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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의 무하(無何), 구륜(丘倫) 등이 한나라와 전쟁을 벌인 뒤 패하자 다시 화친을 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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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환(烏桓)
명[제](明帝) 주 001
각주 001)
明帝(28~75; 재위 57~75): 이름은 莊, 原名은 陽, 字는 子麗이다. 建武 15년(39)에 東海公, 建武 17년(41)에 東海王으로 봉해졌으며, 建武 19년(43)에 皇太子가 되었다. 中元 2년(57)에 光武帝가 죽자 즉위하였다. 光武帝시기의 제도를 이어받고 法令을 엄격하게 적용하였으며 外戚과 封侯의 정치간여를 금지하였다. 儒術을 제창하고 辟雍에 친히 임하여 養老의 예를 행했으며 三老와 五更을 존중하고 外戚 樊·郭·陰·馬氏 자제, 즉 四姓小侯들을 위한 학교를 설치하였다. 班超를 보내 西域을 경영하였고, 郎中 蔡愔을 天竺에 보내 佛法을 구했다. 재위기간 중 租賦와 徭役을 경감하고 汴河를 수리하여 민생이 비교적 안정되었다. 廟號는 顯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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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章帝),주 002
각주 002)
章帝(56~88; 재위 75~88): 이름은 烜이며, 明帝의 5子이다. 永平 3년(60)에 皇太子가 되었고, 永平 18년(75)에 明帝 사후 즉위하였다. 明帝시대의 가혹함을 없애고 관대하게 대했다. 建初 4년(79)에 諸儒를 모아 白虎觀에서 『五經』의 異同을 논했으며, 班固에게 이를 근거로 『白虎通』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漢禮를 정할 것을 지시하여 150篇을 만들었다. 정치와 민생이 안정되어 후세 사가들은 明帝의 치세와 함께 ‘明章之治’라 부른다. 廟號는 肅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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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和帝) 주 003
각주 003)
和帝(79~105; 재위 88~105): 이름은 肇이며, 章帝의 아들이다. 章和 2년(88) 章帝 사후 즉위하였는데, 당시 10세에 불과하여 竇太后가 臨朝稱制하여 外戚 竇憲 등이 정치를 담당하였다. 永元 4년(92) 竇氏와 그 일당을 주살하고 親政을 시작하였다. 군대를 파견해 匈奴·羌·西域諸國을 정벌하였으며, 재해지역의 租賦를 감면하는 조서를 반포하기도 했다. 재위기간 중 西域都護 班超가 사람을 大秦(로마)에 파견하여 西海(페르시아만)에서 막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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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의 시기에는 모두 변방이 편안하여 별다른 일이 없었다.주 004
각주 004)
원문은 “及明·章·和三世, 皆保塞無事.”인데, 『三國志』에서는 “至永平中, 漁陽烏丸大人欽志賁帥種人叛, 鮮卑還爲寇害, 遼東太守祭肜募殺志賁, 遂破其衆.”이라 하여 원문과는 달리 烏丸과 鮮卑가 변방을 침입하였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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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安帝) 주 005
각주 005)
安帝(94~125; 재위 106~125): 이름은 祜이며, 章帝의 손자이고 淸河王 劉慶의 아들이다. 延平元年(106) 殤帝가 죽자 鄧太后와 車騎將軍 鄧騭이 皇帝로 옹립하였다. 建光元年(121) 鄧太后 사후 親政하여 宦官 李閏 등과 함께 鄧騭의 種族을 멸하기로 모의하여 성공하였다. 이때부터 宦官을 총애하기 시작하였다. 廟號는 恭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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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永初) 3년(109)에 어양오환(漁陽烏桓)주 006
각주 006)
漁陽烏桓: 漁陽郡 북쪽에 옮겨 살던 烏桓 부족들을 지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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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북평호(右北平胡)주 007
각주 007)
『史記』와 『漢書』 등에서 “胡”는 匈奴를 주로 지칭했으나, 원문에서 無何가 鮮卑와 연합하여 後漢의 변경을 침입한 것을 보면, 원문의 “胡”는 鮮卑를 지칭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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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 [기(騎)]가 대군상곡[군]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다. 가을에 안문오환(鴈門烏桓)주 008
각주 008)
鴈門烏桓: 鴈門郡 북쪽에 옮겨 살던 烏桓 부족들을 지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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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솔중왕(率衆王) 무하(無何) 주 009
각주 009)
원문에는 “允”이라 기록되었으나 교감자가 “何”로 바꾸었다. 『三國志』에서 “無何”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無允”이 아닌 “無何”가 옳은 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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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선비의 대인 구륜(丘倫) 등, 남흉노(南匈奴) 골도후(骨都侯)주 010
각주 010)
骨都侯: 呼延·須卜 등 匈奴의 귀족 가문이 맡았던 벼슬이다. 匈奴시대에는 單于의 최고 측근으로 활약하며 외교사절이 되어 漢나라와의 외교교섭을 맡고 제국 내의 여러 부족과 씨족의 동향을 감찰하였으며 재판에도 참여하였다. 南匈奴에서는 다섯 골도후가 두어져 각각 백성들을 다스리고 각 部에 주둔하여 군사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이는 南匈奴시기 귀족들의 세력 신장을 반영한다(사와다, 2007: 16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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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함께 모두 합하여 7천 기를 이끌고 오원[군](五原郡) 주 011
각주 011)
五原郡: 前漢 元朔 2년(전127)에 설치하였다. 본래 秦 九原郡의 땅이었으며, 秦이 망한 후 匈奴에게 넘어갔었다. 治所는 九原縣(현재 內蒙古 包頭市 서북)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內蒙古 後套 以東과 陰山 以南, 包頭市 以西, 達拉特旗·準格爾旗 등지이다. 後漢初 匈奴의 南單于가 部衆을 나누어 이곳에 주둔하였고, 末年에 廢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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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침입하여 약탈하였으며, [오원]태수(五原太守)와 구원[현](九原縣) 주 012
각주 012)
九原縣: 본래 戰國 趙의 邑이었으나 秦이 縣을 설치하였다. 治所는 현재의 內蒙古 包頭市 서쪽이며, 九原郡의 治所이다. 秦末에 匈奴의 땅이 되었고 郡과 縣이 함께 廢置되었다. 前漢 元朔 2년(전127)에 다시 설치되었고 五原郡의 治所가 되었다. 後漢 建武년간 다시 廢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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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거곡(高渠谷)에서 싸웠다. 한나라 병사들이 크게 패하였고 무하는 군의 장리(長吏)주 013
각주 013)
長吏: 대개 二百石 이상의 관리를 지칭한다(『資治通鑑』 권13 「漢紀5」 〈文帝元年(전179)條〉의 胡三省注: 442, “師古曰: 長吏, 縣之令·長也. ……班表: 縣令·長皆秦官, 掌治其縣. 萬戶以上爲令, 秩千石至六百石; 減萬戶爲長, 秩五百石至三百石; 皆有丞·尉, 秩四百石至二百石; 是爲長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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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살해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에 거기장군(車騎將軍)주 014
각주 014)
車騎將軍: 前漢 文帝시기 처음 설치하였으며 功臣에게 수여하였다. 宮衛를 관장하였으며 禁兵을 지휘하였다. 金印紫綬를 받았고 지위는 三公과 같았다. 혹은 車騎將軍 앞에 ‘大司馬’의 칭호를 덧붙이거나 뒤에 ‘領尙書事’를 덧붙이기도 했다. 後漢時代 車騎將軍은 驃騎將軍 다음의 지위였는데, 늘 설치하지는 않았다. 後漢末에는 第2品이었다. 晉代에는 第1品이었으며, 南朝時代에도 두어졌다. 劉宋의 경우 『通典·職官典』 「秩品·宋官品」에 의하면 第2品의 將軍號이다. 北魏時代에는 品階가 第1品下였다. 車騎大將軍의 경우 三公 위의 지위였다. 『三國志』에서는 번역문과는 달리 ‘行車騎將軍’이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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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희(何熙) 주 015
각주 015)
何熙: 陳國 사람이며, 字는 孟孫이다. 永元년간에 謁者에 임명되었고, 和帝는 그가 신장이 크고 威容이 있으며 목소리가 큰 것을 훌륭하게 생각하여 御史中丞으로 발탁하였다. 司隷校尉·大司農·車騎將軍 등을 역임하였다. 후에 南匈奴와 烏桓을 토벌하러 出征했다가 軍中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薄葬하도록 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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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도료장군(度遼將軍) 양근(梁慬) 주 016
각주 016)
梁慬: 北地郡 弋居縣 사람이다. 아버지 梁諷이 외척 竇憲에게 실각되어 살해되었다. 그러나 竇氏가 제거된 후 和帝가 梁諷의 억울한 사정을 알고 아들인 梁慬을 郎中으로 제수하였다. 車騎司馬와 西域副校尉을 역임하였고 西域과 羌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永初 3년(109)에 行度遼將軍에 임명되어 行車騎將軍 何熙, 中郞將 龐雄, 遼東太守 耿夔 등과 함께 南匈奴와 烏桓 토벌에 從軍하여 공을 세웠으며 度遼將軍에 拜授되었다. 다음 해에 安定·北地·上郡이 羌을 침입하자 이를 대처하도록 파견되었다가 專擅을 이유로 하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후에 羌이 三輔를 공격하고 關中의 盜賊이 봉기하자 謁者로 임명되어 토벌하러 가던 도중 湖縣에서 病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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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보내 공격하게 하니 [하희양근은] 이들을 대파(大破)하였다.주 017
각주 017)
원문은 “安帝永初三年夏, 漁陽烏桓與右北平胡千餘寇代郡·上谷. 秋, 鴈門烏桓率眾王無何(允), 與鮮卑大人丘倫等, 及南匈奴骨都侯, 合七千騎寇五原, 與太守戰於九原高渠谷, 漢兵大敗, 殺郡長吏. 乃遣車騎將軍何熙·度遼將軍梁慬等擊, 大破之.”인데, 『三國志』에서는 “至安帝時, 漁陽·右北平·雁門烏丸率衆王無何等復與鮮卑·匈奴合, 鈔略代郡·上谷·涿郡·五原, 乃以大司農何熙行車騎將軍, 左右羽林五營士, 發緣邊七郡黎陽營兵合二萬人擊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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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는 항복을 청하였고, 선비는 달아나 새외로 돌아갔다.주 018
각주 018)
원문은 “無何乞降, 鮮卑走還塞外.”인데, 『三國志』에서는 “匈奴降, 鮮卑·烏丸各還塞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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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오환은 점차 다시 [한나라와] 화친(和親)하고 귀부하였다. 이에 [한나라 조정은] 오환의 대인 융주외(戎朱廆)를 친한도위(親都尉)주 019
각주 019)
『三國志』에서는 원문의 “親漢都尉’”를 “都尉”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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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임명하였다.

  • 각주 001)
    明帝(28~75; 재위 57~75): 이름은 莊, 原名은 陽, 字는 子麗이다. 建武 15년(39)에 東海公, 建武 17년(41)에 東海王으로 봉해졌으며, 建武 19년(43)에 皇太子가 되었다. 中元 2년(57)에 光武帝가 죽자 즉위하였다. 光武帝시기의 제도를 이어받고 法令을 엄격하게 적용하였으며 外戚과 封侯의 정치간여를 금지하였다. 儒術을 제창하고 辟雍에 친히 임하여 養老의 예를 행했으며 三老와 五更을 존중하고 外戚 樊·郭·陰·馬氏 자제, 즉 四姓小侯들을 위한 학교를 설치하였다. 班超를 보내 西域을 경영하였고, 郎中 蔡愔을 天竺에 보내 佛法을 구했다. 재위기간 중 租賦와 徭役을 경감하고 汴河를 수리하여 민생이 비교적 안정되었다. 廟號는 顯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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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章帝(56~88; 재위 75~88): 이름은 烜이며, 明帝의 5子이다. 永平 3년(60)에 皇太子가 되었고, 永平 18년(75)에 明帝 사후 즉위하였다. 明帝시대의 가혹함을 없애고 관대하게 대했다. 建初 4년(79)에 諸儒를 모아 白虎觀에서 『五經』의 異同을 논했으며, 班固에게 이를 근거로 『白虎通』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漢禮를 정할 것을 지시하여 150篇을 만들었다. 정치와 민생이 안정되어 후세 사가들은 明帝의 치세와 함께 ‘明章之治’라 부른다. 廟號는 肅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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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和帝(79~105; 재위 88~105): 이름은 肇이며, 章帝의 아들이다. 章和 2년(88) 章帝 사후 즉위하였는데, 당시 10세에 불과하여 竇太后가 臨朝稱制하여 外戚 竇憲 등이 정치를 담당하였다. 永元 4년(92) 竇氏와 그 일당을 주살하고 親政을 시작하였다. 군대를 파견해 匈奴·羌·西域諸國을 정벌하였으며, 재해지역의 租賦를 감면하는 조서를 반포하기도 했다. 재위기간 중 西域都護 班超가 사람을 大秦(로마)에 파견하여 西海(페르시아만)에서 막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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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원문은 “及明·章·和三世, 皆保塞無事.”인데, 『三國志』에서는 “至永平中, 漁陽烏丸大人欽志賁帥種人叛, 鮮卑還爲寇害, 遼東太守祭肜募殺志賁, 遂破其衆.”이라 하여 원문과는 달리 烏丸과 鮮卑가 변방을 침입하였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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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安帝(94~125; 재위 106~125): 이름은 祜이며, 章帝의 손자이고 淸河王 劉慶의 아들이다. 延平元年(106) 殤帝가 죽자 鄧太后와 車騎將軍 鄧騭이 皇帝로 옹립하였다. 建光元年(121) 鄧太后 사후 親政하여 宦官 李閏 등과 함께 鄧騭의 種族을 멸하기로 모의하여 성공하였다. 이때부터 宦官을 총애하기 시작하였다. 廟號는 恭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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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漁陽烏桓: 漁陽郡 북쪽에 옮겨 살던 烏桓 부족들을 지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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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史記』와 『漢書』 등에서 “胡”는 匈奴를 주로 지칭했으나, 원문에서 無何가 鮮卑와 연합하여 後漢의 변경을 침입한 것을 보면, 원문의 “胡”는 鮮卑를 지칭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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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鴈門烏桓: 鴈門郡 북쪽에 옮겨 살던 烏桓 부족들을 지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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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원문에는 “允”이라 기록되었으나 교감자가 “何”로 바꾸었다. 『三國志』에서 “無何”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無允”이 아닌 “無何”가 옳은 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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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骨都侯: 呼延·須卜 등 匈奴의 귀족 가문이 맡았던 벼슬이다. 匈奴시대에는 單于의 최고 측근으로 활약하며 외교사절이 되어 漢나라와의 외교교섭을 맡고 제국 내의 여러 부족과 씨족의 동향을 감찰하였으며 재판에도 참여하였다. 南匈奴에서는 다섯 골도후가 두어져 각각 백성들을 다스리고 각 部에 주둔하여 군사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이는 南匈奴시기 귀족들의 세력 신장을 반영한다(사와다, 2007: 16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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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五原郡: 前漢 元朔 2년(전127)에 설치하였다. 본래 秦 九原郡의 땅이었으며, 秦이 망한 후 匈奴에게 넘어갔었다. 治所는 九原縣(현재 內蒙古 包頭市 서북)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內蒙古 後套 以東과 陰山 以南, 包頭市 以西, 達拉特旗·準格爾旗 등지이다. 後漢初 匈奴의 南單于가 部衆을 나누어 이곳에 주둔하였고, 末年에 廢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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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九原縣: 본래 戰國 趙의 邑이었으나 秦이 縣을 설치하였다. 治所는 현재의 內蒙古 包頭市 서쪽이며, 九原郡의 治所이다. 秦末에 匈奴의 땅이 되었고 郡과 縣이 함께 廢置되었다. 前漢 元朔 2년(전127)에 다시 설치되었고 五原郡의 治所가 되었다. 後漢 建武년간 다시 廢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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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長吏: 대개 二百石 이상의 관리를 지칭한다(『資治通鑑』 권13 「漢紀5」 〈文帝元年(전179)條〉의 胡三省注: 442, “師古曰: 長吏, 縣之令·長也. ……班表: 縣令·長皆秦官, 掌治其縣. 萬戶以上爲令, 秩千石至六百石; 減萬戶爲長, 秩五百石至三百石; 皆有丞·尉, 秩四百石至二百石; 是爲長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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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車騎將軍: 前漢 文帝시기 처음 설치하였으며 功臣에게 수여하였다. 宮衛를 관장하였으며 禁兵을 지휘하였다. 金印紫綬를 받았고 지위는 三公과 같았다. 혹은 車騎將軍 앞에 ‘大司馬’의 칭호를 덧붙이거나 뒤에 ‘領尙書事’를 덧붙이기도 했다. 後漢時代 車騎將軍은 驃騎將軍 다음의 지위였는데, 늘 설치하지는 않았다. 後漢末에는 第2品이었다. 晉代에는 第1品이었으며, 南朝時代에도 두어졌다. 劉宋의 경우 『通典·職官典』 「秩品·宋官品」에 의하면 第2品의 將軍號이다. 北魏時代에는 品階가 第1品下였다. 車騎大將軍의 경우 三公 위의 지위였다. 『三國志』에서는 번역문과는 달리 ‘行車騎將軍’이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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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何熙: 陳國 사람이며, 字는 孟孫이다. 永元년간에 謁者에 임명되었고, 和帝는 그가 신장이 크고 威容이 있으며 목소리가 큰 것을 훌륭하게 생각하여 御史中丞으로 발탁하였다. 司隷校尉·大司農·車騎將軍 등을 역임하였다. 후에 南匈奴와 烏桓을 토벌하러 出征했다가 軍中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薄葬하도록 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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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梁慬: 北地郡 弋居縣 사람이다. 아버지 梁諷이 외척 竇憲에게 실각되어 살해되었다. 그러나 竇氏가 제거된 후 和帝가 梁諷의 억울한 사정을 알고 아들인 梁慬을 郎中으로 제수하였다. 車騎司馬와 西域副校尉을 역임하였고 西域과 羌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永初 3년(109)에 行度遼將軍에 임명되어 行車騎將軍 何熙, 中郞將 龐雄, 遼東太守 耿夔 등과 함께 南匈奴와 烏桓 토벌에 從軍하여 공을 세웠으며 度遼將軍에 拜授되었다. 다음 해에 安定·北地·上郡이 羌을 침입하자 이를 대처하도록 파견되었다가 專擅을 이유로 하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후에 羌이 三輔를 공격하고 關中의 盜賊이 봉기하자 謁者로 임명되어 토벌하러 가던 도중 湖縣에서 病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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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원문은 “安帝永初三年夏, 漁陽烏桓與右北平胡千餘寇代郡·上谷. 秋, 鴈門烏桓率眾王無何(允), 與鮮卑大人丘倫等, 及南匈奴骨都侯, 合七千騎寇五原, 與太守戰於九原高渠谷, 漢兵大敗, 殺郡長吏. 乃遣車騎將軍何熙·度遼將軍梁慬等擊, 大破之.”인데, 『三國志』에서는 “至安帝時, 漁陽·右北平·雁門烏丸率衆王無何等復與鮮卑·匈奴合, 鈔略代郡·上谷·涿郡·五原, 乃以大司農何熙行車騎將軍, 左右羽林五營士, 發緣邊七郡黎陽營兵合二萬人擊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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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원문은 “無何乞降, 鮮卑走還塞外.”인데, 『三國志』에서는 “匈奴降, 鮮卑·烏丸各還塞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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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三國志』에서는 원문의 “親漢都尉’”를 “都尉”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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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명[제](明帝), 장[제](章帝), 화[제](和帝), 안제(安帝), 무하(無何), 구륜(丘倫), 무하, 하희(何熙), 양근(梁慬), 하희, 양근, 무하, 융주외(戎朱廆)
지명
어양, 우북평, 대군, 상곡[군], 안문,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 고거곡(高渠谷),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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