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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랑이 정벌되고 이후 한나라에 편입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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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랑(夜郞)
원래 초(楚) 경양왕(頃襄王) 때에 장수 장호(莊豪)원수(沅水)에 보내 야랑을 정벌하였다. 군대가 차란(且蘭)에 이르자 물가에 배를 고정시켜 두고 보병전을 벌렸다. 야랑을 멸망시킨 후, 남아서 전지(滇池)의 왕이 되었다. 차란에 배를 묶어 두는 말둑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그 지명을 ‘장가(牂柯)’라고 바꾸었다. 장가는 지리적으로 장마비가 많고, 풍속은 무속(巫俗)과 귀신, 금기 등을 좋아하고, 기르는 가축은 적고, 또 누에치기가 없어, 그 군은 가장 가난하였다. 구정현(句町縣)에는 광랑나무가 있는데, 여기서 보리가루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어 백성들이 이를 양식으로 삼았다.주 001
각주 001)
桄桹木: 李賢注에서는 『臨海異物志』를 인용하고 있는데, “桄桹木은 겉 표면에 털이 있으며, 종려나무처럼 여기저기 흩어져서 난다. 그 나무는 단단하여 가래나 낫을 만들 수 있는데 예리하기가 철과 같으며, 그 가운데 아랫부분은 더욱 날카롭고 오직 그 가운데 줄기의 뿌리부분만 부술 수 있다. 껍질 안으로는 벼를 빻아 놓은 쌀조각 같은 것이 있는데, 역시 보리나 밀가루와 비슷하여 그 속으로 전병을 만들 수 있다.” 또, 『廣志』를 인용하였는데, “광랑목은 그 둘레가 4, 5위에 이르고 길이는 5, 6장 정도이며 널찍하게 뻗어 있으며 주변에는 가지가 없고 그 정수리에서 자라는 잎은 수십에 불과한데 종려나무 잎사귀와 비슷하고, 그 나무를 부수고자 해도 표면이 단단하여 상하게 하기 어려우며, 안으로 몇 촌 정도 들어가면 밀가루 같은 것을 얻을 수 있는데, 붉고 노란 것이 빽빽하며 먹을 수 있다(臨海異物志曰: “桄桹木外皮有毛, 似栟櫚而散生. 其木剛, 作鋘鋤利如鐵, 中石更利, 唯中焦根乃致敗耳. 皮中有似擣稻米片, 又似麥麪, 中作餅餌.」 廣志曰「桄桹樹大四五圍, 長五六丈, 洪直, 旁無枝條, 其顚生葉不過數十, 似稯葉, 破其木肌堅難傷, 入數寸得麪, 赤黃密緻, 可食”也.).”고 하였다. 『異物志』는 漢代부터 찬술된 것이 많이 인용되고 있는데, 정사에서 그 찬술이 확인된 것은 西晉 永嘉연간 續咸의 『異物志』가 유일하다. 『隋書』와 『唐書』의 「經籍志」에서 後漢 楊孚의 『異物志』 외에, 交州, 南州, 扶南. 凉州, 南方, 嶺南의 異物志와 沈瑩의 『臨海水土異物志』 1卷이 확인된다. 『廣志』는 『史記』 이래 정사의 주석에 많이 인용되어 있지만, 본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隋書』 「經籍志」에서 晉 郭義恭의 『廣志』가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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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술(公孫述)주 002
각주 002)
公孫述: 前後漢 교체기 巴蜀地方을 근거로 활동하였던 群雄의 하나. 建武 원년(25) 자립하여 稱帝하고 成家로 칭하였다가, 建武 12년(36) 吳漢, 岑彭 등에 의해 成都가 함락되고 죽었다. 원래 扶風 茂陵 출신으로 哀帝 때 郎官이 되었다가 王莽 때에 導江卒正(蜀郡太守)으로 巴蜀에 들어왔다. 更始帝가 거병하자 이를 대항하려는 宗成, 王岑 등이 이에 호응하자, 公孫述은 현지의 토착세력을 규합하여 이들을 토벌하고, 輔漢將軍蜀郡太守兼益州牧을 칭하면서 자립하고, 李雄이 권하여 稱王하였다가 稱帝에 이르렀다. 西南夷의 諸君長의 臣從을 받고 물자도 풍부하여 비교적 충실한 국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銅錢을 폐지하고 鐵錢을 사용하는 정책이 사람들의 불만을 사기도 하였다. 光武帝의 성립 후에도 隴지역의 隗囂와 함께 독립세력을 형성하였으나, 기원후 34년 隗囂에 이어서 光武帝에게 평정되었다(『後漢書』 권13 「公孫述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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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성(大姓)인 용씨(龍氏) 부씨(傅氏) 윤씨(尹氏) 동씨(董氏)가 군의 공조(功曹)주 003
각주 003)
功曹: 郡태수의 補佐官으로, 別駕와 主簿의 관리하에서 功勞를 관장하고 賞罰의 議論하는 부서의 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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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섬(謝暹)과 함께 지역을 보존하여 한나라로 편입되어, 번우강(番禺江) 주 004
각주 004)
番禺江: 당시 南海郡 番禺縣을 흐르는 강으로, 지금의 朱江. 李賢이 인용한 『南越志』에는 番禺縣의 서쪽에 강 浦口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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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라 사신을 보내 공물을 봉헌하였다. 광무제가 가상히 여겨 포상을 내렸다. 환제(桓帝) 때에 군에 윤진(尹珍) 주 005
각주 005)
尹珍: 『華陽國志』에 字가 道眞이고 毌斂縣人이라고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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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사람이 변방에 태어나서 예의를 모른다고 하여 여남(汝南)허신(許慎) 주 006
각주 006)
許愼: 後漢代의 古典學者로서, 汝南 召陵 출신. 博學하여 당시 五經에 대해서는 그와 겨룰 자가 없다고 알려졌다. 郡 功曹를 거쳐 洨縣長에 이어서 太尉南閤祭酒로 퇴관한 이후 향리에서 체계적으로 한자의 원리를 탐구하여 和帝 永元 12년(100)에 『說文解字』를 완성했고, 이 외에 『五經異義』와 『淮南子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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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봉(應奉)을 좇아 경서(經書)와 도(圖) 위(緯)주 007
각주 007)
圖와 緯: ‘圖’는 문자[書]로서 표현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진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黃河에서 건져 올렸다는 ‘河圖’의 경우처럼 天意에 의해 전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緯’는 씨줄인 ‘經’과 대비되어 ‘날줄’에 비유되는 것으로 經에서 다 표현하지 못한 은밀한 내면의 의미가 쓰여진 책을 말한다. 모두 한대(漢代) 경학의 권위가 극대화됨에 따라 經의 의미를 신성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後漢代에 극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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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수업받았다. 배움을 이루고 나서 향리로 돌아가 가르치니, 이에 남쪽지방에서 비로소 학교가 생기게 되었다. 윤진은 관직이 형주자사에 이르렀다.

  • 각주 001)
    桄桹木: 李賢注에서는 『臨海異物志』를 인용하고 있는데, “桄桹木은 겉 표면에 털이 있으며, 종려나무처럼 여기저기 흩어져서 난다. 그 나무는 단단하여 가래나 낫을 만들 수 있는데 예리하기가 철과 같으며, 그 가운데 아랫부분은 더욱 날카롭고 오직 그 가운데 줄기의 뿌리부분만 부술 수 있다. 껍질 안으로는 벼를 빻아 놓은 쌀조각 같은 것이 있는데, 역시 보리나 밀가루와 비슷하여 그 속으로 전병을 만들 수 있다.” 또, 『廣志』를 인용하였는데, “광랑목은 그 둘레가 4, 5위에 이르고 길이는 5, 6장 정도이며 널찍하게 뻗어 있으며 주변에는 가지가 없고 그 정수리에서 자라는 잎은 수십에 불과한데 종려나무 잎사귀와 비슷하고, 그 나무를 부수고자 해도 표면이 단단하여 상하게 하기 어려우며, 안으로 몇 촌 정도 들어가면 밀가루 같은 것을 얻을 수 있는데, 붉고 노란 것이 빽빽하며 먹을 수 있다(臨海異物志曰: “桄桹木外皮有毛, 似栟櫚而散生. 其木剛, 作鋘鋤利如鐵, 中石更利, 唯中焦根乃致敗耳. 皮中有似擣稻米片, 又似麥麪, 中作餅餌.」 廣志曰「桄桹樹大四五圍, 長五六丈, 洪直, 旁無枝條, 其顚生葉不過數十, 似稯葉, 破其木肌堅難傷, 入數寸得麪, 赤黃密緻, 可食”也.).”고 하였다. 『異物志』는 漢代부터 찬술된 것이 많이 인용되고 있는데, 정사에서 그 찬술이 확인된 것은 西晉 永嘉연간 續咸의 『異物志』가 유일하다. 『隋書』와 『唐書』의 「經籍志」에서 後漢 楊孚의 『異物志』 외에, 交州, 南州, 扶南. 凉州, 南方, 嶺南의 異物志와 沈瑩의 『臨海水土異物志』 1卷이 확인된다. 『廣志』는 『史記』 이래 정사의 주석에 많이 인용되어 있지만, 본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隋書』 「經籍志」에서 晉 郭義恭의 『廣志』가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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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公孫述: 前後漢 교체기 巴蜀地方을 근거로 활동하였던 群雄의 하나. 建武 원년(25) 자립하여 稱帝하고 成家로 칭하였다가, 建武 12년(36) 吳漢, 岑彭 등에 의해 成都가 함락되고 죽었다. 원래 扶風 茂陵 출신으로 哀帝 때 郎官이 되었다가 王莽 때에 導江卒正(蜀郡太守)으로 巴蜀에 들어왔다. 更始帝가 거병하자 이를 대항하려는 宗成, 王岑 등이 이에 호응하자, 公孫述은 현지의 토착세력을 규합하여 이들을 토벌하고, 輔漢將軍蜀郡太守兼益州牧을 칭하면서 자립하고, 李雄이 권하여 稱王하였다가 稱帝에 이르렀다. 西南夷의 諸君長의 臣從을 받고 물자도 풍부하여 비교적 충실한 국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銅錢을 폐지하고 鐵錢을 사용하는 정책이 사람들의 불만을 사기도 하였다. 光武帝의 성립 후에도 隴지역의 隗囂와 함께 독립세력을 형성하였으나, 기원후 34년 隗囂에 이어서 光武帝에게 평정되었다(『後漢書』 권13 「公孫述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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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功曹: 郡태수의 補佐官으로, 別駕와 主簿의 관리하에서 功勞를 관장하고 賞罰의 議論하는 부서의 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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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番禺江: 당시 南海郡 番禺縣을 흐르는 강으로, 지금의 朱江. 李賢이 인용한 『南越志』에는 番禺縣의 서쪽에 강 浦口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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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尹珍: 『華陽國志』에 字가 道眞이고 毌斂縣人이라고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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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許愼: 後漢代의 古典學者로서, 汝南 召陵 출신. 博學하여 당시 五經에 대해서는 그와 겨룰 자가 없다고 알려졌다. 郡 功曹를 거쳐 洨縣長에 이어서 太尉南閤祭酒로 퇴관한 이후 향리에서 체계적으로 한자의 원리를 탐구하여 和帝 永元 12년(100)에 『說文解字』를 완성했고, 이 외에 『五經異義』와 『淮南子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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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圖와 緯: ‘圖’는 문자[書]로서 표현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진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黃河에서 건져 올렸다는 ‘河圖’의 경우처럼 天意에 의해 전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緯’는 씨줄인 ‘經’과 대비되어 ‘날줄’에 비유되는 것으로 經에서 다 표현하지 못한 은밀한 내면의 의미가 쓰여진 책을 말한다. 모두 한대(漢代) 경학의 권위가 극대화됨에 따라 經의 의미를 신성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後漢代에 극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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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경양왕(頃襄王), 장호(莊豪), 공손술(公孫述), 사섬(謝暹), 광무제, 환제(桓帝), 윤진(尹珍), 허신(許慎), 응봉(應奉), 윤진
지명
초(楚), 원수(沅水), 야랑, 차란(且蘭), 야랑, 전지(滇池), 차란, 장가(牂柯), 장가, 구정현(句町縣), 한나라, 번우강(番禺江), 여남(汝南), 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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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랑이 정벌되고 이후 한나라에 편입됨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6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