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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원귀미( 元貴靡)를 대곤미(大昆彌)로, 오취도(烏就屠)는 소곤미(小昆彌)로 추대함

  • 국가
    오손국(烏孫國)
처음에 초나라 공주를 시중드는 사람[侍者]이었던 풍료(馮嫽) 주 001
각주 001)
馮嫽 : 解憂公主의 侍者였던 풍료는 본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한나라 조정과 긴밀하게 연락하여 원귀미를 ‘大昆彌’에 앉히는 외교적 활약을 하였다. 宣帝 甘露 3년(전51) 解憂公主가 연로하여 귀국할 때 그녀도 같이 長安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원귀미의 아들 星靡가 怯弱하여 烏孫의 국내정세가 불안하게 되자, 그녀는 다시 황제에게 上書를 올리고 烏孫에 使臣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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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공문서[史書]주 002
각주 002)
史書 : 漢代에는 歷史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令史가 습득해야 하는 글, 즉 당시 通用되던 隷書를 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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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능통하고 사무에 밝았으며, 일찍이 한나라의 절(節)을 갖고 공주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성곽이 있는 여러 나라로 가서 상을 하사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그녀를 존경하고 신뢰하여 ‘풍부인(馮夫人)’이라는 칭호로 불렀다. 그녀는 오손의 우대장의 부인이 되었는데, 우대장과 오취도는 서로 아끼는 사이었기 때문에 도호 정길풍부인을 시켜서 오취도에게 “한나라 병사가 바야흐로 출병한다. 필히 몰락할 것이니 항복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게 했다. 오취도가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자그마한 칭호[小號]주 003
각주 003)
小號 : 즉 小昆彌의 칭호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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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갖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제(宣帝)풍부인을 불러서 직접 상황을 하문하였다. 그리고 알자(謁者)주 004
각주 004)
謁者 : 春秋戰國시대에 처음으로 두어진 관직으로서 군주를 위하여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秦代에도 이를 답습하였고, 특히 漢代에 들어가서는 郎中令의 属官으로 谒者가 두어졌다. 외국의 賓客들을 맞아들이는 사무를 관장했으며, 員 七十人, 秩 比六百石이었다. 또한 少府의 属官 가운데 中書谒者라는 것이 있었는데, 成帝 때에 中書閼者令을 中閼者令으로 고쳤다. 官銜에 ‘中’字가 있어서 宦官들이 그 직책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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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차(竺次)를 파견했는데 기문(期門)주 005
각주 005)
期門 : 『漢書』 「百官公卿表」에 “期門은 병사를 관장하며 [황제를] 호송하며 따라간다. 武帝 建元 3년에 初置되었으며 郎에 준한다. 정원은 없고, 많은 경우 천 명에 이르기도 한다. 僕射가 있고 秩은 比千石이다. 平帝 元始元年에 虎賁郎으로 개명했으며, [虎賁]中郎將을 두었으니, 秩은 比二千石이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즉 期門과 羽林은 모두 漢代 宮廷의 禁軍을 관할하던 직책이었는데, 期門은 宿衛兵을 관장하고 皇帝를 따라 微行하였기 때문에 “期諸殿門”이라는 말의 준말이다. 平帝 때에 虎賁으로 改名했는데 이는 “若虎賁獸”의 준말로 그 용맹함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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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연수(甘延壽)를 그의 부관으로 삼아서, 풍부인을 [호송해서] 보내도록 하였다. 풍부인은 비단으로 장식되고 지절이 달린 수레를 타고 갔다. 오취도로 하여금 적곡성장라후를 찾아가서 원귀미를 대곤미(大昆彌)로 추대하고, 오취도는 소곤미(小昆彌)로 삼으며, 모두에게 인수(印綬)를 하사하는 조칙을 보냈다. 파강장군은 변경의 관문을 나가지 않고 돌아왔다. 후일 오취도가 여러 흡후들에게 백성들을 모두 돌려주지 않자, 한나라는 다시 장라후 상혜로 하여금 삼교(三校)주 006
각주 006)
三校 : 校는 漢代 軍事編制의 단위이며 校尉는 그 지휘관이다. 전국 말기에 이미 校尉라는 명칭이 보이며, 秦代에는 中級軍官이었다. 한 무제는 長安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中壘․屯騎․步兵․越騎․長水․胡騎․射聲․虎賁 등 八校尉를 두었다. 八校尉의 秩은 모두 二千石이었다. 西域에 두어진 戊校尉․己校尉도 이에 준해서 설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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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이끌고 적곡성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 백성과 경계를 분별케 했더니, 대곤미의 호구가 6만여였고, 소곤미의 호가 4만여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마음은 모두 소곤미를 추종하였다.주 007
각주 007)
한나라가 오손을 大․小昆彌에 의해서 分治되는 兩部로 나눈 시점이 甘露 2년(전52) 四月 이후라는 사실이 최근 발견된 敦煌 懸泉漢簡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확인되었다(袁延勝, 2005 참조). 그 뒤 한나라는 烏孫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漢書』 卷94下 「匈奴傳下」에 따르면 흉노의 內亂으로 말미암아 郅支에게 밀려난 呼韓邪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郅支는 烏孫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小昆彌 烏就屠에게 사신을 보냈는데, 烏就屠는 漢과 呼韓邪의 연합세력이 더 강력하다고 판단하여 郅支의 사신을 살해하고 그 머리를 都護에게 보내는 동시에, 8,000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郅支를 공격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烏就屠는 다시 벌어진 전투에서 匈奴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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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馮嫽 : 解憂公主의 侍者였던 풍료는 본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한나라 조정과 긴밀하게 연락하여 원귀미를 ‘大昆彌’에 앉히는 외교적 활약을 하였다. 宣帝 甘露 3년(전51) 解憂公主가 연로하여 귀국할 때 그녀도 같이 長安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원귀미의 아들 星靡가 怯弱하여 烏孫의 국내정세가 불안하게 되자, 그녀는 다시 황제에게 上書를 올리고 烏孫에 使臣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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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史書 : 漢代에는 歷史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令史가 습득해야 하는 글, 즉 당시 通用되던 隷書를 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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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小號 : 즉 小昆彌의 칭호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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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謁者 : 春秋戰國시대에 처음으로 두어진 관직으로서 군주를 위하여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秦代에도 이를 답습하였고, 특히 漢代에 들어가서는 郎中令의 属官으로 谒者가 두어졌다. 외국의 賓客들을 맞아들이는 사무를 관장했으며, 員 七十人, 秩 比六百石이었다. 또한 少府의 属官 가운데 中書谒者라는 것이 있었는데, 成帝 때에 中書閼者令을 中閼者令으로 고쳤다. 官銜에 ‘中’字가 있어서 宦官들이 그 직책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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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期門 : 『漢書』 「百官公卿表」에 “期門은 병사를 관장하며 [황제를] 호송하며 따라간다. 武帝 建元 3년에 初置되었으며 郎에 준한다. 정원은 없고, 많은 경우 천 명에 이르기도 한다. 僕射가 있고 秩은 比千石이다. 平帝 元始元年에 虎賁郎으로 개명했으며, [虎賁]中郎將을 두었으니, 秩은 比二千石이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즉 期門과 羽林은 모두 漢代 宮廷의 禁軍을 관할하던 직책이었는데, 期門은 宿衛兵을 관장하고 皇帝를 따라 微行하였기 때문에 “期諸殿門”이라는 말의 준말이다. 平帝 때에 虎賁으로 改名했는데 이는 “若虎賁獸”의 준말로 그 용맹함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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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三校 : 校는 漢代 軍事編制의 단위이며 校尉는 그 지휘관이다. 전국 말기에 이미 校尉라는 명칭이 보이며, 秦代에는 中級軍官이었다. 한 무제는 長安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中壘․屯騎․步兵․越騎․長水․胡騎․射聲․虎賁 등 八校尉를 두었다. 八校尉의 秩은 모두 二千石이었다. 西域에 두어진 戊校尉․己校尉도 이에 준해서 설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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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한나라가 오손을 大․小昆彌에 의해서 分治되는 兩部로 나눈 시점이 甘露 2년(전52) 四月 이후라는 사실이 최근 발견된 敦煌 懸泉漢簡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확인되었다(袁延勝, 2005 참조). 그 뒤 한나라는 烏孫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漢書』 卷94下 「匈奴傳下」에 따르면 흉노의 內亂으로 말미암아 郅支에게 밀려난 呼韓邪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郅支는 烏孫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小昆彌 烏就屠에게 사신을 보냈는데, 烏就屠는 漢과 呼韓邪의 연합세력이 더 강력하다고 판단하여 郅支의 사신을 살해하고 그 머리를 都護에게 보내는 동시에, 8,000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郅支를 공격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烏就屠는 다시 벌어진 전투에서 匈奴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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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풍료(馮嫽), 풍부인(馮夫人), 오취도, 정길, 풍부인, 오취도, 오취도, 선제(宣帝), 풍부인, 축차(竺次), 감연수(甘延壽), 풍부인, 풍부인, 오취도, 장라후, 원귀미, 오취도, 오취도, 장라후, 상혜
지명
초나라, 한나라, 오손, 한나라, 적곡성, 한나라, 적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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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귀미( 元貴靡)를 대곤미(大昆彌)로, 오취도(烏就屠)는 소곤미(小昆彌)로 추대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310_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