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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장건이 오손과 맹약을 맺기 위해 하사품을 전달하고 오손에 들어감

  • 국가
    오손국(烏孫國)
처음에 장건이 “오손은 본시 대월지와 함께 돈황[과 기련] 사이에 있었습니다.주 001
각주 001)
이와 유사한 구절들이 『史記』 「大宛列傳」, “始月氏居敦煌․祁連閒” ; 本 「西域傳」, “本居敦煌․祁連閒” ; 『漢書』 「李廣利․張騫傳」, “昆莫父難兜靡本與大月氏俱在祁連․敦煌間” 등에 보이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在敦煌間”은 “在祁連․敦煌間”의 錯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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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오손이 비록 강대하긴 하지만 넉넉한 선물을 주어 불러와서, 동쪽에 있는 고향에 거주토록 하고 [왕에게] 공주를 주어 부인으로 삼게 하며, 더불어 형제[의 협약]을 맺어 흉노를 제어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 말은 「장건전」주 002
각주 002)
『漢書』 卷61 「李廣利․張騫傳」을 가리키며, “天子가 張騫에게 大夏 등의 부류에 관해서 자주 물었는데, 장건이 이미 侯爵을 상실했기 때문에 말하기를 ‘臣이 匈奴에 머무르고 있을 때 烏孫의 王은 昆莫이라 불렸습니다. 昆莫의 父 難兜靡는 본시 大月氏와 함께 祁連․敦煌間에 있었던 小國이었습니다.”의 구절을 지칭한다. “이미 侯爵을 상실했기 때문에” 운운한 것은 烏孫과의 연맹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고 그래서 잃어버린 天子의 총애를 회복하려 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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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다. 무제는 즉시주 003
각주 003)
卽位 : ‘位’는 衍字로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장건이 무제에게 이러한 보고를 올린 것은 그가 즉위하고 나서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이기 때문이다. 한 무제가 즉위한 것은 기원전 141년이고 139년에는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하였다. 장건은 도중에 흉노의 포로가 되어 오랜 세월 그곳에서 보낸 뒤 126년경이 되어서야 비로서 장안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 뒤 그가 烏孫과의 연맹을 제의하여 烏孫에 사신으로 다녀온 것이 언제인가 하는 것이 문제인데, 장건이 霍去病과 함께 원정을 갔다가 돌아온 119년부터, 大行이라는 직함을 부여받은 115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장건이 오손과의 연맹을 주장한 시점도 기원전 119~115년 사이가 될 것이기 때문에, 위의 본문에서 무제가 ‘즉위’한 뒤에 곧 장건에게 烏孫에 가도록 명령한 것처럼 서술된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Hulsewe(1979 : 14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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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에게 명령하여 금과 비단을 갖고 가도록 하였다. 곤막이 장건을 회견하면서 마치 선우(單于)[대하는 듯한] 의례를 취하자,주 004
각주 004)
昆莫見騫如單于禮 : 「大宛列傳」에도 이와 동일한 구절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 Hulsewe(1979 : 145)는 “The K'un-mo received [Chang] Ch'ien with ceremonial such as that [used for receiving] a Shan-yü.”라고 옮겼다. 그런데 顔師古는 이에 대해서 “昆莫이 스스로 單于처럼 행동하였다.”라는 주석을 달았고, 따라서 “昆莫이 張騫을 회견할 때 마치 單于[처럼 행동하며] 의례를 취하였다”라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앞의 본문에서 “전에는 흉노에 복속했었는데 후에 강대해져서” 흉노의 單于에게 朝會가는 것조차 거부할 정도가 된 것을 보면, 한나라의 사신인 張騫에 대해서도 單于-皇帝의 관계에서처럼 ‘對等’한 입장을 취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며, 그런 의미에서 顔師古의 해석도 충분히 수긍이 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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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은 크게 참담해 하면서 “천자께서 하사품을 내리시는데 왕께서 절을 하지 않으니, [나는] 하사품을 [갖고] 돌아가겠다.”주 005
각주 005)
還賜 : 顔注는 “賜物을 갖고 한나라로 돌아간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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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했다. [이에] 곤막이 일어나 절을 하였고 그 밖에 다른 [의례도] 전과 같이하였다.

  • 각주 001)
    이와 유사한 구절들이 『史記』 「大宛列傳」, “始月氏居敦煌․祁連閒” ; 本 「西域傳」, “本居敦煌․祁連閒” ; 『漢書』 「李廣利․張騫傳」, “昆莫父難兜靡本與大月氏俱在祁連․敦煌間” 등에 보이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在敦煌間”은 “在祁連․敦煌間”의 錯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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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漢書』 卷61 「李廣利․張騫傳」을 가리키며, “天子가 張騫에게 大夏 등의 부류에 관해서 자주 물었는데, 장건이 이미 侯爵을 상실했기 때문에 말하기를 ‘臣이 匈奴에 머무르고 있을 때 烏孫의 王은 昆莫이라 불렸습니다. 昆莫의 父 難兜靡는 본시 大月氏와 함께 祁連․敦煌間에 있었던 小國이었습니다.”의 구절을 지칭한다. “이미 侯爵을 상실했기 때문에” 운운한 것은 烏孫과의 연맹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고 그래서 잃어버린 天子의 총애를 회복하려 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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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卽位 : ‘位’는 衍字로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장건이 무제에게 이러한 보고를 올린 것은 그가 즉위하고 나서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이기 때문이다. 한 무제가 즉위한 것은 기원전 141년이고 139년에는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하였다. 장건은 도중에 흉노의 포로가 되어 오랜 세월 그곳에서 보낸 뒤 126년경이 되어서야 비로서 장안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 뒤 그가 烏孫과의 연맹을 제의하여 烏孫에 사신으로 다녀온 것이 언제인가 하는 것이 문제인데, 장건이 霍去病과 함께 원정을 갔다가 돌아온 119년부터, 大行이라는 직함을 부여받은 115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장건이 오손과의 연맹을 주장한 시점도 기원전 119~115년 사이가 될 것이기 때문에, 위의 본문에서 무제가 ‘즉위’한 뒤에 곧 장건에게 烏孫에 가도록 명령한 것처럼 서술된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Hulsewe(1979 : 14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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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昆莫見騫如單于禮 : 「大宛列傳」에도 이와 동일한 구절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 Hulsewe(1979 : 145)는 “The K'un-mo received [Chang] Ch'ien with ceremonial such as that [used for receiving] a Shan-yü.”라고 옮겼다. 그런데 顔師古는 이에 대해서 “昆莫이 스스로 單于처럼 행동하였다.”라는 주석을 달았고, 따라서 “昆莫이 張騫을 회견할 때 마치 單于[처럼 행동하며] 의례를 취하였다”라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앞의 본문에서 “전에는 흉노에 복속했었는데 후에 강대해져서” 흉노의 單于에게 朝會가는 것조차 거부할 정도가 된 것을 보면, 한나라의 사신인 張騫에 대해서도 單于-皇帝의 관계에서처럼 ‘對等’한 입장을 취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며, 그런 의미에서 顔師古의 해석도 충분히 수긍이 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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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還賜 : 顔注는 “賜物을 갖고 한나라로 돌아간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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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장건, 무제, 장건, 장건, 장건
지명
오손, 대월지, 돈황, 기련, 오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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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이 오손과 맹약을 맺기 위해 하사품을 전달하고 오손에 들어감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3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