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당우(唐虞)시기 이후 만이가 점점 번성함

  • 국가
    남만(南蠻)
(唐虞)시기주 001
각주 001)
唐虞: 唐堯와 虞舜의 竝稱으로, 堯舜시대를 의미한다. 唐堯는 帝嚳의 아들로서 姓은 伊祁이고 이름은 放勛이었다. 처음에 陶지역에 봉해졌다가 후에 唐에 봉해져 ‘陶唐氏’라고도 하였는데, 唐은 지금 山西 臨汾의 西南에 위치한 平陽을 도읍으로 하였다. 舜은 姓이 姚이고 이름은 重華로서 虞氏部落에서 성장하여 ‘虞舜’이라 칭한다. 堯는 年老하자 舜에게 대신 정사를 돌보도록 하기를 30년 하고 선양하였는데, 舜은 48年 동안 在位하면서 蒲坂에 도읍하였는데, 지금 山西省 永濟 蒲州鎭에 위치하였다. 虞舜은 南巡 중에 蒼梧에서 사망하였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湖北省 永遠縣 九嶷山 교외로 전해진다.
닫기
에 서로 신뢰의 징표를 요구하여 요복(要服)이라 하였다.주 002
각주 002)
要服: 夏代에 설정되었다고 하는 天下秩序상의 일정지역이다. 天子之國 밖으로 오백 리를 기준으로 甸服, 侯服, 綏服, 要服이 펼쳐져 있는데, 여기서 삼백 리는 夷, 이백 리는 蔡라 하고, 要服 밖으로 오백 리는 荒服으로 삼백 리까지는 蠻, 나머지 이백 리는 流라고 하였다(『史記』 卷2, 「夏本紀」: 75). 周代에는 이를 더 발전시켜 제사와 외교관계의 성격을 분명히 정리하여, 旬服은 祭를 참여하고, 侯服은 祀에 참여하고, 賓服은 亨제사에 참여하는데, 要服은 貢을 바치고 荒服은 왕노릇한다고 하였다(『史記』 卷4, 「周本紀」, 天子之國, 先王之制, 邦內甸服, 邦外侯服, 侯衛賓服, 夷蠻要服. 戎翟荒服, 甸服者祭, 侯服者祀, 賓服者享, 要服者貢, 荒服者王). 賓服 이전까지는 天子 중심의 공동체적 활동이 강조되고 있는 데 비해, 要服은 단순한 외교관계의 설정, 荒服은 상호교류가 단절된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要質’이라는 표현은 『後漢書』의 이전의 서적에서는 『國語』 「楚語」下, “夫人作享, 家爲巫史, 無有要質”에서 유일하게 나타난다. 三國吳의 韋昭는 “質, 誠也.”라고 주석하고 하고 있어, ‘質’은 상호 盟誓에서 인질, 文章, 혹은 信標 등 믿음이나 신뢰의 표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要質’은 要服에 해당하는 상호관계에서 신뢰의 표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런 전제에서 “與之要質, 故曰要服”은 “요청하는 質을 주었기 때문에 要服이라고 한다.” 정도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 고전문헌에서 ‘甸質’, ‘侯質’, ‘賓質’ 등의 표현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質’은 要服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특수한 상황인 것으로, ‘要質’하였기 때문에 ‘要服’으로 불린다는 문장구조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서로 ‘質’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要服’이라고 불린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서 ‘質’이라는 글자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상정할 수 있는데, 신뢰의 표시가 되는 人質, 信標, 土地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될 수 있는데, 역사적 상황과는 달리 이후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관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6년 1貢을 요구하는 것으로 한정되기도 하고(『國語』 卷1, 「周語」上), 문자와 교육을 수용하는 것까지로 확대해석하기도 한다(『通典』 卷12, 「食貨典」4, 自註, “要束以文教”).
닫기
(夏商)시대에는 점차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어 갔는데, 대(周代)에 이르러서는 그 무리들의 수가 점점 번성하였다. 선왕(宣王)이 중흥주 003
각주 003)
宣王: 周의 11대 국왕으로 기원전 828~782년 在位. 周厲王이 榮夷公을 卿士로 삼아 왕실의 경제적 권한을 강화하는 ‘專利政策’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하여 ‘國人暴動’이 일어나 厲王은 彘(현재의 山西省 霍縣)으로 도망하고, 朝廷은 衛國諸侯 和가 장악하여 ‘共和政’의 시대가 나타났다. 共和 14년(전828) 厲王이 죽자, 共伯은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자신의 아들 靜을 周宣王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衛國으로 귀환하였다. 周宣王은 재위시에 召穆公, 周定公, 尹吉甫 등을 등용하여, ‘不籍千畝’라고 하여 籍田제도 혹은 籍田에서 노예의 집단경작제도를 폐지하여, 周王室 중심의 통치력을 강화하고, 주변 민족 獫狁, 西戎, 淮夷 등에 대해 적극적인 공략정책을 추진하였다. 尹吉甫가 太原의 獫狁을 격퇴하여 서북변방으로 퇴각시키고, 召穆公 등으로 하여금 淮夷정벌을 통하여 남방의 최대왕국인 徐國을 복종시키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史書에서는 ‘宣王中興’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대사가들은 宣王시기부터 실제상 周王朝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닫기
한 후에 방숙(方叔) 주 004
각주 004)
方叔: 周宣王시 인물로, 卿士兵車 3,000을 이끌고 楚國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詩經』 「小雅」 「方叔篇」은 이에 대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닫기
에 명하여 만지역을 남벌(南伐)하도록 하였다. 『시경』에서 사람들이 소위 “만형이 와서 위엄을 보였다[蠻荊來威].”는 사람들이다. 또, “만형이 꿈틀거리며 일어나니, 대방(大邦)의 원수가 되도다.”주 005
각주 005)
李賢註에서는 毛詩 小雅編 序에 “〈采苡〉는 宣王이 남쪽지방을 정벌한 것을 읊은 詩이다.”고 되어 있다. “잠깐 쓴나물 뜯기를 저 新田에서 하며, 드러나고 진실한 方叔이여, 떨쳐 일어난 병사들이 활발하구나, 저 멍청하게 꿈틀거리는 蠻荊들이 大國의 원수가 되었도다.” 注에 “方叔의 卿士들이 命을 받아 將帥가 되었다.”고 하였다(『毛詩』 「小雅」 序曰 「采苡, 宣王南征也」. 「薄言采苡, 于彼新田. 顯允方叔, 振旅闐闐. 蠢爾蠻荊, 大邦爲讎」 注云: 「方叔卿士, 命而爲將也.」). 그러나 李賢이 인용한 詩는 현전본과는 차이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4章의 詩가 하나로 축약되어 있다. 朱子의 『詩經集傳』에는 〈采芑〉가 「小雅」 〈彤弓之什〉에 포함되어 있다.
닫기
라고 하였으니, 그 무리들이 크게 번성하여 제하(諸夏)주 006
각주 006)
諸夏: 戰國末에 나타난 개념으로 단순한 周王室 중심의 관념을 벗어나 중원의 여러 諸侯王을 아울러 일컫는 개념이다(李成珪, 1975). 여기서 ‘夏’는 크다는 의미로서 四夷에 대하여 크다는 관념으로 해석되기도 한다(『漢書』 卷23 「刑法志」, 顔師古注 “諸夏, 中國之諸侯也. 夏, 大也, 言大於四夷也.”). 그러나 일반적으로 夏는 夏王朝의 후손이라는 역사의식이 강조된 관념이었다.
닫기
에 적대적으로 대항하게 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 각주 001)
    唐虞: 唐堯와 虞舜의 竝稱으로, 堯舜시대를 의미한다. 唐堯는 帝嚳의 아들로서 姓은 伊祁이고 이름은 放勛이었다. 처음에 陶지역에 봉해졌다가 후에 唐에 봉해져 ‘陶唐氏’라고도 하였는데, 唐은 지금 山西 臨汾의 西南에 위치한 平陽을 도읍으로 하였다. 舜은 姓이 姚이고 이름은 重華로서 虞氏部落에서 성장하여 ‘虞舜’이라 칭한다. 堯는 年老하자 舜에게 대신 정사를 돌보도록 하기를 30년 하고 선양하였는데, 舜은 48年 동안 在位하면서 蒲坂에 도읍하였는데, 지금 山西省 永濟 蒲州鎭에 위치하였다. 虞舜은 南巡 중에 蒼梧에서 사망하였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湖北省 永遠縣 九嶷山 교외로 전해진다.
     바로가기
  • 각주 002)
    要服: 夏代에 설정되었다고 하는 天下秩序상의 일정지역이다. 天子之國 밖으로 오백 리를 기준으로 甸服, 侯服, 綏服, 要服이 펼쳐져 있는데, 여기서 삼백 리는 夷, 이백 리는 蔡라 하고, 要服 밖으로 오백 리는 荒服으로 삼백 리까지는 蠻, 나머지 이백 리는 流라고 하였다(『史記』 卷2, 「夏本紀」: 75). 周代에는 이를 더 발전시켜 제사와 외교관계의 성격을 분명히 정리하여, 旬服은 祭를 참여하고, 侯服은 祀에 참여하고, 賓服은 亨제사에 참여하는데, 要服은 貢을 바치고 荒服은 왕노릇한다고 하였다(『史記』 卷4, 「周本紀」, 天子之國, 先王之制, 邦內甸服, 邦外侯服, 侯衛賓服, 夷蠻要服. 戎翟荒服, 甸服者祭, 侯服者祀, 賓服者享, 要服者貢, 荒服者王). 賓服 이전까지는 天子 중심의 공동체적 활동이 강조되고 있는 데 비해, 要服은 단순한 외교관계의 설정, 荒服은 상호교류가 단절된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要質’이라는 표현은 『後漢書』의 이전의 서적에서는 『國語』 「楚語」下, “夫人作享, 家爲巫史, 無有要質”에서 유일하게 나타난다. 三國吳의 韋昭는 “質, 誠也.”라고 주석하고 하고 있어, ‘質’은 상호 盟誓에서 인질, 文章, 혹은 信標 등 믿음이나 신뢰의 표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要質’은 要服에 해당하는 상호관계에서 신뢰의 표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런 전제에서 “與之要質, 故曰要服”은 “요청하는 質을 주었기 때문에 要服이라고 한다.” 정도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 고전문헌에서 ‘甸質’, ‘侯質’, ‘賓質’ 등의 표현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質’은 要服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특수한 상황인 것으로, ‘要質’하였기 때문에 ‘要服’으로 불린다는 문장구조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서로 ‘質’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要服’이라고 불린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서 ‘質’이라는 글자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상정할 수 있는데, 신뢰의 표시가 되는 人質, 信標, 土地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될 수 있는데, 역사적 상황과는 달리 이후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관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6년 1貢을 요구하는 것으로 한정되기도 하고(『國語』 卷1, 「周語」上), 문자와 교육을 수용하는 것까지로 확대해석하기도 한다(『通典』 卷12, 「食貨典」4, 自註, “要束以文教”).
     바로가기
  • 각주 003)
    宣王: 周의 11대 국왕으로 기원전 828~782년 在位. 周厲王이 榮夷公을 卿士로 삼아 왕실의 경제적 권한을 강화하는 ‘專利政策’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하여 ‘國人暴動’이 일어나 厲王은 彘(현재의 山西省 霍縣)으로 도망하고, 朝廷은 衛國諸侯 和가 장악하여 ‘共和政’의 시대가 나타났다. 共和 14년(전828) 厲王이 죽자, 共伯은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자신의 아들 靜을 周宣王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衛國으로 귀환하였다. 周宣王은 재위시에 召穆公, 周定公, 尹吉甫 등을 등용하여, ‘不籍千畝’라고 하여 籍田제도 혹은 籍田에서 노예의 집단경작제도를 폐지하여, 周王室 중심의 통치력을 강화하고, 주변 민족 獫狁, 西戎, 淮夷 등에 대해 적극적인 공략정책을 추진하였다. 尹吉甫가 太原의 獫狁을 격퇴하여 서북변방으로 퇴각시키고, 召穆公 등으로 하여금 淮夷정벌을 통하여 남방의 최대왕국인 徐國을 복종시키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史書에서는 ‘宣王中興’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대사가들은 宣王시기부터 실제상 周王朝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4)
    方叔: 周宣王시 인물로, 卿士兵車 3,000을 이끌고 楚國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詩經』 「小雅」 「方叔篇」은 이에 대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李賢註에서는 毛詩 小雅編 序에 “〈采苡〉는 宣王이 남쪽지방을 정벌한 것을 읊은 詩이다.”고 되어 있다. “잠깐 쓴나물 뜯기를 저 新田에서 하며, 드러나고 진실한 方叔이여, 떨쳐 일어난 병사들이 활발하구나, 저 멍청하게 꿈틀거리는 蠻荊들이 大國의 원수가 되었도다.” 注에 “方叔의 卿士들이 命을 받아 將帥가 되었다.”고 하였다(『毛詩』 「小雅」 序曰 「采苡, 宣王南征也」. 「薄言采苡, 于彼新田. 顯允方叔, 振旅闐闐. 蠢爾蠻荊, 大邦爲讎」 注云: 「方叔卿士, 命而爲將也.」). 그러나 李賢이 인용한 詩는 현전본과는 차이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4章의 詩가 하나로 축약되어 있다. 朱子의 『詩經集傳』에는 〈采芑〉가 「小雅」 〈彤弓之什〉에 포함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諸夏: 戰國末에 나타난 개념으로 단순한 周王室 중심의 관념을 벗어나 중원의 여러 諸侯王을 아울러 일컫는 개념이다(李成珪, 1975). 여기서 ‘夏’는 크다는 의미로서 四夷에 대하여 크다는 관념으로 해석되기도 한다(『漢書』 卷23 「刑法志」, 顔師古注 “諸夏, 中國之諸侯也. 夏, 大也, 言大於四夷也.”). 그러나 일반적으로 夏는 夏王朝의 후손이라는 역사의식이 강조된 관념이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 , 선왕(宣王), 방숙(方叔)
지명
, ,
서명
시경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당우(唐虞)시기 이후 만이가 점점 번성함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