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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서역과 교통이 단절됨

  • 국가
    흉노·서역(匈奴·西域)
천봉 3년(후16) 마침내 오위장(五威將) 왕준(王駿) 주 001
각주 001)
1979년 敦煌 馬圈灣의 漢代 烽燧遺址에서 발견된 簡牘資料를 정리보고한 吾礽驤의 『敦煌馬圈灣漢代烽燧遺址發掘報告』(中華書局, 1991)는 簡牘자료에 보이는 ‘使西域大使五威左率都尉’가 바로 본문에 나오는 王駿이라고 추정했고, 余太山(2005 : 217)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孫占宇(2006)는 五威左率과 五威將은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使西域大使五威左率都尉은 『漢書』 「王莽傳」에 언급된대로 五威將 王駿을 따라 원정에 참가했지만, 그와는 별도의 부대를 지휘했던 五威帥 何封이라고 주장했다. 王駿 등이 焉耆를 공격한 시점에 대해서도 天鳳 3년(후16) 六月說과 天鳳 4년(후17) 六月說이 갈라져 있으나, 그 行軍路線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즉 天鳳 3년 十二月 玉門의 千秋隧를 통과하여 翌年 正月에는 大煎都候障에 도착했고, 그곳에 幕府를 설치하고 군대를 모으고 식량을 축적하였다. 그가 지휘했던 군대는 모두 河西의 各郡에서 징발되었다. 漢軍은 둘로 나뉘어 2천 명으로 구성된 一隊는 王駿과 李崇이 지휘하여 돈황을 나서서 鄯善을 경과하여 尉犁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莎車․龜玆․尉犁 등에서 온 서역의 병사들과 합하여 모두 7천 명의 병력으로 天鳳 4년(후17) 四月 焉耆로 진군했다. 처음에는 우세했으나 도중에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갔고, 마침내 王駿은 피살되고 전군이 몰살당했으며, 李崇은 龜玆로 퇴각하였다. 또 다른 一隊는 左帥 何封과 戊己校尉 郭欽이 지휘하는 5천 명이었는데 ‘新道’를 경유하여 車師를 통과해서 西南으로 焉耆를 공격했고, 그 결과는 위의 본문에서 기록된 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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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서역도호 이숭(李崇) 주 002
각주 002)
李崇 : 그는 天鳳 3년(후16)부터 地皇 4년(후23)까지 서역도호를 역임하였다. 但欽이 피살된 始建國 5년부터 天鳳 3년까지는 서역도호가 空職으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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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어 무기교위를 지휘해서 서역으로 나가도록 했다. 여러 나라가 모두 교외까지 나와 영접했고 병사와 양식을 보냈다. 언기는 투항하는 체하면서 군사를 모아서 스스로 대비하였다. 왕준 등은 사차·구자의 병사 7천여 명을 이끌고 그들을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언기로 들어갔다. 언기는 복병으로 왕준을 차단하려고 했다. 마침내 고묵·위리·위수 등의 나라의 군인들이 간첩질을 하다가 돌아오자, 함께 왕준 등을 습격하여 모두 살해하였다. 오로지 무기교위 곽흠(郭欽)만 별도로 군대를 이끌고 뒤늦게 언기에 도착했는데, 언기의 군대가 아직 돌아오기 전이어서 곽흠은 그곳의 노약자들을 죽인 뒤 군대를 이끌고 귀환했다. 왕망곽흠을 삼호자(剼胡子)주 003
각주 003)
剼胡子 : 이는 ‘오랑캐를 절멸시킨 인물’이라는 의미이다. 鄧展에 따르면 ‘剼의 音은 衫’이고, 顔師古는 ‘剼은 絕’의 의미라고 주석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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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삼았다. 이숭은 나머지 병사들을 거두어 구자로 돌아가 피신했다. 몇 년 뒤 왕망이 사망했고주 004
각주 004)
地皇 4년(후23)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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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도 마침내 없어져서, 서역은 이로 인하여 단절되어 버렸다.

  • 각주 001)
    1979년 敦煌 馬圈灣의 漢代 烽燧遺址에서 발견된 簡牘資料를 정리보고한 吾礽驤의 『敦煌馬圈灣漢代烽燧遺址發掘報告』(中華書局, 1991)는 簡牘자료에 보이는 ‘使西域大使五威左率都尉’가 바로 본문에 나오는 王駿이라고 추정했고, 余太山(2005 : 217)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孫占宇(2006)는 五威左率과 五威將은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使西域大使五威左率都尉은 『漢書』 「王莽傳」에 언급된대로 五威將 王駿을 따라 원정에 참가했지만, 그와는 별도의 부대를 지휘했던 五威帥 何封이라고 주장했다. 王駿 등이 焉耆를 공격한 시점에 대해서도 天鳳 3년(후16) 六月說과 天鳳 4년(후17) 六月說이 갈라져 있으나, 그 行軍路線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즉 天鳳 3년 十二月 玉門의 千秋隧를 통과하여 翌年 正月에는 大煎都候障에 도착했고, 그곳에 幕府를 설치하고 군대를 모으고 식량을 축적하였다. 그가 지휘했던 군대는 모두 河西의 各郡에서 징발되었다. 漢軍은 둘로 나뉘어 2천 명으로 구성된 一隊는 王駿과 李崇이 지휘하여 돈황을 나서서 鄯善을 경과하여 尉犁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莎車․龜玆․尉犁 등에서 온 서역의 병사들과 합하여 모두 7천 명의 병력으로 天鳳 4년(후17) 四月 焉耆로 진군했다. 처음에는 우세했으나 도중에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갔고, 마침내 王駿은 피살되고 전군이 몰살당했으며, 李崇은 龜玆로 퇴각하였다. 또 다른 一隊는 左帥 何封과 戊己校尉 郭欽이 지휘하는 5천 명이었는데 ‘新道’를 경유하여 車師를 통과해서 西南으로 焉耆를 공격했고, 그 결과는 위의 본문에서 기록된 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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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李崇 : 그는 天鳳 3년(후16)부터 地皇 4년(후23)까지 서역도호를 역임하였다. 但欽이 피살된 始建國 5년부터 天鳳 3년까지는 서역도호가 空職으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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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剼胡子 : 이는 ‘오랑캐를 절멸시킨 인물’이라는 의미이다. 鄧展에 따르면 ‘剼의 音은 衫’이고, 顔師古는 ‘剼은 絕’의 의미라고 주석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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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地皇 4년(후23)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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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왕준(王駿), 이숭(李崇), 왕준, 왕준, 왕준, 곽흠(郭欽), 곽흠, 왕망, 곽흠, 이숭, 왕망, 이숭
지명
언기, 사차, 구자, 언기, 언기, 고묵, 위리, 위수, 언기, 언기, 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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