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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거사(車師)의 옛 땅이 흉노에게 넘어가고 거사왕은 한나라와 화친함

  • 국가
    흉노·서역(匈奴·西域)
거사왕이 오손으로 도망쳤을 때, 오손은 그를 잡아두고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서 글을 올려 “거사왕을 붙잡아 두어 나라가 위급할 때를 대비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가히 서쪽 길(西道)주 001
각주 001)
西道 : 흉노의 右地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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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해서 흉노를 공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한나라는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한나라는 전에 거사의 태자였다가 언기에 있는 군숙을 소환하여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거사국 사람들을 모두 이주시켜 거리에 살게 하였으니, 마침내 거사의 옛 땅[故地]은 흉노에게 넘어갔다.주 002
각주 002)
軍宿을 車師王으로 세웠다가 주민들과 함께 渠犂로 이주시킨 일은 地節 3년(전67)에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상황은 匈奴도 많이 쇠약해졌지만 한나라 역시 서역에서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는 『漢書』 「魏相傳」의 다음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元康 연간(전65~전62)에 흉노가 군대를 보내 車師에서 둔전하고 있는 한나라 사람들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주상께서 後將軍 趙忠國 등과 논의하여 흉노가 쇠약해 있는 틈을 타서 군대를 출병시켜 그 右地를 공격하여 다시는 감히 西域을 동요치 못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에 魏相이 上書를 올려 간언하기를 ‘최근 흉노가 善意를 품고 한나라 사람을 갑자기 귀환시켰으며 변경을 범하는 일도 없습니다. 거사의 둔전을 두고 다툰다고 해도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은 魏相의 의견을 받아들여 出兵을 중지하고 車師의 屯田을 철폐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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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왕은 한나라의 전관(田官)과 가까워질 수 있게 되어 흉노와 관계를 끊었고 또한 편안하고 즐겁게 한나라와 화친하게 되었다. 후에 한나라가 시랑 은광덕(殷廣德) 주 003
각주 003)
殷廣德 : 다른 자료에서는 확인이 안 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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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에 사신으로 보내어 거사왕 오귀(烏貴) 주 004
각주 004)
原文의 ‘烏孫’은 ‘烏貴’의 誤字이다. 그러나 顔師古는 “烏孫이 그 장군 가운데 貴人을 보내 한나라에 입조케 하였다(烏孫遣其將之貴者入漢朝)”라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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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한나라] 궁궐로 보내도록 요청했고, [한나라는] 그에게 저택을 하사하여 그의 처자와 함께 살도록 하였다. 이 해는 원강 4년(전62)이었다. 그 후에 무기교위를 두어 둔전을 실시하고 거사의 옛 땅에 거주하도록 하였다.주 005
각주 005)
戊己校尉 : 戊己가 ‘居中’을 의미한다는 것은 十干 가운데 戊己가 中間에 위치하며, 五行 가운데 土德이 四方의 中央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顔師古 이래 주석가들에 의해서 알려진 바이다. 그런데 戊己校尉의 명칭에 관한 최근의 한 연구는 天干 중에서 戊己가 土行에 해당되고, 이것은 한나라가 표방하는 土德과 일치하는 것이며, 北方의 匈奴는 水, 西方의 西域은 金에 配屬되므로, 土克水而生金의 원리에 따라 漢軍(土, 戊己)이 匈奴(水)를 누르고 西域(金)을 안정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지적하였다(賈叢江, 200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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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西道 : 흉노의 右地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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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軍宿을 車師王으로 세웠다가 주민들과 함께 渠犂로 이주시킨 일은 地節 3년(전67)에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상황은 匈奴도 많이 쇠약해졌지만 한나라 역시 서역에서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는 『漢書』 「魏相傳」의 다음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元康 연간(전65~전62)에 흉노가 군대를 보내 車師에서 둔전하고 있는 한나라 사람들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주상께서 後將軍 趙忠國 등과 논의하여 흉노가 쇠약해 있는 틈을 타서 군대를 출병시켜 그 右地를 공격하여 다시는 감히 西域을 동요치 못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에 魏相이 上書를 올려 간언하기를 ‘최근 흉노가 善意를 품고 한나라 사람을 갑자기 귀환시켰으며 변경을 범하는 일도 없습니다. 거사의 둔전을 두고 다툰다고 해도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은 魏相의 의견을 받아들여 出兵을 중지하고 車師의 屯田을 철폐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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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殷廣德 : 다른 자료에서는 확인이 안 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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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原文의 ‘烏孫’은 ‘烏貴’의 誤字이다. 그러나 顔師古는 “烏孫이 그 장군 가운데 貴人을 보내 한나라에 입조케 하였다(烏孫遣其將之貴者入漢朝)”라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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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戊己校尉 : 戊己가 ‘居中’을 의미한다는 것은 十干 가운데 戊己가 中間에 위치하며, 五行 가운데 土德이 四方의 中央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顔師古 이래 주석가들에 의해서 알려진 바이다. 그런데 戊己校尉의 명칭에 관한 최근의 한 연구는 天干 중에서 戊己가 土行에 해당되고, 이것은 한나라가 표방하는 土德과 일치하는 것이며, 北方의 匈奴는 水, 西方의 西域은 金에 配屬되므로, 土克水而生金의 원리에 따라 漢軍(土, 戊己)이 匈奴(水)를 누르고 西域(金)을 안정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지적하였다(賈叢江, 200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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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군숙, 은광덕(殷廣德), 오귀(烏貴)
지명
오손, 오손, 한나라, 한나라, 거사, 언기, 거사국, 거리, 거사,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오손, 한나라, 한나라, 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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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車師)의 옛 땅이 흉노에게 넘어가고 거사왕은 한나라와 화친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54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