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환의 무하(無何), 구륜(丘倫) 등이 한나라와 전쟁을 벌인 뒤 패하자 다시 화친을 청함
명[제](明帝)
주 001
각주 001)
와 장[제](章帝),주 002
화[제](和帝)
주 0033대의 시기에는 모두 변방이 편안하여 별다른 일이 없었다.주 004
안제(安帝)
주 005영초(永初) 3년(109)에 어양오환(漁陽烏桓)주 006과 우북평호(右北平胡)주 007천여 [기(騎)]가 대군과 상곡[군]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다. 가을에 안문오환(鴈門烏桓)주 008의 솔중왕(率衆王) 무하(無何)
주 009가 선비의 대인 구륜(丘倫) 등, 남흉노(南匈奴) 골도후(骨都侯)주 010와 함께 모두 합하여 7천 기를 이끌고 오원[군](五原郡)
주 011을 침입하여 약탈하였으며, [오원]태수(五原太守)와 구원[현](九原縣)
주 012의 고거곡(高渠谷)에서 싸웠다. 한나라 병사들이 크게 패하였고 무하는 군의 장리(長吏)주 013들을 살해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에 거기장군(車騎將軍)주 014明帝(28~75; 재위 57~75): 이름은 莊, 原名은 陽, 字는 子麗이다. 建武 15년(39)에 東海公, 建武 17년(41)에 東海王으로 봉해졌으며, 建武 19년(43)에 皇太子가 되었다. 中元 2년(57)에 光武帝가 죽자 즉위하였다. 光武帝시기의 제도를 이어받고 法令을 엄격하게 적용하였으며 外戚과 封侯의 정치간여를 금지하였다. 儒術을 제창하고 辟雍에 친히 임하여 養老의 예를 행했으며 三老와 五更을 존중하고 外戚 樊·郭·陰·馬氏 자제, 즉 四姓小侯들을 위한 학교를 설치하였다. 班超를 보내 西域을 경영하였고, 郎中 蔡愔을 天竺에 보내 佛法을 구했다. 재위기간 중 租賦와 徭役을 경감하고 汴河를 수리하여 민생이 비교적 안정되었다. 廟號는 顯宗이다.
각주 014)
하희(何熙)
주 015와 도료장군(度遼將軍) 양근(梁慬)
주 016車騎將軍: 前漢 文帝시기 처음 설치하였으며 功臣에게 수여하였다. 宮衛를 관장하였으며 禁兵을 지휘하였다. 金印紫綬를 받았고 지위는 三公과 같았다. 혹은 車騎將軍 앞에 ‘大司馬’의 칭호를 덧붙이거나 뒤에 ‘領尙書事’를 덧붙이기도 했다. 後漢時代 車騎將軍은 驃騎將軍 다음의 지위였는데, 늘 설치하지는 않았다. 後漢末에는 第2品이었다. 晉代에는 第1品이었으며, 南朝時代에도 두어졌다. 劉宋의 경우 『通典·職官典』 「秩品·宋官品」에 의하면 第2品의 將軍號이다. 北魏時代에는 品階가 第1品下였다. 車騎大將軍의 경우 三公 위의 지위였다. 『三國志』에서는 번역문과는 달리 ‘行車騎將軍’이라 기록하였다.
각주 016)
등을 보내 공격하게 하니 [하희와 양근은] 이들을 대파(大破)하였다.주 017
무하는 항복을 청하였고, 선비는 달아나 새외로 돌아갔다.주 018이후 오환은 점차 다시 [한나라와] 화친(和親)하고 귀부하였다. 이에 [한나라 조정은] 오환의 대인 융주외(戎朱廆)를 친한도위(親漢都尉)주 019로 임명하였다.梁慬: 北地郡 弋居縣 사람이다. 아버지 梁諷이 외척 竇憲에게 실각되어 살해되었다. 그러나 竇氏가 제거된 후 和帝가 梁諷의 억울한 사정을 알고 아들인 梁慬을 郎中으로 제수하였다. 車騎司馬와 西域副校尉을 역임하였고 西域과 羌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永初 3년(109)에 行度遼將軍에 임명되어 行車騎將軍 何熙, 中郞將 龐雄, 遼東太守 耿夔 등과 함께 南匈奴와 烏桓 토벌에 從軍하여 공을 세웠으며 度遼將軍에 拜授되었다. 다음 해에 安定·北地·上郡이 羌을 침입하자 이를 대처하도록 파견되었다가 專擅을 이유로 하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후에 羌이 三輔를 공격하고 關中의 盜賊이 봉기하자 謁者로 임명되어 토벌하러 가던 도중 湖縣에서 病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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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明帝(28~75; 재위 57~75): 이름은 莊, 原名은 陽, 字는 子麗이다. 建武 15년(39)에 東海公, 建武 17년(41)에 東海王으로 봉해졌으며, 建武 19년(43)에 皇太子가 되었다. 中元 2년(57)에 光武帝가 죽자 즉위하였다. 光武帝시기의 제도를 이어받고 法令을 엄격하게 적용하였으며 外戚과 封侯의 정치간여를 금지하였다. 儒術을 제창하고 辟雍에 친히 임하여 養老의 예를 행했으며 三老와 五更을 존중하고 外戚 樊·郭·陰·馬氏 자제, 즉 四姓小侯들을 위한 학교를 설치하였다. 班超를 보내 西域을 경영하였고, 郎中 蔡愔을 天竺에 보내 佛法을 구했다. 재위기간 중 租賦와 徭役을 경감하고 汴河를 수리하여 민생이 비교적 안정되었다. 廟號는 顯宗이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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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4)
車騎將軍: 前漢 文帝시기 처음 설치하였으며 功臣에게 수여하였다. 宮衛를 관장하였으며 禁兵을 지휘하였다. 金印紫綬를 받았고 지위는 三公과 같았다. 혹은 車騎將軍 앞에 ‘大司馬’의 칭호를 덧붙이거나 뒤에 ‘領尙書事’를 덧붙이기도 했다. 後漢時代 車騎將軍은 驃騎將軍 다음의 지위였는데, 늘 설치하지는 않았다. 後漢末에는 第2品이었다. 晉代에는 第1品이었으며, 南朝時代에도 두어졌다. 劉宋의 경우 『通典·職官典』 「秩品·宋官品」에 의하면 第2品의 將軍號이다. 北魏時代에는 品階가 第1品下였다. 車騎大將軍의 경우 三公 위의 지위였다. 『三國志』에서는 번역문과는 달리 ‘行車騎將軍’이라 기록하였다.
- 각주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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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6)
梁慬: 北地郡 弋居縣 사람이다. 아버지 梁諷이 외척 竇憲에게 실각되어 살해되었다. 그러나 竇氏가 제거된 후 和帝가 梁諷의 억울한 사정을 알고 아들인 梁慬을 郎中으로 제수하였다. 車騎司馬와 西域副校尉을 역임하였고 西域과 羌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永初 3년(109)에 行度遼將軍에 임명되어 行車騎將軍 何熙, 中郞將 龐雄, 遼東太守 耿夔 등과 함께 南匈奴와 烏桓 토벌에 從軍하여 공을 세웠으며 度遼將軍에 拜授되었다. 다음 해에 安定·北地·上郡이 羌을 침입하자 이를 대처하도록 파견되었다가 專擅을 이유로 하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후에 羌이 三輔를 공격하고 關中의 盜賊이 봉기하자 謁者로 임명되어 토벌하러 가던 도중 湖縣에서 病死하였다.
- 각주 017)
- 각주 018)
- 각주 019)
색인어
- 이름
- 명[제](明帝), 장[제](章帝), 화[제](和帝), 안제(安帝), 무하(無何), 구륜(丘倫), 무하, 하희(何熙), 양근(梁慬), 하희, 양근, 무하, 융주외(戎朱廆)
- 지명
- 어양, 우북평, 대군, 상곡[군], 안문,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 고거곡(高渠谷),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