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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고구(姑句)가 서보(徐普)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흉노에 투항함

  • 국가
    흉노·서역(匈奴·西域)
원시 연간(후 1~5)에 거사후왕국에 신도(新道)가 생겨났다. [이 길은] 오선(五船)주 001
각주 001)
五船(nguo-dz’iwan) : 이 말이 현지어를 音寫한 것인지, 한자식 표기인지는 분명치 않다. 일찍이 徐松은 『西域水道記』에서 “五船은 지금 小南路에 있는 小山 다섯을 가리킨다. 계곡의 길이가 半里 남짓이고, 정상은 평평한데 首尾가 가파르기 때문에 五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여, 이 말이 漢字式 표현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한편 黃文弼은 五船에 대하여 “托乎拉克布拉克에서 噶順고비(莫賀延磧)을 관통하면 롭노르의 동북쪽에 이르고, 거기서 魯克沁(룩친) 남쪽의 得格爾, 즉 車師의 경계에 도달하게 된다.”라고 하면서, 五船은 哈密 일대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松田壽男 역시 ‘五船은 의심할 나위 없이 伊吾’라고 주장하여 哈密說을 지지했다. 최근의 한 연구는 玄奘의 傳記인 『大慈恩寺三藏法師傳』에 玉門關을 나서서 伊吾의 경계에 이르는 과정에 지나게 되는 ‘五峰’에 관한 언급에 주목하고, 이 五峰은 곧 驛傳 혹은 驛站이 있었던 것이어서 ‘五傳’이라고 불리던 곳인데 이 五傳이 음성상의 유사함으로 인하여 五船으로 假借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五船에 해당되는 5개의 지점을 ①紅柳井子, ②哈什布拉克, ③若泉溝, ④雅滿蘇泉, ⑤喀赫夏勒布拉克으로 비정하였다(馬千希, 199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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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북쪽을 나서서 옥문관과 통하며, 왕래하는 거리가 비교적 가까웠다. 무기교위 서보(徐普) 주 002
각주 002)
徐普 : 다른 자료에서는 확인이 안 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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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거리를 반으로 줄이고 백룡퇴(白龍堆)의 장애를 피하기 위해 [이 길을] 개통하려고 했다.주 003
각주 003)
敦煌 馬圈灣 漢簡을 종합해 보면 王莽 天鳳 4년(후17)에 戊己校尉 郭欽이 ‘新道’를 이용하여 車師에 이르러 거기서 다시 西南쪽으로 焉耆를 공격하려 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이 ‘新道’가 前漢 平帝 元始연간에 戊己校尉 徐普가 개척한 길이 아닌가 추정된다(余太山, 2005 : 2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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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후왕 고구(姑句)는 길이 [개통되면] 당연히 걸림돌[拄]이 될 것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를 불편하게 여겼다.주 004
각주 004)
이에 대해 顔師古는 拄는 ‘기둥을 세우는 것(支拄)’을 뜻하기 때문에, 새로운 도로가 나게 되면 자기에게 기둥을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마음이 불편하게 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資治通鑑』 卷35에는 이 부분이 “길이 개통되어 使者들에게 물자를 공급하게 되므로 마음이 불편했다(以當道供給使者心不便也)”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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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의] 땅은 흉노의 남장군(南將軍)주 005
각주 005)
南將軍 : 敦煌 馬圈灣 漢簡에서도 3회나 언급되어 있다(孫占宇, 2006 : 10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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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땅과 상당히 인접해 있기 때문에, 서보는 그 경계를 분명하게 한 다음에 이에 관해서 상주를 올리려고 하였다. 그는 고구를 불러서 그 같은 [사실을] 입증하도록 시켰지만, 그가 하려고 하지 않자 그를 구금하였다. 고구는 군관에게 소와 양을 뇌물로 주어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다. 고구의 집에 있던 창[矛]의 끝에서 불이 나자, 그 처인 고자취(股紫陬)고구에게 말하기를 “창 끝에서 불이 나왔으니, 이는 군사에 관한 징조이며, 용병(用兵)을 하는 것이 유리할 것입니다. 전에 거사전왕(車師前王)주 006
각주 006)
車師前王 : 즉 兜莫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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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호부의 사마에게 살해된 적이 있는데, 지금도 오래 구금되어 있으면 필시 죽을 것이니, 흉노에게 투항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고구는] 말을 달려 고창벽(高昌壁)주 007
각주 007)
高昌壁 : 高昌故城을 지칭한다. 따라서 늦어도 平帝 즉위 때까지는 戊己校尉의 治所가 종래 交河故城에서 高昌故城으로 옮겨갔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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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탈출하여 흉노로 들어갔다.주 008
각주 008)
이는 元始 2년(후2)에 벌어진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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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五船(nguo-dz’iwan) : 이 말이 현지어를 音寫한 것인지, 한자식 표기인지는 분명치 않다. 일찍이 徐松은 『西域水道記』에서 “五船은 지금 小南路에 있는 小山 다섯을 가리킨다. 계곡의 길이가 半里 남짓이고, 정상은 평평한데 首尾가 가파르기 때문에 五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여, 이 말이 漢字式 표현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한편 黃文弼은 五船에 대하여 “托乎拉克布拉克에서 噶順고비(莫賀延磧)을 관통하면 롭노르의 동북쪽에 이르고, 거기서 魯克沁(룩친) 남쪽의 得格爾, 즉 車師의 경계에 도달하게 된다.”라고 하면서, 五船은 哈密 일대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松田壽男 역시 ‘五船은 의심할 나위 없이 伊吾’라고 주장하여 哈密說을 지지했다. 최근의 한 연구는 玄奘의 傳記인 『大慈恩寺三藏法師傳』에 玉門關을 나서서 伊吾의 경계에 이르는 과정에 지나게 되는 ‘五峰’에 관한 언급에 주목하고, 이 五峰은 곧 驛傳 혹은 驛站이 있었던 것이어서 ‘五傳’이라고 불리던 곳인데 이 五傳이 음성상의 유사함으로 인하여 五船으로 假借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五船에 해당되는 5개의 지점을 ①紅柳井子, ②哈什布拉克, ③若泉溝, ④雅滿蘇泉, ⑤喀赫夏勒布拉克으로 비정하였다(馬千希, 199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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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徐普 : 다른 자료에서는 확인이 안 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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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敦煌 馬圈灣 漢簡을 종합해 보면 王莽 天鳳 4년(후17)에 戊己校尉 郭欽이 ‘新道’를 이용하여 車師에 이르러 거기서 다시 西南쪽으로 焉耆를 공격하려 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이 ‘新道’가 前漢 平帝 元始연간에 戊己校尉 徐普가 개척한 길이 아닌가 추정된다(余太山, 2005 : 2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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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이에 대해 顔師古는 拄는 ‘기둥을 세우는 것(支拄)’을 뜻하기 때문에, 새로운 도로가 나게 되면 자기에게 기둥을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마음이 불편하게 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資治通鑑』 卷35에는 이 부분이 “길이 개통되어 使者들에게 물자를 공급하게 되므로 마음이 불편했다(以當道供給使者心不便也)”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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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南將軍 : 敦煌 馬圈灣 漢簡에서도 3회나 언급되어 있다(孫占宇, 2006 : 10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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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車師前王 : 즉 兜莫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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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高昌壁 : 高昌故城을 지칭한다. 따라서 늦어도 平帝 즉위 때까지는 戊己校尉의 治所가 종래 交河故城에서 高昌故城으로 옮겨갔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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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이는 元始 2년(후2)에 벌어진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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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서보(徐普), 고구(姑句), 서보, 고구, 고구, 고구, 고자취(股紫陬), 고구, 고구
지명
거사후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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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姑句)가 서보(徐普)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흉노에 투항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54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