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유우(劉虞)가 장순(張純) 등 오환의 무리를 막으니 북방의 변경이 안정됨

  • 국가
    오환(烏桓)
영제(靈帝)주 001
각주 001)
靈帝(157~189; 재위 167~189): 이름은 劉宏이며, 章帝의 玄孫이다.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解瀆亭侯가 되었다. 永康元年(167)에 桓帝 사후 竇太后와 그녀의 아버지 竇武가 皇帝로 옹립하였다. 재위기간 중 竇武와 陳蕃이 宦官을 주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고, 宦官들은 계속 정치에 간여하였다. 환관들은 黨禁(黨錮의 禍)을 다시 일으켜서 李膺·杜密 등 백여 인을 체포하여 죽였고 豪傑과 儒學者, 덕행 있는 사람을 黨人으로 몰아 6~700여 인을 죽이거나 유배 보내거나 禁錮에 처하였다. 西邸에서 공개적으로 官爵을 팔았으며 天下의 田畝에 100錢의 세금을 매겨 宮室을 세웠다. 中平元年(184)에 黃巾賊이 봉기하여 後漢이 사실상 붕괴하였다.
닫기
초기에주 002
각주 002)
『三國志』에는 “漢末”이라고 기록하였다.
닫기
상곡[군]에 있던 오환대인(烏桓大人) 난루(難樓)라는 자가주 003
각주 003)
원문은 “烏桓大人上谷有難樓者”인데, 『三國志』에서는 “上谷烏丸大人難樓”라 하였다.
닫기
무리 9천여 락(落)을 거느렸고, 요서[군]에는 구력거(丘力居)라는 자가주 004
각주 004)
원문은 “遼西有丘力居者”인데, 『三國志』에서는 “遼西烏丸大人丘力居”라 하였다.
닫기
무리 5천여 락을 이끌었는데, [두 사람] 모두 왕(王)이라고 자칭하였다.주 005
각주 005)
원문은 “皆自稱王”인데, 『三國志』에서는 “各稱王”이라 하였다.
닫기
또, 요동[군] 주 006
각주 006)
遼東郡: 戰國 燕의 장수 秦開가 東胡를 격파한 후 설치하였다. 秦漢時代의 治所는 襄平縣(현재 遼寧省 遼陽市)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遼寧省 大凌河 동쪽 지역에 해당한다. 遼水의 동쪽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三國志』에는 “遼東屬國”이라고 기록하였다.
닫기
에 있던 소복연(蘇僕延)주 007
각주 007)
원문은 “又遼東蘇僕延”인데, 『三國志』에서는 “遼東屬國烏丸大人蘇僕延, 眾千餘落, 自稱峭王”이라고 하였다.
닫기
무리 1천여 락을 거느리고 스스로 초왕(峭王)이라 칭하였다. 우북평[군]에 있던 오연(烏延)주 008
각주 008)
원문은 “右北平烏延”인데, 『三國志』에서는 “右北平烏丸大人烏延”이라고 하였다.
닫기
무리 8백여 락을 이끌면서 한노왕(汗魯王)이라 자칭하였다. 이들은 모두 용감하고 굳셌으며 계교와 방책이 많았다.주 009
각주 009)
원문은 “並勇健而多計策”인데, 『三國志』에서는 “皆有計策勇健”이라 하였다.
닫기

중평(中平) 4년(187)에 전직 중산 태수(中山太守) 장순(張純)이 배반하여 구력거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주 010
각주 010)
원문은 “中平四年, 前中山太守張純畔, 入丘力居眾中”인데, 『三國志』에서는 “中山太守張純叛入丘力居衆中”이라 하였다.
닫기
스스로를 미천안정왕(彌天安定王)이라 칭하며 마침내 여러 군에 있던 오환 무리들의 우두머리[元帥]가 되었고,주 011
각주 011)
원문은 “遂爲諸郡烏桓元帥”인데, 『三國志』에서는 “爲三郡烏丸元帥”라고 하였다.
닫기
청[주](靑州),주 012
각주 012)
靑州: 前漢 武帝가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山東省 德州市·平原縣·高唐縣 以東, 河北省 吳橋縣과 山東省 馬頰河 以南, 濟南·臨胊·安丘·卽墨·萊陽 등 市와 縣 以北 지역에 해당한다. 後漢時代에는 臨淄縣(현재 山東省 淄博市 臨淄鎭 북쪽)에 治所를 두었다. 魏晉時代 靑州의 서북쪽 경계는 축소되고 남쪽 경계는 확장되어 현재의 山東省 莒南·日照 등 縣 지역을 포함하였다.
닫기
서[주](徐州),주 013
각주 013)
徐州: 前漢 武帝가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江蘇省 長江 이북과 山東省 동남부 지역이다. 後漢時代에는 鄒縣(현재 山東省 郯城縣)에 治所를 두었다가 三國 魏 시기 彭城(현재의 江蘇省 徐州市)로 治所를 옮겼다. 東晉·北朝 이후 관할구역이 점차 축소되었다.
닫기
유[주], 기[주](冀州) 주 014
각주 014)
冀州: 前漢 武帝시기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이며, 10개의 郡國을 감찰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 河北省 중남부와 山東省 西端, 河南省 北端 지역에 해당한다. 後漢時代 治所는 高邑縣(현재 河北省 柏鄕縣 北固城)이었으나 桓帝·靈帝시기에 鄴縣(현재 河北省 臨漳縣 서남의 鄴城)으로 옮겼으며, 9개 郡國을 관장하였고, 관할구역은 前漢時代보다 확대되어 북쪽으로 河北省 大淸河와 天津市 海河 以南으로 확대되고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 魏晉時代에는 信都縣(현재 河北省 冀州市)가 治所가 되었으며, 관할구역은 축소되었다.
닫기
4주(州)를 침입하여 노략질하였다.주 015
각주 015)
원문은 “寇掠”인데, 『三國志』에서는 ‘掠’字 대신 ‘略’字를 사용하였다.
닫기
[중평] 5년(188)주 016
각주 016)
원문은 “五年”인데, 『三國志』에서는 “靈帝末”이라고 하였다.
닫기
에 [조정에서는] 유우(劉虞) 주 017
각주 017)
劉虞(?~193): 後漢시대 東海郡 郯縣 사람으로 字는 伯安이다. 孝廉에 찰거되어 幽州刺史·甘陵相·宗正을 지냈다. 靈帝 때 前中山相 張純과 前泰山太守 張擧 등이 烏桓과 연합하여 起兵하자 幽州牧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여 太尉로 승진되고 容丘侯에 봉해졌다. 董卓이 정권을 잡은 후 大司馬에 임명되었고 襄賁侯에 봉해졌다. 袁紹가 董卓을 토벌하려 할 때 그를 맹주로 삼으려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후에 公孫瓚과 사이가 멀어져 그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살해되었다.
닫기
를 유주목(幽州牧)주 018
각주 018)
幽州牧: 幽州의 지방장관의 명칭이다. 州牧은 漢代 지방행정구역인 州의 장관이다. 漢武帝 때 전국을 13州部로 나누고 刺史를 두어 諸郡을 감찰하게 하였다. 秩은 六百石이었다. 成帝 綏和 元年(전8) 刺史를 州牧으로 改稱하고 秩은 二千石으로 높아져 지위는 九卿 다음이었다. 哀帝 建平 2년(전5) 원래의 명칭과 秩로 바뀌었다. 元壽 2년(전1) 州牧으로 바꾸었다. 後漢時代에는 刺史를 설치하고 秩은 六百石이었으며, 監察을 담당하였다. 후에 점차로 州가 행정구역의 기능을 하면서 일급 지방행정장관이 되었다. 靈帝 中平 5년(188) 太常 劉焉이 黃巾賊의 난 이후 四方에 일이 많고 刺史의 권위가 낮아 州牧을 두어 重臣을 임명할 것을 건의하여 靈帝가 이를 따랐다. 州牧은 州의 軍政大權을 장악하여 郡守보다 지위가 높았다.
닫기
으로 임명하여 [오환의 침입을 막도록 하였는데] 유우는 현상금을 걸어 [결국] 장순의 목을 베니주 019
각주 019)
원문은 “虞購募斬純首”인데, 『三國志』에서는 “募胡斬純首”라고 하였다.
닫기
북방의 변경(北州)주 020
각주 020)
원문의 “北州”는 지명이 아니라 北邊지방을 총칭하는 단어이다. 中華書局標點校勘本에서는 “北州”를 地名으로 보았으나 漢代에 北州라는 행정구역은 없다. 標點校勘本의 誤記이다.
닫기
은 이에 안정되었다.

  • 각주 001)
    靈帝(157~189; 재위 167~189): 이름은 劉宏이며, 章帝의 玄孫이다.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解瀆亭侯가 되었다. 永康元年(167)에 桓帝 사후 竇太后와 그녀의 아버지 竇武가 皇帝로 옹립하였다. 재위기간 중 竇武와 陳蕃이 宦官을 주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고, 宦官들은 계속 정치에 간여하였다. 환관들은 黨禁(黨錮의 禍)을 다시 일으켜서 李膺·杜密 등 백여 인을 체포하여 죽였고 豪傑과 儒學者, 덕행 있는 사람을 黨人으로 몰아 6~700여 인을 죽이거나 유배 보내거나 禁錮에 처하였다. 西邸에서 공개적으로 官爵을 팔았으며 天下의 田畝에 100錢의 세금을 매겨 宮室을 세웠다. 中平元年(184)에 黃巾賊이 봉기하여 後漢이 사실상 붕괴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2)
    『三國志』에는 “漢末”이라고 기록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원문은 “烏桓大人上谷有難樓者”인데, 『三國志』에서는 “上谷烏丸大人難樓”라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원문은 “遼西有丘力居者”인데, 『三國志』에서는 “遼西烏丸大人丘力居”라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원문은 “皆自稱王”인데, 『三國志』에서는 “各稱王”이라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遼東郡: 戰國 燕의 장수 秦開가 東胡를 격파한 후 설치하였다. 秦漢時代의 治所는 襄平縣(현재 遼寧省 遼陽市)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遼寧省 大凌河 동쪽 지역에 해당한다. 遼水의 동쪽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三國志』에는 “遼東屬國”이라고 기록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7)
    원문은 “又遼東蘇僕延”인데, 『三國志』에서는 “遼東屬國烏丸大人蘇僕延, 眾千餘落, 自稱峭王”이라고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8)
    원문은 “右北平烏延”인데, 『三國志』에서는 “右北平烏丸大人烏延”이라고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9)
    원문은 “並勇健而多計策”인데, 『三國志』에서는 “皆有計策勇健”이라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0)
    원문은 “中平四年, 前中山太守張純畔, 入丘力居眾中”인데, 『三國志』에서는 “中山太守張純叛入丘力居衆中”이라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1)
    원문은 “遂爲諸郡烏桓元帥”인데, 『三國志』에서는 “爲三郡烏丸元帥”라고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2)
    靑州: 前漢 武帝가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山東省 德州市·平原縣·高唐縣 以東, 河北省 吳橋縣과 山東省 馬頰河 以南, 濟南·臨胊·安丘·卽墨·萊陽 등 市와 縣 以北 지역에 해당한다. 後漢時代에는 臨淄縣(현재 山東省 淄博市 臨淄鎭 북쪽)에 治所를 두었다. 魏晉時代 靑州의 서북쪽 경계는 축소되고 남쪽 경계는 확장되어 현재의 山東省 莒南·日照 등 縣 지역을 포함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3)
    徐州: 前漢 武帝가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江蘇省 長江 이북과 山東省 동남부 지역이다. 後漢時代에는 鄒縣(현재 山東省 郯城縣)에 治所를 두었다가 三國 魏 시기 彭城(현재의 江蘇省 徐州市)로 治所를 옮겼다. 東晉·北朝 이후 관할구역이 점차 축소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4)
    冀州: 前漢 武帝시기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이며, 10개의 郡國을 감찰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 河北省 중남부와 山東省 西端, 河南省 北端 지역에 해당한다. 後漢時代 治所는 高邑縣(현재 河北省 柏鄕縣 北固城)이었으나 桓帝·靈帝시기에 鄴縣(현재 河北省 臨漳縣 서남의 鄴城)으로 옮겼으며, 9개 郡國을 관장하였고, 관할구역은 前漢時代보다 확대되어 북쪽으로 河北省 大淸河와 天津市 海河 以南으로 확대되고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 魏晉時代에는 信都縣(현재 河北省 冀州市)가 治所가 되었으며, 관할구역은 축소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5)
    원문은 “寇掠”인데, 『三國志』에서는 ‘掠’字 대신 ‘略’字를 사용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6)
    원문은 “五年”인데, 『三國志』에서는 “靈帝末”이라고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7)
    劉虞(?~193): 後漢시대 東海郡 郯縣 사람으로 字는 伯安이다. 孝廉에 찰거되어 幽州刺史·甘陵相·宗正을 지냈다. 靈帝 때 前中山相 張純과 前泰山太守 張擧 등이 烏桓과 연합하여 起兵하자 幽州牧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여 太尉로 승진되고 容丘侯에 봉해졌다. 董卓이 정권을 잡은 후 大司馬에 임명되었고 襄賁侯에 봉해졌다. 袁紹가 董卓을 토벌하려 할 때 그를 맹주로 삼으려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후에 公孫瓚과 사이가 멀어져 그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살해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8)
    幽州牧: 幽州의 지방장관의 명칭이다. 州牧은 漢代 지방행정구역인 州의 장관이다. 漢武帝 때 전국을 13州部로 나누고 刺史를 두어 諸郡을 감찰하게 하였다. 秩은 六百石이었다. 成帝 綏和 元年(전8) 刺史를 州牧으로 改稱하고 秩은 二千石으로 높아져 지위는 九卿 다음이었다. 哀帝 建平 2년(전5) 원래의 명칭과 秩로 바뀌었다. 元壽 2년(전1) 州牧으로 바꾸었다. 後漢時代에는 刺史를 설치하고 秩은 六百石이었으며, 監察을 담당하였다. 후에 점차로 州가 행정구역의 기능을 하면서 일급 지방행정장관이 되었다. 靈帝 中平 5년(188) 太常 劉焉이 黃巾賊의 난 이후 四方에 일이 많고 刺史의 권위가 낮아 州牧을 두어 重臣을 임명할 것을 건의하여 靈帝가 이를 따랐다. 州牧은 州의 軍政大權을 장악하여 郡守보다 지위가 높았다.
     바로가기
  • 각주 019)
    원문은 “虞購募斬純首”인데, 『三國志』에서는 “募胡斬純首”라고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20)
    원문의 “北州”는 지명이 아니라 北邊지방을 총칭하는 단어이다. 中華書局標點校勘本에서는 “北州”를 地名으로 보았으나 漢代에 北州라는 행정구역은 없다. 標點校勘本의 誤記이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난루(難樓), 구력거(丘力居), 소복연(蘇僕延), 초왕(峭王), 오연(烏延), 한노왕(汗魯王), 장순(張純), 구력거, 미천안정왕(彌天安定王), 유우(劉虞), 유우, 장순
지명
상곡[군], 요서[군], 요동[군], 우북평[군], 청[주](靑州), 서[주](徐州), 유[주], 기[주](冀州)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유우(劉虞)가 장순(張純) 등 오환의 무리를 막으니 북방의 변경이 안정됨 자료번호 : jo.k_0003_0120_0010_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