, 右北平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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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원문은 “總攝三郡”인데, 『三國志』에서는 “總攝三王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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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三國志』에서는 “敎令”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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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袁紹(?~202): 후한시대 汝南郡 汝陽縣 사람이며, 字는 本初이다. 司空 袁逢의 庶子이다. 大將軍 何進의 辟召로 벼슬을 시작한 후 中軍校尉·司隷校尉를 역임하였다. 中平 6년(189)에 何進과 함께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으나, 누설되어 何進이 피살되자 아우 袁術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환관 2천여 인을 살해하였다. 董卓이 정권을 장악하자 冀州로 도망갔다가 初平 元年(190)에 關東州郡에서 董卓을 토벌하기 위해 起兵하자 맹주로 추대되었다. 初平 2년(191)에 韓馥을 몰아내고 冀州牧이 되었으며, 公孫瓚을 제거하고 河北 전역을 지배하였다. 曹操가 獻帝를 맞아들여 許로 옮긴 후 太尉·大將軍으로 삼았다. 建安 5년(200)에 曹操와 官渡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2년 후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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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前將軍: 將軍의 칭호 중 하나이다. 周末에 설치되었고 秦代에도 존재하였다. 前漢時代에는 상설하지 않았다. 군대와 四夷를 관장하였다. 後漢時代에는 설치하지 않았으나 三國 曹魏 이후 설치되었다. 南朝 劉宋시기에는 後將軍·左將軍·右將軍과 함께 ‘四軍’으로 불렸고, 梁·陳시기에는 ‘四翊將軍’으로 불렸다. 北齊時代에는 前·後·左·右將軍을 합하여 ‘翊軍將軍’이라 불렀다. 北周時代에는 ‘四翊將軍’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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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公孫瓚(?~199): 遼西郡 令支縣 사람으로 字는 伯珪이다. 처음에 郡吏가 되었다가 후에 涿令·騎都尉를 역임하였다. 袁紹가 冀州를 점거한 후 袁紹와 서로 싸웠다. 初平 4년(193) 幽州牧 劉虞를 내쫓고 幽州를 차지했으나, 계속 袁紹에 패하여 建安 4년(199) 스스로 불을 지르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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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원문은 “建安初, 冀州牧袁紹與前將軍公孫瓚相持不決”인데, 『三國志』에서는 “袁紹與公孫瓚連戰不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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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원문은 “建遂遣兵助擊瓚”인데, 『三國志』에서는 “助紹擊瓚”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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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印綬: 印과 인끈을 지칭하며, 모두 벼슬아치로 임명되어 임금으로부터 받는 標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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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원문은 “紹矯制賜蹋頓·難樓·蘇僕延·烏延等, 皆以單于印綬.”인데, 『三國志』에서는 “紹矯制賜蹋頓·(難)峭王·汗魯王印綬, 皆以爲單于.”라고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三國志』의 裴松之注에서 인용한 『英雄記』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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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원문은 “後難樓·蘇僕延率其部眾奉樓班爲單于, 蹋頓爲王”인데, 『三國志』에서는 “後樓班大, 峭王率其部衆奉樓班爲單于, 蹋頓爲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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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원문은 “然蹋頓猶秉計策”인데, 『三國志』에서는 “猶秉” 대신 “多畫”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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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廣陽郡: 秦始皇 21년(전226)에 燕을 멸한 후 설치하였다. 치소는 薊縣(현재 北京城 서북쪽)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北京市와 大興縣, 天津市 靜海縣, 河北省 廊坊·固安·永淸·覇州·淶水·涿州·定興· 易縣·新城·雄縣 등 市와 縣 지역에 해당하였다. 前漢初 燕國으로 改稱했다가 元鳳元年(전80)에 다시 廣陽郡으로 改稱하였다. 이때의 관할구역은 현재의 北京市와 大興縣, 河北省 廊坊·文安·固安·覇州 등 市縣지역이었다. 本始 元年(전73)에 廣陽國으로 바뀌었다. 後漢初 廢置되어 上谷郡에 병합되었다. 永元 8년(96)에 다시 廣陽郡으로 독립하였다. 三國 魏 太和 6년(232)에 또 燕國으로 改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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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원문은 “廣陽人”인데, 『三國志』에서는 “廣陽”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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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閻柔: 三國時代 廣陽郡(현재 北京城 서남쪽) 사람이다. 젊어서 烏桓人과 鮮卑人 사이에 섞여 살았으며 부족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後漢末 幽州牧 劉虞의 從事 鮮于輔 등의 추대로 烏桓司馬가 되어 胡·漢 수만을 이끌고 公孫瓚의 部將 鄒丹을 격파하였다. 이에 烏桓校尉 邢擧를 살해하고 烏桓校尉가 되었으며 袁紹의 총애를 받았고 北邊을 安撫하였다. 建安 5년(200)에 사자를 보내 曹操을 만나 투항하여 烏桓校尉에 임명되었다. 曹操가 河北을 평정하자 部曲과 鮮卑을 이끌고 名馬를 曹操의 군대에게 바쳤다. 三郡烏桓 정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워 關內侯에 봉해졌고, 曹操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다. 거느렸던 幽州와 幷州의 烏桓 만여 落을 이끌고 中原으로 遷徙하였다. 建安 17년(212)에 鮮卑 軻比能部 3천여 騎와 曹操를 따라 河間郡에서 田銀을 정벌하는 데 참전하였다. 曹魏 文帝시기 度遼將軍에 임명되고 縣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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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三國志』에서는 “種人”의 ‘人’字를 생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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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원문은 “袁紹因寵慰柔, 以安北邊.”인데, 『三國志』에서는 “紹因寵慰以安北邊”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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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袁尙(?~207): 後漢末 汝南郡 汝陽縣(현재 河南省 商水縣 서북) 사람이며, 字는 顯甫이다. 袁紹의 셋째 아들로 가장 총애를 받았다. 建安 7년(202)에 袁紹가 죽자 무리들은 장자인 元譚을 세우려 하였으나, 袁紹의 측근 審配 등이 袁尙에 아부하여 袁紹의 유언을 위조하여 袁尙을 후계자로 옹립하고 冀州를 거느리게 하였다. 建安 8년(203)에 袁譚이 曹操에게 黎陽(현재 河南省 淩縣 동쪽)에서 패하자 구원병의 파병을 거절하여 형제의 틈이 벌어졌고, 袁譚은 曹操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建安 9년(204)에 曹操는 이 기회를 틈타 본거지인 鄴(현재 河北省 臨漳縣 서남)을 포위하였고, 袁尙은 군대를 내보내 싸웠으나 패하여 冀州를 빼앗기고 달아나 둘째 형 幽州刺史 袁熙에게 달아났다. 建安 10년(205)에 袁熙의 部將이 반란을 일으키자 袁熙와 함께 遼西烏丸 蹋頓에게 투항하였다. 建安 12년(207)에 曹操가 三軍오환을 격파하자 袁熙와 함께 遼東太守 公孫康에게 의탁하였으나, 公孫康은 袁尙 형제를 죽여 曹操에게 수급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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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원문은 “及紹子尙敗, 奔蹋頓.”인데, 『三國志』에서는 “後袁尙敗奔蹋頓”이라고 하였다. 袁紹는 建安 5년(200) 관도에서 曹操에게 패하자 분을 이기지 못하여 建安 7년(202)에 죽었다. 袁紹의 부하들은 셋째아들 袁尙을 옹립하였다. 曹操는 이를 이용하여 靑州刺史 袁譚을 공격하여 靑州를 점령하였다. 후에 袁譚과 袁尙 형제가 반목하여 서로 싸우는 틈을 타서 曹操는 建安 9년(204)에 袁氏의 본거지인 鄴을 점령하였다. 이에 袁尙은 형인 袁熙가 있던 幽州를 달아났으나 袁熙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袁尙과 袁熙는 遼西烏丸에게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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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三國志』에는 번역문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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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원문은 “尙欲憑其兵力, 復圖中國”인데, 『三國志』에서는 “憑其勢, 復圖冀州.”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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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曹操(155~220): 沛國 譙縣 사람이며, 字는 孟德이다. 太尉 曹嵩의 아들이다. 孝廉에 천거되어 洛陽北部尉가 되었다. 황건적의 난을 토벌하였으며, 後漢末 군웅할거를 평정하여 華北을 통일하였다. 丞相을 거쳐 魏公, 魏王이 되었으나 찬탈하지 않았다. 저서에는 『孫子略解』, 『兵法接要』가 있고, 그의 詩歌를 모아 편찬한 『魏武帝集』이 있었으나 散佚되고 후세 사람이 『曹操集』을 輯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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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원문은 “閻柔率鮮卑·烏桓歸附”인데, 『三國志』에서는 “柔帥鮮卑·烏丸歸附”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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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원문은 “操即以柔爲校尉”인데, 『三國志』에서는 “遂因以柔爲校尉, 猶持漢使節, 治廣甯如舊.”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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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8)
    『三國志』에서는 “建安十一年”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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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9)
    『三國志』에서는 曹操 대신 “太祖”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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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0)
    원문은 “曹操自征烏桓”인데, 『三國志』에서는 “太祖自征蹋頓於柳城”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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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1)
    柳城縣: 前漢時代 설치되었고, 治所는 현재의 遼寧省 朝陽縣 남쪽이다. 遼西郡都尉의 治所였다. 後漢時代 廢置되었고, 五胡十六國時代 前燕이 다시 설치하였다. 北魏 太平眞君 8년(447)에 龍城縣에 합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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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2)
    원문은 “大破蹋頓於柳城, 斬之, 首虜二十餘萬人.”인데, 『三國志』에서는 “潛軍詭道, 未至百餘里, 虜乃覺. 尙與蹋頓將衆逆戰於凡城, 兵馬甚盛. 太祖登高望虜陳, (柳)[抑]軍未進, 觀其小動, 乃擊破其衆, 臨陳斬蹋頓首, 死者被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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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3)
    원문은 “袁尙與樓班‧烏延等皆走遼東”인데, 『三國志』에서는 “速附丸‧樓班‧烏延等走遼東”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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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4)
    公孫康: 公孫度의 아들이며, 대를 이어 遼東을 지배하였다. 曹操가 3郡의 烏桓을 정벌하고 柳城을 도륙하자 袁尙 등이 遼東으로 달아났는데, 公孫康은 袁尙을 참하여 조조에게 袁尙의 수급을 보냈다. 이 공으로 그는 襄平侯에 봉해지고 左將軍에 임명되었다. 曹丕가 즉위한 후 大司馬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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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5)
    원문은 “遼東太守公孫康並斬送之”인데, 『三國志』에서는 “遼東悉斬, 傳送其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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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6)
    원문은 “其餘眾萬餘落, 悉徙居中國云.”인데, 『三國志』에서는 “其餘遺迸皆降. 及幽州‧并州柔所統烏丸萬餘落, 悉徙其族居中國, 帥從其侯王大人種衆與征伐. 由是三郡烏丸爲天下名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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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헌제(獻帝), 구력거, 누반(樓班), 답돈(蹋頓), 원소(袁紹), 공손찬(公孫瓚), 답돈, 원소, 원소, 공손찬, 원소, 답돈, 난루, 소복연, 오연, 난루, 소복연, 누반, 답돈, 답돈, 염유(閻柔), 형거(邢擧), 원소, 염유, 원소, 원상(袁尙), 조조, 답돈, 원상, 조조(曹操), 염유, 조조, 조조, 염유, 조조, 답돈, 원상, 누반, 오연, 공손강(公孫康), 조조
지명
광양[군](廣陽郡), 유주, 기주, 하북(河北), 유성[현](柳城縣), 요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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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曹操)가 오환을 정벌하고 공손강(公孫康)이 원상(袁尙), 누반(樓班), 오연(烏延) 등을 참함 자료번호 : jo.k_0003_0120_0010_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