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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정(相單程)의 노략을 막고 이사(夷司)를 설치한 뒤 여러 만이가 평정됨

  • 국가
    남만(南蠻)
광무제(光武帝)가 중흥하였을 때 무릉의 만이들이 갑자기 번성하였다.주 001
각주 001)
光武 中興은 後漢 光武帝의 등극을 의미하는데, 그렇다고 武陵의 蠻夷가 번성한 것이 光武帝의 정책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王莽정권을 포함한 前後漢 교체기 政局이 혼란한 상황에서 사방의 이민족들의 활동이 크게 늘어나는데, 특히 王莽이 古禮에 입각하여 異民族에 대해 爵位를 貶下한 것에 대한 반발로 이민족들의 독자적인 활동이 활발하게 추진된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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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무(建武) 23년(47) 정부(精夫), 상단정(相單程) 등이 좁고 험악한 지형에 의지하여 군현을 크게 노략질하였다. 이에 무위장군(武威將軍)주 002
각주 002)
武威將軍: 建武 2년 郭守가 1차례 나타날 뿐(『後漢書』 卷17, 「岑彭傳」), 後漢代에는 劉尙의 地位로만 나타난다. 구체적인 職任보다는 특정한 將軍에 대한 고유한 칭호로, 武職의 관료적 階序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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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劉尙) 주 003
각주 003)
劉尙: 後漢代 光武帝 建武 6년(30)부터 24년까지 활동한 장수로, 建武초 羌族과 公孫氏 토벌에 공을 세우다가, 建武 19년에서 24년까지 西南夷와 南蠻의 토벌에 참여하였다. 建武 24년 五溪蠻 토벌시 軍士들과 함께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明統志』 卷65 「辰州府」에 폐허화되었지만 劉尙城이 남아 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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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 남군(南郡), 장사(長沙), 무릉(武陵)에서 병사 만 여인을 징발하여, 배를 타고 원수(沅水) 주 004
각주 004)
沅水: 李賢注에서는 牂柯郡 옛 且蘭 동북에서 시작하여 辰州·潭州·岳州를 거치고 洞庭湖을 거쳐서 長江에 들어간다고 하였다(沅水出牂柯故且蘭東北, 經辰州·潭州·岳州, 經洞庭湖入江也.). 현재 같은 명칭으로 호남성 서북부에서 동정호로 흘러드는 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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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거슬러 무계(武谿) 주 005
각주 005)
武谿: 李賢은 『後漢書』 卷18, 「吳蓋陳臧列傳」에서 注를 달고 있는데, 당시 辰州 盧谿縣의 강이라고 하고 있다(武谿, 水名, 在今辰州盧谿縣). 史書에선 ‘武溪’라고도 표현되어 있는데, 武陵의 五溪중의 하나이다. 五溪는 沅水유역의 雄溪, 樠溪, 辰溪, 酉溪, 武溪를 가리키는데, 蠻夷의 거주지로 이들을 五溪蠻으로 불렀다(『南史』 卷79, 「夷貊下」 「荊雍州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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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들어가 이들을 공격하였다. 유상은 적을 가벼이 여겨 깊고 험한 곳으로 들어가자, 산이 깊고 물 흐름이 빨라 배들이 더 나아갈 수 없었다. 만씨(蠻氏)주 006
각주 006)
蠻氏: 武陵 蠻夷의 부족세력을 가리키는 곳이 분명한 것으로, ‘蠻氏’가 蠻夷에 대한 칭호로 사용된 것은 『後漢書』에서만 나타난다. 이와는 별도로 원래 戰國時代까지 현재 洛陽의 남쪽인 伊洛之間에 陸渾과 함께 존립하였던 소왕국으로, 후에 陸渾은 晉에, 蠻氏는 楚에 복속되었다. 이 蠻氏國과 武陵의 蠻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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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유상이 식량이 적고 멀리 들어왔으며, 또 길을 잘 모른다는 것을 알고, 끝까지 험악한 지역에 모여 방어하였다. 유상이 식량이 떨어져 철군하자, 만들은 길을 따라가며 싸움을 걸었다. 유상의 군대는 크게 패하여 모두 수몰되었다. [건무(建武)] 24년(48) 상단정 등이 임원(臨沅) 주 007
각주 007)
臨沅: 漢代 武陵郡 臨沅縣으로, 현재 湖南省 武陵縣의 서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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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쳐들어 오자, [朝廷에서는] 알자(謁者)주 008
각주 008)
謁者: 春秋戰國시대부터 國君을 위해 傳達의 일을 담당하는 일로 시작된 관직으로, 秦漢시대 제도화되었다. 漢代에는 ‘賓贊受事’를 담당하는 관리로 秩이 比六百石으로 70명이 두어진 것과 少府의 官屬으로 中書謁者가 있었다. 成帝시기에 ‘中書謁者令’이 ‘中謁者令으로 바뀌었는데, 前後漢代 官職에 ‘中’자가 들어 있는 경우는 주로 宦官들이 담당하던 관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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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李嵩),주 009
각주 009)
李崇: 이곳 외에 다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中山太守 馬成과 함께 蠻夷를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서 李崇은 中謁者로서 宦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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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 태수(中山太守) 마성(馬成) 주 010
각주 010)
馬成: 南陽 棘陽人으로 縣吏에서 출발하여 光武帝가 潁川을 장악하고 있을 때 그 휘하로 들어가, 주로 江淮지역과 西北邊의 토벌에 참여하여 光武帝정권의 안정에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平舒侯로 봉해졌는데, 建武14년 北邊의 안정을 도모하여 현재 河北省 定縣에 위치한 中山太守로 보임하였는데, 建武 24년 갑자기 남쪽 武陵蠻의 토벌에 투입되었으나 별 공이 없었다. 『後漢書』 卷22 「馬成傳」에 立傳되어 있다. 갑자기 蠻夷지역과 별 관계가 없는 謁者 李崇과 馬成을 함께 파견한 것은 당시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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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듬해 봄주 011
각주 011)
『後漢書』 「光武帝記」와 「馬援傳」에 따르면 馬援이 출정하여 만이를 격파한 것은 建武 25년의 일로 되어 있으나, 東晋의 袁宏이 찬술한 『後漢紀』 권8, 「光武皇帝紀」에 따르면 建武 26년 2월의 일로 적고 있어, 양자의 기록에 다소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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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주 012
각주 012)
伏波將軍 馬援: 伏波將軍은 常置되어 고정된 임무가 맡는 관직이 아니라, 파견된 將軍府의 위상을 나타내는 雜號將軍이었다. 漢武帝 元鼎 5년(전112) 南越王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路博德을 처음으로 伏波將軍으로 임명하였다. 光武帝 建武 17년 徵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虎賁中郞將 馬援을 伏波將軍으로 임명하여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建武 23년 武陵蠻의 반란에 武威將軍 劉尙과 中山太守 馬成이 연이어 출병하였으나 진압에 실패하자, 伏波將軍 馬援은 年老하다는 이유로 만류하는 光武帝를 압박하여 끝내 출병하였지만 도중에 사망하고 만다. 『後漢書』 卷24, 「馬援傳」으로 立傳되어 있다. 특히, 馬援은 자신의 활동을 路博德의 업적과 연관시키고 있어 그가 伏波將軍이라는 칭호의 계승자임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伏波將軍이 고정된 임무가 부여된 것은 아니지만 南越, 南蠻를 평정하는 장군으로서의 의식과 전통이 계승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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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장(中郞將)주 013
각주 013)
中郞將: 『後漢書志』 권25 「百官」2 光祿勳條에 따르면 光祿勳은 궁문의 숙위를 담당하는 관직으로 俸秩은 二千石이다. 中郞將은 光祿勳의 속관으로 五官, 左, 右, 虎賁, 羽林中郞將이 있었는데, 俸秩은 比二千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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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劉匡), 마무(馬武), 손영(孫永) 주 014
각주 014)
劉匡, 馬武, 孫永: 이들은 모두 中郞將으로서 『後漢書』 卷24, 「馬援傳」에서는 耿舒가 포함되어 있다. 馬武는 『後漢書』 卷22에 立傳되어 있다. 中郞將은 궁정의 호위를 담당하는 三署의 郎中를 통령하는 궁정수비군의 武將으로, 후한시대에는 郡國에서 孝廉으로서 천거하였다(『通典』 卷29, 「職官」11 武官下 中郎將五官中郎將 左右中郎將條, “並領三署郎從, 後漢之制, 郡國舉孝 廉以補之. 三署郎年五十以上屬五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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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임원에 이르러 이들을 격파하게 하였다. 단정 등은 굶주려 항복을 청하였다. 마침 마원이 병들어 죽자, 알자 종균(宗均) 주 015
각주 015)
宗均: 원문에는 ‘宗均’이라 되어 있으나, 『後漢書』 권41에서는 ‘宋均’이라는 이름으로 열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後漢紀』에서도 ‘宋均’으로 적고 있다. 이에 대해 『資治通鑑』 胡三省注에서는 宋均의 원래 성은 ‘宗’으로 ‘宋’이라고 한 것은 잘못 전해진 채로 기록된 것이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41에 立傳되어 武陵蠻 토벌과정과 宋均의 활동이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宋均은 원래 中書謁者로 있을 때 武威將軍 劉常이 武陵蠻에게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하기 위해 江夏에서 軍士를 징집하는 임무를 띄고 파견되었다. 나중에 馬援이 출병하였을 때는 監軍으로 동행하였다. 馬援 역시 현장에서 사망하자, 나머지 장군들과 군사를 수습하고 허위로 伏波司馬 呂種을 沅陵令으로 임명하여 가짜 詔書를 가지고 蠻夷에 들어가 은혜와 신뢰를 보이니, 蠻夷들이 자신의 君長을 베고 항복하였다고 한다. 宋均은 이를 받아들이고, 이어서 황제에게 허위로 詔書를 꾸민 것에 대해 죄를 청하여 용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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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항복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들을 위해 이사(吏司)주 016
각주 016)
吏司: 『後漢書』 卷41, 「宋均傳」에는 ‘長吏’로 되어 있다. 특별한 관청이라기보다 蠻夷 등을 地方 屬官으로 임명하였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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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설치하자 여러 만들이 마침내 평정되었다.

  • 각주 001)
    光武 中興은 後漢 光武帝의 등극을 의미하는데, 그렇다고 武陵의 蠻夷가 번성한 것이 光武帝의 정책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王莽정권을 포함한 前後漢 교체기 政局이 혼란한 상황에서 사방의 이민족들의 활동이 크게 늘어나는데, 특히 王莽이 古禮에 입각하여 異民族에 대해 爵位를 貶下한 것에 대한 반발로 이민족들의 독자적인 활동이 활발하게 추진된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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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武威將軍: 建武 2년 郭守가 1차례 나타날 뿐(『後漢書』 卷17, 「岑彭傳」), 後漢代에는 劉尙의 地位로만 나타난다. 구체적인 職任보다는 특정한 將軍에 대한 고유한 칭호로, 武職의 관료적 階序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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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劉尙: 後漢代 光武帝 建武 6년(30)부터 24년까지 활동한 장수로, 建武초 羌族과 公孫氏 토벌에 공을 세우다가, 建武 19년에서 24년까지 西南夷와 南蠻의 토벌에 참여하였다. 建武 24년 五溪蠻 토벌시 軍士들과 함께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明統志』 卷65 「辰州府」에 폐허화되었지만 劉尙城이 남아 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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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沅水: 李賢注에서는 牂柯郡 옛 且蘭 동북에서 시작하여 辰州·潭州·岳州를 거치고 洞庭湖을 거쳐서 長江에 들어간다고 하였다(沅水出牂柯故且蘭東北, 經辰州·潭州·岳州, 經洞庭湖入江也.). 현재 같은 명칭으로 호남성 서북부에서 동정호로 흘러드는 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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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武谿: 李賢은 『後漢書』 卷18, 「吳蓋陳臧列傳」에서 注를 달고 있는데, 당시 辰州 盧谿縣의 강이라고 하고 있다(武谿, 水名, 在今辰州盧谿縣). 史書에선 ‘武溪’라고도 표현되어 있는데, 武陵의 五溪중의 하나이다. 五溪는 沅水유역의 雄溪, 樠溪, 辰溪, 酉溪, 武溪를 가리키는데, 蠻夷의 거주지로 이들을 五溪蠻으로 불렀다(『南史』 卷79, 「夷貊下」 「荊雍州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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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蠻氏: 武陵 蠻夷의 부족세력을 가리키는 곳이 분명한 것으로, ‘蠻氏’가 蠻夷에 대한 칭호로 사용된 것은 『後漢書』에서만 나타난다. 이와는 별도로 원래 戰國時代까지 현재 洛陽의 남쪽인 伊洛之間에 陸渾과 함께 존립하였던 소왕국으로, 후에 陸渾은 晉에, 蠻氏는 楚에 복속되었다. 이 蠻氏國과 武陵의 蠻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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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臨沅: 漢代 武陵郡 臨沅縣으로, 현재 湖南省 武陵縣의 서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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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謁者: 春秋戰國시대부터 國君을 위해 傳達의 일을 담당하는 일로 시작된 관직으로, 秦漢시대 제도화되었다. 漢代에는 ‘賓贊受事’를 담당하는 관리로 秩이 比六百石으로 70명이 두어진 것과 少府의 官屬으로 中書謁者가 있었다. 成帝시기에 ‘中書謁者令’이 ‘中謁者令으로 바뀌었는데, 前後漢代 官職에 ‘中’자가 들어 있는 경우는 주로 宦官들이 담당하던 관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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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李崇: 이곳 외에 다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中山太守 馬成과 함께 蠻夷를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서 李崇은 中謁者로서 宦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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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馬成: 南陽 棘陽人으로 縣吏에서 출발하여 光武帝가 潁川을 장악하고 있을 때 그 휘하로 들어가, 주로 江淮지역과 西北邊의 토벌에 참여하여 光武帝정권의 안정에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平舒侯로 봉해졌는데, 建武14년 北邊의 안정을 도모하여 현재 河北省 定縣에 위치한 中山太守로 보임하였는데, 建武 24년 갑자기 남쪽 武陵蠻의 토벌에 투입되었으나 별 공이 없었다. 『後漢書』 卷22 「馬成傳」에 立傳되어 있다. 갑자기 蠻夷지역과 별 관계가 없는 謁者 李崇과 馬成을 함께 파견한 것은 당시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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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後漢書』 「光武帝記」와 「馬援傳」에 따르면 馬援이 출정하여 만이를 격파한 것은 建武 25년의 일로 되어 있으나, 東晋의 袁宏이 찬술한 『後漢紀』 권8, 「光武皇帝紀」에 따르면 建武 26년 2월의 일로 적고 있어, 양자의 기록에 다소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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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伏波將軍 馬援: 伏波將軍은 常置되어 고정된 임무가 맡는 관직이 아니라, 파견된 將軍府의 위상을 나타내는 雜號將軍이었다. 漢武帝 元鼎 5년(전112) 南越王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路博德을 처음으로 伏波將軍으로 임명하였다. 光武帝 建武 17년 徵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虎賁中郞將 馬援을 伏波將軍으로 임명하여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建武 23년 武陵蠻의 반란에 武威將軍 劉尙과 中山太守 馬成이 연이어 출병하였으나 진압에 실패하자, 伏波將軍 馬援은 年老하다는 이유로 만류하는 光武帝를 압박하여 끝내 출병하였지만 도중에 사망하고 만다. 『後漢書』 卷24, 「馬援傳」으로 立傳되어 있다. 특히, 馬援은 자신의 활동을 路博德의 업적과 연관시키고 있어 그가 伏波將軍이라는 칭호의 계승자임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伏波將軍이 고정된 임무가 부여된 것은 아니지만 南越, 南蠻를 평정하는 장군으로서의 의식과 전통이 계승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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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中郞將: 『後漢書志』 권25 「百官」2 光祿勳條에 따르면 光祿勳은 궁문의 숙위를 담당하는 관직으로 俸秩은 二千石이다. 中郞將은 光祿勳의 속관으로 五官, 左, 右, 虎賁, 羽林中郞將이 있었는데, 俸秩은 比二千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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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劉匡, 馬武, 孫永: 이들은 모두 中郞將으로서 『後漢書』 卷24, 「馬援傳」에서는 耿舒가 포함되어 있다. 馬武는 『後漢書』 卷22에 立傳되어 있다. 中郞將은 궁정의 호위를 담당하는 三署의 郎中를 통령하는 궁정수비군의 武將으로, 후한시대에는 郡國에서 孝廉으로서 천거하였다(『通典』 卷29, 「職官」11 武官下 中郎將五官中郎將 左右中郎將條, “並領三署郎從, 後漢之制, 郡國舉孝 廉以補之. 三署郎年五十以上屬五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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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宗均: 원문에는 ‘宗均’이라 되어 있으나, 『後漢書』 권41에서는 ‘宋均’이라는 이름으로 열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後漢紀』에서도 ‘宋均’으로 적고 있다. 이에 대해 『資治通鑑』 胡三省注에서는 宋均의 원래 성은 ‘宗’으로 ‘宋’이라고 한 것은 잘못 전해진 채로 기록된 것이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41에 立傳되어 武陵蠻 토벌과정과 宋均의 활동이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宋均은 원래 中書謁者로 있을 때 武威將軍 劉常이 武陵蠻에게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하기 위해 江夏에서 軍士를 징집하는 임무를 띄고 파견되었다. 나중에 馬援이 출병하였을 때는 監軍으로 동행하였다. 馬援 역시 현장에서 사망하자, 나머지 장군들과 군사를 수습하고 허위로 伏波司馬 呂種을 沅陵令으로 임명하여 가짜 詔書를 가지고 蠻夷에 들어가 은혜와 신뢰를 보이니, 蠻夷들이 자신의 君長을 베고 항복하였다고 한다. 宋均은 이를 받아들이고, 이어서 황제에게 허위로 詔書를 꾸민 것에 대해 죄를 청하여 용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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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吏司: 『後漢書』 卷41, 「宋均傳」에는 ‘長吏’로 되어 있다. 특별한 관청이라기보다 蠻夷 등을 地方 屬官으로 임명하였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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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광무제(光武帝), 상단정(相單程), 유상(劉尙), 유상, 유상, 유상, 유상, 상단정, 이숭(李嵩), 마성(馬成), 마원(馬援), 유광(劉匡), 마무(馬武), 손영(孫永), 단정, 마원, 종균(宗均)
지명
무릉, 남군(南郡), 장사(長沙), 무릉(武陵), 원수(沅水), 무계(武谿), 임원(臨沅),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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