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倭)의 위치 및 풍속을 설명
-夫餘·挹婁·高句麗·東沃沮·濊·三韓에 관한 기록이 왜전 앞에 있으나 국사편찬위원회, 『中國正史朝鮮傳譯註』 1, 신서원, 2004(1990 초판)에 이미 역주되었으므로 생략한다. -
왜(倭) 주 001
왜(倭) 주 001
각주 001)
는 한(韓)
주 002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고, [이들은]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무릇 100여 나라[國]이다. 무제(武帝)
주 003가 조선(朝鮮)을 멸망시킨주 004후에 사역(使驛)주 005을 이용하여 한(漢)과 통한 것이 30여 개 나라[國]이다.주 006[이] 나라들의 [수장(首長)]은 모두 왕(王)을 칭하였는데, 대대로 왕통(王統)이 이어졌다. 그 대왜왕(大倭王)주 007은 야마대국(邪馬臺國)
주 008倭: 唐代(618~907) 이전에 중국인이 일본인 및 그 국가를 일컬은 呼稱이다. 『漢書』 권28下, 「地理志 下」 〈燕地條〉에는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이라 기재되어 있고, 이 기사에 顔師古는 “『魏略』云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이라 注記하였다. 『三國志』에서는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國.”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에 입각하여 『後漢書』는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㠀爲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라고 한 것이다. 『後漢書』「倭傳」의 내용은 대체로 『三國志』의 내용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후한시대의 외교관계 기사를 더한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石原道博, 1975: 12). 한편, “나라에 여자가 많다.”거나, “會稽의 바다 바깥에 東鯷人이 있다.”고 한 것 등은 『後漢書』에만 보이는 내용이다.
각주 008)
에 있다. 낙랑군(樂浪郡)
주 009의 변경에서 그 나라는 만 2천 리주 100邪馬臺國: 3세기 전반 일본열도에 있었던 伊都國 등의 여러 소국들을 통솔하였던 나라. 여왕 卑彌呼가 주재하였던 나라이며 大和政權의 前身으로 보고 있다. 『三國志』에는 ‘邪馬壹國’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邪馬壹은 邪馬臺의 誤字란 것이 定說이었으나, 근래에 邪馬壹(야마이)라고 보는 說도 있다. 邪馬臺國이 九州(규슈)에 있었다고 보는 입장과 大和(야마토)에 있었다는 설로 나누어지는데, 九州說에서도 日向이나 大隅의 一角에 해당된다는 견해와 薩摩나 豊前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으며, 大和說에서도 瀨戶內海 航行說과 東海(日本海) 航行說이 있다(石原道博, 2005: 55). 한편 『三國志』에는 “南至邪馬壹國, 女王之所都, 水行十日, 陸行一月, 官有伊支馬, 次曰彌馬升, 次曰彌馬獲支, 次曰奴佳鞮, 可七萬餘戶. ([投馬國에서] 남쪽으로 가면 邪馬壹國에 이르는데, 女王이 都邑한 곳으로 바닷길로 20일 동안 가고 [다시] 육상으로 1개월 동안 간다. [그 大]官으로 伊支馬가 있고, 그 다음은 彌馬升이라 부르며, 그 다음은 彌馬獲支라 부르고, 그 다음은 奴佳鞮라 부른다. 7만여 호 정도가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처럼 『三國志』에서는 거리와 경로, 관직명, 호수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으나, 『後漢書』에서는 大倭王이 있는 곳이며, 낙랑군과 구야한국으로부터 거리가 얼마라는 내용만 실려 있다. 女王이라고 하지 않고 大倭王이라고 한 것은 『後漢書』의 성립시기가 『三國志』보다 늦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새로운 정보에 의거했다기보다는 卑彌呼가 재위한 시기를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고친 것으로 보인다.
각주 100)
떨어져 있고,주 011그 나라의 서북방주 012에 있는 구야한국(拘邪韓國)
주 013에서는 7천여 리 떨어져 있다. 그 땅은 대략 회계[군](會稽)
주 014
동야[현](東冶縣)
주 015의 동쪽에 있고,주 016
주애[군](朱崖郡)
주 017및 담이[군](儋耳郡)
주 018과 서로 가깝다. 따라서 그들의 법속(法俗)은 같은 것이 많다.里: 『春秋穀梁傳』을 위시한 고대 문헌에는 300步라고 하지만, 후대에는 360步를 1里로 적은 기록이 많다. 기본 단위인 尺의 길이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기는 하지만 개략적으로는 前漢의 1尺이 23cm, 後漢의 1尺이 23.5cm, 魏의 1尺이 24.2cm, 晉의 1尺이 24.5cm라고 한다(山尾幸久, 1972: 62~68). 5尺 1步, 360步 1里로 하면 後漢의 1里는 423m 정도인 셈이다. 그러나 『後漢書』 「倭傳」의 기록은 『三國志』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魏의 1里인 435m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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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倭: 唐代(618~907) 이전에 중국인이 일본인 및 그 국가를 일컬은 呼稱이다. 『漢書』 권28下, 「地理志 下」 〈燕地條〉에는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이라 기재되어 있고, 이 기사에 顔師古는 “『魏略』云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이라 注記하였다. 『三國志』에서는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國.”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에 입각하여 『後漢書』는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㠀爲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라고 한 것이다. 『後漢書』「倭傳」의 내용은 대체로 『三國志』의 내용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후한시대의 외교관계 기사를 더한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石原道博, 1975: 12). 한편, “나라에 여자가 많다.”거나, “會稽의 바다 바깥에 東鯷人이 있다.”고 한 것 등은 『後漢書』에만 보이는 내용이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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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邪馬臺國: 3세기 전반 일본열도에 있었던 伊都國 등의 여러 소국들을 통솔하였던 나라. 여왕 卑彌呼가 주재하였던 나라이며 大和政權의 前身으로 보고 있다. 『三國志』에는 ‘邪馬壹國’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邪馬壹은 邪馬臺의 誤字란 것이 定說이었으나, 근래에 邪馬壹(야마이)라고 보는 說도 있다. 邪馬臺國이 九州(규슈)에 있었다고 보는 입장과 大和(야마토)에 있었다는 설로 나누어지는데, 九州說에서도 日向이나 大隅의 一角에 해당된다는 견해와 薩摩나 豊前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으며, 大和說에서도 瀨戶內海 航行說과 東海(日本海) 航行說이 있다(石原道博, 2005: 55). 한편 『三國志』에는 “南至邪馬壹國, 女王之所都, 水行十日, 陸行一月, 官有伊支馬, 次曰彌馬升, 次曰彌馬獲支, 次曰奴佳鞮, 可七萬餘戶. ([投馬國에서] 남쪽으로 가면 邪馬壹國에 이르는데, 女王이 都邑한 곳으로 바닷길로 20일 동안 가고 [다시] 육상으로 1개월 동안 간다. [그 大]官으로 伊支馬가 있고, 그 다음은 彌馬升이라 부르며, 그 다음은 彌馬獲支라 부르고, 그 다음은 奴佳鞮라 부른다. 7만여 호 정도가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처럼 『三國志』에서는 거리와 경로, 관직명, 호수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으나, 『後漢書』에서는 大倭王이 있는 곳이며, 낙랑군과 구야한국으로부터 거리가 얼마라는 내용만 실려 있다. 女王이라고 하지 않고 大倭王이라고 한 것은 『後漢書』의 성립시기가 『三國志』보다 늦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새로운 정보에 의거했다기보다는 卑彌呼가 재위한 시기를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고친 것으로 보인다.
-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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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00)
里: 『春秋穀梁傳』을 위시한 고대 문헌에는 300步라고 하지만, 후대에는 360步를 1里로 적은 기록이 많다. 기본 단위인 尺의 길이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기는 하지만 개략적으로는 前漢의 1尺이 23cm, 後漢의 1尺이 23.5cm, 魏의 1尺이 24.2cm, 晉의 1尺이 24.5cm라고 한다(山尾幸久, 1972: 62~68). 5尺 1步, 360步 1里로 하면 後漢의 1里는 423m 정도인 셈이다. 그러나 『後漢書』 「倭傳」의 기록은 『三國志』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魏의 1里인 435m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색인어
- 이름
- 무제(武帝)
- 지명
- 왜(倭), 한(韓), 조선(朝鮮), 한(漢), 야마대국(邪馬臺國), 낙랑군(樂浪郡), 구야한국(拘邪韓國), 회계[군](會稽), 동야[현](東冶縣), 주애[군](朱崖郡), 담이[군](儋耳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