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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측(徵側)과 징이(徵貳)의 반란을 시작으로 일대 만리(蠻俚) 들이 자립하여 왕이 되자 한에서 마원(馬援), 단지(段志) 등을 파견한 뒤 토벌함

  • 국가
    남월(南越)
건무(建武) 12년(36) 구진군(九眞郡) 밖의 만리(蠻里)주 001
각주 001)
李賢은 里는 蠻의 別號로서 唐代의 俚人이라고 하였다(里, 蠻之別號, 今呼爲俚人). 俚人은 南蠻 계통의 종족으로 雲南省 貴州 思南縣 일대에서 같은 계통의 獠人과 잡거하였다. 원래 이들이 거주한 지역은 한나라 때 牂牁郡의 경내에 해당하였으나 험준한 산천으로 가로 막혀 이들은 남북조시대 내내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남북조 말 北周 때 州를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중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金裕哲,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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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張游)가 종족을 이끌고 교화를 바라면서 내속해 오자, ‘귀한리군(歸漢里君)’주 002
각주 002)
歸漢里君: 이것이 漢朝廷에서 蠻夷의 추장을 군장으로 봉한 최초의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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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봉하였다. 이듬해 남월(南越) 요외(徼外)의 만이(蠻夷)가 흰 꿩과 흰 토끼를 헌공하였다. (건무) 16년(40)에 이르러 교지의 여인 징측(徵側)과 그 동생 징이(徵貳)가 반란을 일으켜 군 관아를 공격하였다. 징측이라는 사람은 미령현(麊泠縣) 주 003
각주 003)
麊泠縣: 兩漢代 交阯郡의 屬縣으로, 前漢代에는 部都尉가 통치하였다(『漢書』 권28下, 「地理志」). 오늘날 베트남의 푸토(Phu Tho)성의 비엣찌(Viet Tri)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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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장(雒將)주 004
각주 004)
雒將: 원문의 ‘雒’은 바로 ‘駱’으로, 駱越을 뜻한다. 周나라 때는 交阯지역을 ‘駱越’이라 하였고 秦나라 때는 西甌라고 하였다. 史記 索隱에서 인용된 晉나라 顧微의 「廣州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交阯에는 駱田(나무를 엮어서 평평한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깔아 농작물을 심은 다음 물위에 띄운 인공으로 조성한 농지)이 있는데, 潮水의 차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며 이곳 사람들은 이 농지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駱人이라 한다. 駱王과 駱侯 등의 신분이 있다. 그 밖의 여러 縣에서는 스스로를 駱將이라고 하면서 푸른 인끈을 드리운 銅印을 사용하는데 오늘날의 令長과 같다.” 즉, 駱將은 駱越 집단 내에서 소규모의 독자적 세력을 갖춘 지역의 유력자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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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딸이었다. 주원(朱䳒) 주 005
각주 005)
朱䳒: 朱䳒은 朱鳶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베트남의 썬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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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시색(詩索) 주 006
각주 006)
詩索: 『大越史記全書』 外紀 권3 「徵女王紀」에 따르면 詩索 역시 駱將의 아들이다. 『大越史記全書』는 베트남에서 편찬된 편년체 역사서로 한문으로 쓰여져 있다. 이 책은 원래 베트남 陳朝(1225~1400) 太宗이 黎文休에게 명하여 전설의 시대부터 李朝(1009~1225)까지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여 1272년 成宗때 『대월사기』30권으로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 뒤 後黎朝(1428~1527) 成宗 洪德연간(1470~1497) 吳仕連에게 명하여 다른 사료를 참조하여 이를 개정, 증보하고 편목을 바꾸어 『大越史記全書』 15권을 완성하였다. 丁朝(968~980) 이전까지의 역사를 외기 5권에서, 그 이후의 역사를 본기전서 10권에서 다루었는데, 완성 뒤에도 별도로 저술된 本紀續篇 등 黎朝의 역사를 다룬 9권을 포함한 『大越史記全書』가 1697년 판각되었다. 베트남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사서이다. 베트남에서는 티 싸익(Thi Sach)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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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시집갔는데, 매우 용맹하였다. 교지 태수 소정(蘇定) 주 007
각주 007)
蘇定: 중국의 정사에서는 열전에 입전되지 않았지만, 『大越史記全書』에 따르면 탐욕과 학정을 일삼았고, 徵側姉妹의 반란이 일어나자 도망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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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으로 옭아매자 징측이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구진군일남군지역의 만리(蠻俚)들이 모두 호응하여 대략 65개 성을 장악하고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주 008
각주 008)
『大越史記全書』에 따르면 徵側(베트남어로 쫑짝 Trung Trac)은 자신의 고향인 麊泠縣에 나라의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올라 3년 동안 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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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자사와 여러 태수들은 겨우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광무제장사군, 합포군(合浦郡), 교지군에게 수레와 선박을 준비하고, 도로와 교량을 닦아 막힌 곳과 계곡을 통하도록 하고, 식량을 비축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18년에는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과 누선장군(樓船將軍)주 009
각주 009)
樓船將軍: 前漢 武帝 때 육로와 수로로 남월을 평정하게 했는데, 육로를 담당한 것이 伏波將軍 路博德이었고, 水路를 담당한 것이 樓船將軍 楊僕이었다. 『史記』 권30 「平準書」와 여기에 인용된 索隱에 따르면 武帝는 南越과의 수상전에 대비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예장에 昆明池라고 하는 호수를 축조하고 樓船이라고 하는 거대한 함선을 건조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 수군단을 지휘하는 장군에게 ‘樓船’이라는 명호가 붙게 되었다고 한다. 武帝 때는 伏波와 樓船 모두 상대방의 지휘통솔을 받지 않고 공동의 협의하에 군사작전을 수행하였으나 光武帝 때는 伏波將軍의 통솔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원정군이 合浦(현 廣西省 浦北縣 南舊州村)에 도착했을 무렵 段志가 병사하자 조서를 내려 馬援에게 그 군대를 직접 지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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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段志) 주 010
각주 010)
段志: 建武 17년(41) 李廣이라는 무당을 우두머리로 皖城(안휘성 潛山縣)에서 발생한 종교결사의 반란을 마원과 함께 평정한 경력으로 보듯, 마원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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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파견하여, 장사군, 계양군, 영릉군, 창오군에서 병사 만여 명을 징발하여 이들 만이를 토벌하였다. 이듬해 여름 4월에 마원교지군성을 격파하여 징측징이 등을 참수하자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항복하거나 해산하였다.주 011
각주 011)
建武 18년(42) 봄에 馬援의 군대가 浪泊(베트남 하노이시 서북쪽 똥안 Dong Anh 서남쪽에 위치한 西湖)에서 적군과 첫 교전을 벌여 이를 격파하고 적의 수급 수천여 급을 베니 항복하는 자가 만여 명에 달하였다. 徵側의 군대는 패하여 禁谿로 후퇴하였는데, 馬援이 이를 추격하여 그 부장 劉隆은 徵貳를 사로잡았으며 마침내 이듬해 정월 徵側의 잔당을 토벌하여 목을 베고 그 목을 낙양에 전했다. 馬援은 이 공으로 新息侯에 봉해지고 식읍 3천호를 받았으며 劉隆은 長平侯에 봉해졌다. 『大越史記全書』에 따르면 馬援이 이끄는 漢軍이 도착하자 徵側은 그 예봉을 감당할 수 없고 금계로 후퇴하였는데, 그를 따르는 무리 역시 그가 여자라서 馬援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도망치니 이로 인해 徵側의 군대는 저절로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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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진격하여 구진군의 적당 도양(都陽) 주 012
각주 012)
都陽: 馬援이 徵側자매를 토벌한 후에까지 남아 있던 장수. 漢軍이 크고 작은 누선 2천여 척과 병사 2만을 이끌고 징측의 잔당인 도양을 추격하여 無功(베트남 닌빈성 Tih Ninh Binh 일대)에서 居風(베트남 탄호아성 Tinh Thanh Hoa 일대)에 이르는 지역을 토벌하니 이로써 마침내 교지지역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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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그들 우두머리 300여 명을 영릉군으로 사민시키자, 이에 영남지방주 013
각주 013)
嶺表: 앞 ‘嶺外’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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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 평정되었다.

  • 각주 001)
    李賢은 里는 蠻의 別號로서 唐代의 俚人이라고 하였다(里, 蠻之別號, 今呼爲俚人). 俚人은 南蠻 계통의 종족으로 雲南省 貴州 思南縣 일대에서 같은 계통의 獠人과 잡거하였다. 원래 이들이 거주한 지역은 한나라 때 牂牁郡의 경내에 해당하였으나 험준한 산천으로 가로 막혀 이들은 남북조시대 내내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남북조 말 北周 때 州를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중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金裕哲,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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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歸漢里君: 이것이 漢朝廷에서 蠻夷의 추장을 군장으로 봉한 최초의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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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麊泠縣: 兩漢代 交阯郡의 屬縣으로, 前漢代에는 部都尉가 통치하였다(『漢書』 권28下, 「地理志」). 오늘날 베트남의 푸토(Phu Tho)성의 비엣찌(Viet Tri)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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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雒將: 원문의 ‘雒’은 바로 ‘駱’으로, 駱越을 뜻한다. 周나라 때는 交阯지역을 ‘駱越’이라 하였고 秦나라 때는 西甌라고 하였다. 史記 索隱에서 인용된 晉나라 顧微의 「廣州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交阯에는 駱田(나무를 엮어서 평평한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깔아 농작물을 심은 다음 물위에 띄운 인공으로 조성한 농지)이 있는데, 潮水의 차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며 이곳 사람들은 이 농지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駱人이라 한다. 駱王과 駱侯 등의 신분이 있다. 그 밖의 여러 縣에서는 스스로를 駱將이라고 하면서 푸른 인끈을 드리운 銅印을 사용하는데 오늘날의 令長과 같다.” 즉, 駱將은 駱越 집단 내에서 소규모의 독자적 세력을 갖춘 지역의 유력자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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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朱䳒: 朱䳒은 朱鳶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베트남의 썬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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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詩索: 『大越史記全書』 外紀 권3 「徵女王紀」에 따르면 詩索 역시 駱將의 아들이다. 『大越史記全書』는 베트남에서 편찬된 편년체 역사서로 한문으로 쓰여져 있다. 이 책은 원래 베트남 陳朝(1225~1400) 太宗이 黎文休에게 명하여 전설의 시대부터 李朝(1009~1225)까지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여 1272년 成宗때 『대월사기』30권으로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 뒤 後黎朝(1428~1527) 成宗 洪德연간(1470~1497) 吳仕連에게 명하여 다른 사료를 참조하여 이를 개정, 증보하고 편목을 바꾸어 『大越史記全書』 15권을 완성하였다. 丁朝(968~980) 이전까지의 역사를 외기 5권에서, 그 이후의 역사를 본기전서 10권에서 다루었는데, 완성 뒤에도 별도로 저술된 本紀續篇 등 黎朝의 역사를 다룬 9권을 포함한 『大越史記全書』가 1697년 판각되었다. 베트남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사서이다. 베트남에서는 티 싸익(Thi Sach)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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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蘇定: 중국의 정사에서는 열전에 입전되지 않았지만, 『大越史記全書』에 따르면 탐욕과 학정을 일삼았고, 徵側姉妹의 반란이 일어나자 도망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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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大越史記全書』에 따르면 徵側(베트남어로 쫑짝 Trung Trac)은 자신의 고향인 麊泠縣에 나라의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올라 3년 동안 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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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樓船將軍: 前漢 武帝 때 육로와 수로로 남월을 평정하게 했는데, 육로를 담당한 것이 伏波將軍 路博德이었고, 水路를 담당한 것이 樓船將軍 楊僕이었다. 『史記』 권30 「平準書」와 여기에 인용된 索隱에 따르면 武帝는 南越과의 수상전에 대비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예장에 昆明池라고 하는 호수를 축조하고 樓船이라고 하는 거대한 함선을 건조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 수군단을 지휘하는 장군에게 ‘樓船’이라는 명호가 붙게 되었다고 한다. 武帝 때는 伏波와 樓船 모두 상대방의 지휘통솔을 받지 않고 공동의 협의하에 군사작전을 수행하였으나 光武帝 때는 伏波將軍의 통솔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원정군이 合浦(현 廣西省 浦北縣 南舊州村)에 도착했을 무렵 段志가 병사하자 조서를 내려 馬援에게 그 군대를 직접 지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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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段志: 建武 17년(41) 李廣이라는 무당을 우두머리로 皖城(안휘성 潛山縣)에서 발생한 종교결사의 반란을 마원과 함께 평정한 경력으로 보듯, 마원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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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建武 18년(42) 봄에 馬援의 군대가 浪泊(베트남 하노이시 서북쪽 똥안 Dong Anh 서남쪽에 위치한 西湖)에서 적군과 첫 교전을 벌여 이를 격파하고 적의 수급 수천여 급을 베니 항복하는 자가 만여 명에 달하였다. 徵側의 군대는 패하여 禁谿로 후퇴하였는데, 馬援이 이를 추격하여 그 부장 劉隆은 徵貳를 사로잡았으며 마침내 이듬해 정월 徵側의 잔당을 토벌하여 목을 베고 그 목을 낙양에 전했다. 馬援은 이 공으로 新息侯에 봉해지고 식읍 3천호를 받았으며 劉隆은 長平侯에 봉해졌다. 『大越史記全書』에 따르면 馬援이 이끄는 漢軍이 도착하자 徵側은 그 예봉을 감당할 수 없고 금계로 후퇴하였는데, 그를 따르는 무리 역시 그가 여자라서 馬援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도망치니 이로 인해 徵側의 군대는 저절로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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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都陽: 馬援이 徵側자매를 토벌한 후에까지 남아 있던 장수. 漢軍이 크고 작은 누선 2천여 척과 병사 2만을 이끌고 징측의 잔당인 도양을 추격하여 無功(베트남 닌빈성 Tih Ninh Binh 일대)에서 居風(베트남 탄호아성 Tinh Thanh Hoa 일대)에 이르는 지역을 토벌하니 이로써 마침내 교지지역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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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嶺表: 앞 ‘嶺外’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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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장유(張游), 징측(徵側), 징이(徵貳), 징측, 시색(詩索), 소정(蘇定), 징측, 광무제, 마원(馬援), 단지(段志), 마원, 징측, 징이, 도양(都陽)
지명
구진군(九眞郡), 남월(南越), 교지, 미령현(麊泠縣), 주원(朱䳒), 구진군, 일남군, 장사군, 합포군(合浦郡), 교지군, 장사군, 계양군, 영릉군, 창오군, 교지, 구진군, 영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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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측(徵側)과 징이(徵貳)의 반란을 시작으로 일대 만리(蠻俚) 들이 자립하여 왕이 되자 한에서 마원(馬援), 단지(段志) 등을 파견한 뒤 토벌함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2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