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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중만(澧中蠻)의 진종(陳從) , 누중만(漊中蠻)의 담아건(覃兒健) 등이 반란을 일으킴

  • 국가
    남만(南蠻)
숙종(肅宗) 주 001
각주 001)
肅宗: 後漢 章帝 劉燦. 기원후 76~88년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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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초(建初) 원년(76) 무릉 예중만(澧中蠻)주 002
각주 002)
武陵 澧中蠻: 澧水유역의 蠻夷. 澧水는 현재 湖南省과 湖北省 경계 八公山 東麓에서 발원하여 張家界市 慈利縣 澧縣을 거쳐서 津市에서 洞庭湖로 유입된다. 도중에 漊水, 渫水, 道水 등의 支流가 합류한다. 澧中蠻 거주지의 위치는 臨澧와 澧陽을 상정해 볼 수 있는데, 零陽蠻보다 더 상류쪽에 위치한 것이 분명하므로, 臨澧가 澧中蠻의 근거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臨澧는 현 湖南省 桑植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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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종(陳從) 등이 반란을 일으켜 영양만(零陽蠻) 지역에 들어왔다.주 003
각주 003)
零陽蠻: 零陽은 後漢代 武陵郡의 屬縣으로 현재 湖南省 慈利縣 인근 澧水 中流 南岸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漊水가 澧水에 합류된다. 零陽蠻은 澧中蠻에 비해 澧水 하류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澧水 남쪽 沅水 下流에 자리잡고 있는 武陵郡 郡治의 입장에서 보면 澧中蠻의 零陵蠻으로의 칩입은 武陵郡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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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영양만의 오리(五里) 정부(精夫)가 군(郡)을 위해 진종을 격파하자, 진종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3년 겨울(78) 누중만(漊中蠻)주 004
각주 004)
漊中蠻: 漊水상의 蠻夷로, 漊水는 李賢의 注에서는 唐代 澧州 崇義縣에서 발원한다고 하고 있다. 漊水는 零陵에서 澧水와 만나기 때문에 漊水蠻 역시 계곡을 따라 외부로 나아가게 되면 零陵蠻과 마주치게 된다. 『明史』 卷310 「胡廣土司」에 慈利安撫使覃垕가 諸蠻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있는데, 明代까지 覃代가 酋長을 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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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아건(覃兒健) 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영양(零陽), 작당(作唐), 잔릉(孱陵) 주 005
각주 005)
作唐과 孱陵: 모두 武陵郡의 屬縣으로, 作唐은 澧水 하류로서 현 湖南省 安鄕지역이고, 孱陵城은 唐代까지 荊州 公安縣 西南에 남아 있었다고 李賢注에서 밝히고 있다. 현재 湖南省 公安 근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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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경계지역을 불살랐다. 이듬해 봄 형주의 7군과 여남(汝南) 영천(潁川)의 형도(刑徒)와 이사(吏士)주 006
각주 006)
刑徒와 吏士: 刑徒는 漢代 徒刑을 받은 죄수로서 강제노역에 종사하고, 吏士는 중국 고대 官兵을 의미하는데, ‘將’과 대비되어 상설군사의 의미를 갖는다. 한편, 官府의 屬吏를 통칭하기도 하여 단순히 軍士만을 의미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지방관청은 물론 중앙관청에서도 보유하고 있으면서, 단순한 군사적 활동 외에 행정 보조에도 종사하는데, 상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徵發된 兵士와는 다르며, 고된 활동과 책임이 부과되고 있기는 하지만, 신분적으로 賤民이나 罪人은 아니라는 점에서 刑徒와도 구별된다. 일부에서 ‘刑徒’ 앞에 ‘弛’가 있다고 하여, ‘弛刑徒’를 ‘馳刑徒’로 파악하여 ‘馳刑徒’를 刑具를 차지 않은 刑徒로 해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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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여 인을 징발하여 零陽에서 막아 방비하며, 충중(充中) 오리만(五里蠻) 정부(精夫)로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자 4,000인을 모집하여 예중(澧中)의 적을 격파하였다.주 007
각주 007)
充中: 後漢代 武陵郡 充縣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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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80) 봄 담아건 등이 항복을 청하였으나 허용하지 않았다. 군(郡)에서는 이어서 군대를 진격하여 굉하(宏下) 주 008
각주 008)
宏下: 분명하게 확인되지는 않지만 郡內 조그만 지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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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전투를 벌여 크게 격파하고, 담아건을 참수하였다. 나머지는 군영을 버리고 누중으로 도망가 다시 사자를 보내 항복을 구걸하니,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 무릉에 주둔하였던 군사를 해산하고 각각 공의 등차에 따라 상을 내렸다.주 009
각주 009)
‘罷屯兵’: 자립적인 경제활동을 겸하면서 병사들이 일정한 곳에 주둔하면서, 정해진 군사활동을 수행하는 이른바 屯兵制가 後漢에도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제도적인 屯兵制의 형태라기보다, 建初 5년 荊州의 7군과 汝南 潁川의 刑徒와 吏士 5,000여 인을 징발하여 편성된 軍隊를 해산하고 복역을 사면한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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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肅宗: 後漢 章帝 劉燦. 기원후 76~88년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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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武陵 澧中蠻: 澧水유역의 蠻夷. 澧水는 현재 湖南省과 湖北省 경계 八公山 東麓에서 발원하여 張家界市 慈利縣 澧縣을 거쳐서 津市에서 洞庭湖로 유입된다. 도중에 漊水, 渫水, 道水 등의 支流가 합류한다. 澧中蠻 거주지의 위치는 臨澧와 澧陽을 상정해 볼 수 있는데, 零陽蠻보다 더 상류쪽에 위치한 것이 분명하므로, 臨澧가 澧中蠻의 근거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臨澧는 현 湖南省 桑植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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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零陽蠻: 零陽은 後漢代 武陵郡의 屬縣으로 현재 湖南省 慈利縣 인근 澧水 中流 南岸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漊水가 澧水에 합류된다. 零陽蠻은 澧中蠻에 비해 澧水 하류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澧水 남쪽 沅水 下流에 자리잡고 있는 武陵郡 郡治의 입장에서 보면 澧中蠻의 零陵蠻으로의 칩입은 武陵郡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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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漊中蠻: 漊水상의 蠻夷로, 漊水는 李賢의 注에서는 唐代 澧州 崇義縣에서 발원한다고 하고 있다. 漊水는 零陵에서 澧水와 만나기 때문에 漊水蠻 역시 계곡을 따라 외부로 나아가게 되면 零陵蠻과 마주치게 된다. 『明史』 卷310 「胡廣土司」에 慈利安撫使覃垕가 諸蠻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있는데, 明代까지 覃代가 酋長을 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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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作唐과 孱陵: 모두 武陵郡의 屬縣으로, 作唐은 澧水 하류로서 현 湖南省 安鄕지역이고, 孱陵城은 唐代까지 荊州 公安縣 西南에 남아 있었다고 李賢注에서 밝히고 있다. 현재 湖南省 公安 근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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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刑徒와 吏士: 刑徒는 漢代 徒刑을 받은 죄수로서 강제노역에 종사하고, 吏士는 중국 고대 官兵을 의미하는데, ‘將’과 대비되어 상설군사의 의미를 갖는다. 한편, 官府의 屬吏를 통칭하기도 하여 단순히 軍士만을 의미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지방관청은 물론 중앙관청에서도 보유하고 있으면서, 단순한 군사적 활동 외에 행정 보조에도 종사하는데, 상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徵發된 兵士와는 다르며, 고된 활동과 책임이 부과되고 있기는 하지만, 신분적으로 賤民이나 罪人은 아니라는 점에서 刑徒와도 구별된다. 일부에서 ‘刑徒’ 앞에 ‘弛’가 있다고 하여, ‘弛刑徒’를 ‘馳刑徒’로 파악하여 ‘馳刑徒’를 刑具를 차지 않은 刑徒로 해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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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充中: 後漢代 武陵郡 充縣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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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宏下: 분명하게 확인되지는 않지만 郡內 조그만 지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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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罷屯兵’: 자립적인 경제활동을 겸하면서 병사들이 일정한 곳에 주둔하면서, 정해진 군사활동을 수행하는 이른바 屯兵制가 後漢에도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제도적인 屯兵制의 형태라기보다, 建初 5년 荊州의 7군과 汝南 潁川의 刑徒와 吏士 5,000여 인을 징발하여 편성된 軍隊를 해산하고 복역을 사면한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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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숙종(肅宗), 진종(陳從), 진종, 진종, 담아건(覃兒健), 담아건, 담아건
지명
무릉, 영양, 영양, 영양(零陽), 작당(作唐), 잔릉(孱陵), 형주, 여남(汝南), 영천(潁川), 零陽, 충중(充中), 예중(澧中), 굉하(宏下), 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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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중만(澧中蠻)의 진종(陳從) , 누중만(漊中蠻)의 담아건(覃兒健) 등이 반란을 일으킴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1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