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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국(烏孫國)에 대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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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손국(烏孫國)
오손국. 대곤미(大昆彌)주 001
각주 001)
大昆彌 : 昆彌의 古音은 kuən-mjie. 『史記』에서는 昆莫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하 본문에서도 보듯이 『漢書』에서는 昆莫․昆靡가 혼용되고 있다. ‘昆莫’에 대한 설명은 『史記』의 註釋 참조. 顔師古는 昆莫을 昆彌라고 표기하게 된 연유에 대해서, 昆莫에서 昆을 취하고 獵驕靡에서 靡를 취했기 때문이며, 彌와 靡는 音이 서로 같아서 후일 昆彌와 昆靡가 통용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大’昆靡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은 甘露元年(전53) 漢이 烏孫을 分治하면서 大․小 昆靡의 구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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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도읍은 적곡성(赤谷城) 주 002
각주 002)
赤谷城 : 余太山(2003 : 112)은 이 말이 고대 중국의 少昊의 거처인 暘谷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즉 暘은 ‘밝다’는 뜻으로 동쪽 골짜기에 해가 뜨면서 밝아지기 때문에 暘谷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이것이 곧 赤谷과 같으며, 위치상으로는 이식 쿨 호 동남쪽 나린(Narin)河 상류역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淸代의 徐松 역시 이 말을 意譯으로 간주하여 악수(Aqsu) 북쪽의 北鹽이라는 산이 붉은색이기 때문에 ‘赤谷’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Hulsewe(1979 : 143)는 赤谷이라는 말은 意譯이라기보다는 音譯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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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장안에서 8,900리 떨어져 있다.주 003
각주 003)
余太山(2005 : 153)은 8,900里라는 숫자가 姑墨國에서 長安까지가 8,150里, 烏孫에서 姑墨까지가 7日半 行程(750리)이기 때문에 생겨난 숫자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赤谷에서 都護의 治所까지는 동쪽으로 7,021리, 姑墨城에서 都護의 治所까지는 동쪽으로 2,021리라는 기사를 고려할 때, 赤谷에서 姑墨까지의 거리는 5,000리(50日程)에 이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赤谷에서 長安까지의 8,900리라는 숫자는 姑墨을 媒介로 산출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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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는 120,000, 인구는 630,000, 병사는 188,800명이다.주 004
각주 004)
『漢書』 「西域傳」에 기재된 각국의 戶口資料가 정확하게 언제 작성된 것이냐에 대해서는 학계에 일치된 견해가 없는 상황이다. 西域都護가 初置된 직후인 甘露 4년(전50)으로 보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漢書』 「地理志」에 기재된 戶口數가 작성된 것과 같은 해 즉 元始 2년(후2)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 역시 개연성이 희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에는 成帝 永始 2년(전15) 혹은 永始 3년(전14)에 작성된 것이라는 가설도 제시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錢伯泉 (1982)․袁延勝 (200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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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相)과 대록(大祿)주 005
각주 005)
相, 大祿 : 원문에는 다른 도시국가의 官制를 설명할 때처럼 ‘相大祿 各一人’이라고 명시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相大祿’ 전체를 하나의 관직명으로 볼 수도 있으나, 뒤에서 大祿이라는 직명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相과 大祿”으로 해석하였다. 相은 물론 중국식 관제에서 최고위직에 해당하는 것이고, 大祿은 烏孫 고유의 職名으로 보인다. 『史記』 「大宛列傳」에는 張騫이 烏孫을 방문했을 당시 昆莫의 아들로 ‘大祿彊’이라는 인물이 부친에 대하여 반기를 들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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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고, 좌대장과 우대장 [각 1명씩] 2명이 있으며, 후(侯) 3명,주 006
각주 006)
侯三人 : 侯는 원래 周代에 公․侯․伯․子․男이라는 五等爵 가운데 하나였는데, 秦代를 거쳐 漢代로 들어온 뒤 宗室․外戚․功臣들에게 封爵하는 칭호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여기서도 漢式 職名인 ‘侯’를 소지한 3명이 두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하지만, Hulsewe(1979 : 144)는 烏孫에 당연히 있어야 할 翕侯라는 직명이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하면서, ‘侯三人’이라는 말은 錯簡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 여기에 보이는 ‘侯’는 사실 翕侯에 관한 언급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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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과 도위 각 1명, 대감(大監)주 007
각주 007)
大監 : 漢代 中國에는 보이지 않는 官名이며 烏孫國에만 보이고 있고, 職能은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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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 대리(大吏)주 008
각주 008)
大吏 : 戰國․秦漢代에는 고급 관리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職能인지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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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 사중대리(舍中大吏) 2명, 기군(騎君)주 009
각주 009)
騎君 : 때로는 左右로 별도의 騎君이 두어지기도 하며, 西域의 11개국에 모두 21명의 騎君이 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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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이 있다. 동쪽으로 7,021리 가면 도호주 100
각주 100)
都護 : 西域都護가 언제 처음으로 설치되었느냐, 즉 初置問題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심하게 엇갈리고 있는데,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 說이 있다. ①地節 2년(전68)說인데 이는 『漢書』 「百官表」에 “西域都護는 加官이며, 宣帝 地節二年에 初置되었다.”라는 기사에 근거한 것이다. ②神爵 2年(전60)說인데 이는 『資治通鑑』 卷26에서 神爵二年條에 “鄭吉이 車師를 공파하고 日逐王을 투항케 하니 그 위세가 西域을 떨게 하였다. 마침내 護車師以西北道하게 하니 이런 연유로 都護라고 칭하게 된 것이며, 都護의 설치는 鄭吉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기사를 위시하여, 여러 학자들의 考證에 기초를 두고 있다. ③神爵 3년(전59)說인데 이는 『漢書』 「西域傳」 본문에서 “그 후 日逐王이 선우에게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이끌고 투항해 오니…… 그 해는 神爵 3년(전59)이었다. 이에 정길로 하여금 護車師以西北道하게 했고, 그런 연유로 都護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도호의 시초는 정길에서부터 두어지기 시작한 것이다.”라는 기사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논란에 관해서는 劉洪波(1986)․劉國防(2002)․李炳泉(2003) 등을 참조. 또 한 가지 都護와 관련된 문제는 그 정식 職名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漢書』 「百官志」에도 명시되었듯이 西域都護는 처음에는 ‘加官’에 불과했지 ‘本官’은 아니었다. 즉 鄭吉의 本官은 騎都尉였는데 여기에 西域都護가 추가되어 ‘西域都護騎都尉’로 불렸던 것이고, 예를 들어 甘延壽는 郎中․諫大夫가 本官이었고, 段會宗은 光祿大夫가 本官이었다. 그런데 많은 경우 西域都護 뒤에 騎都尉가 병칭되는 것을 두고 ‘西域都護騎都尉’가 하나의 고정된 관직명인 것처럼 오해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騎都尉는 서역도호가 되기 위해 반드시 구비해야 할 本官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처음에 이처럼 ‘加官’에 불과했던 ‘西域都護’라는 관명은 前漢 말기, 구체적으로 말하면 成帝(전32~전7) 때부터 그 자체가 고정된 하나의 ‘本官’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李大龍 (1991)․李炳泉(2003 : 69-7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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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치소에 이르고, 서쪽으로 5,000리 가면 강거의 영내[蕃內]주 011
각주 011)
蕃內 : 이 표현은 이미 앞에서 康居國條에서도 나왔다. 고유명사로 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領內’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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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른다. 땅은 풀이 많고 평평하며,주 012
각주 012)
莽平 : 本書 앞의 烏弋山離國條에도 “烏弋地暑熱莽平”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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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내리고 춥다. 산에는 소나무와 느릎나무[樠]주 013
각주 013)
顔注에 의하면 “樠은 나무 이름이고, 그 속은 소나무와 비슷하다.” Karlgren(1972 : 183e)은 이것을 느릎나무(elm)의 일종으로 보았다. 『漢語大詞典』에 따르면 『左傳』 庄公四年條에 “王遂行, 卒於樠木之下.”라는 기사가 보이며, 明代 徐光啓는 『農政全書』(卷一)에서 “其地不乾, 其草如茅與走, 其木乃樠.”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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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많다. 사람들은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심지 않고, 가축을 따라 수초를 찾아다니며, 흉노와 풍속이 같다. 나라에는 말이 많아서 부자는 4~5천 필을 소유한다. 사람들은 [성질이] 강퍅하고 탐심이 많으며 신의가 없고, 약탈과 도적질을 많이 한다. 아주 강한 나라이다. 전에는 흉노에 복속했었는데 후에 강대해져서, 비록 통제[羈縻]를 받기는 하지만 조회(朝會)주 014
각주 014)
朝會 : 「大宛列傳」의 註釋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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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가려고 하지 않는다. 동쪽으로는 흉노, 서북쪽으로는 강거, 서쪽으로는 대완, 남쪽으로는 성곽으로 된 여러 나라와 서로 접하고 있다. 본래 색(塞)의 땅주 015
각주 015)
종족명 ‘塞’에 대해서는 前揭 주석 참조. 여기서 ‘塞地’는 天山山脈 북방에 있는 이리 강과 추(Chu) 강 유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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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는데, 대월지가 서쪽으로 색왕(塞王)을 패주시키자 색왕이 남쪽으로 현도(縣度) 주 016
각주 016)
縣度 : 前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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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건너가 버리니, 대월지가 그 땅에 거주하게 되었다. 후에 오손의 곤막이 대월지를 격파하니, 대월지가 서쪽으로 이주하여 대하를 신하로 삼았고, 오손의 곤막이 그곳에 살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말미암아 “오손 사람들 중에는 색종과 대월지종이 [섞여]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주 017
각주 017)
顔注는 “오손은 서역의 여러 이민족들 가운데에서도 그 외모가 가장 기이하다. 오늘날의 胡人들은 눈이 파랗고 수염이 붉어서 그 모습이 마치 원숭이처럼 생겼는데, 본디 그 종족이었다.”라고 하여, 烏孫人들의 외모가 唐代의 胡人 즉 소그드(Soghd)인들과 유사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사실 烏孫과 大月氏와 塞은 모두 인도․이란 계통에 속하는 종족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런 면에서 동일한 계통의 소그드인들과 외적인 유사성을 가졌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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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大昆彌 : 昆彌의 古音은 kuən-mjie. 『史記』에서는 昆莫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하 본문에서도 보듯이 『漢書』에서는 昆莫․昆靡가 혼용되고 있다. ‘昆莫’에 대한 설명은 『史記』의 註釋 참조. 顔師古는 昆莫을 昆彌라고 표기하게 된 연유에 대해서, 昆莫에서 昆을 취하고 獵驕靡에서 靡를 취했기 때문이며, 彌와 靡는 音이 서로 같아서 후일 昆彌와 昆靡가 통용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大’昆靡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은 甘露元年(전53) 漢이 烏孫을 分治하면서 大․小 昆靡의 구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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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赤谷城 : 余太山(2003 : 112)은 이 말이 고대 중국의 少昊의 거처인 暘谷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즉 暘은 ‘밝다’는 뜻으로 동쪽 골짜기에 해가 뜨면서 밝아지기 때문에 暘谷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이것이 곧 赤谷과 같으며, 위치상으로는 이식 쿨 호 동남쪽 나린(Narin)河 상류역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淸代의 徐松 역시 이 말을 意譯으로 간주하여 악수(Aqsu) 북쪽의 北鹽이라는 산이 붉은색이기 때문에 ‘赤谷’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Hulsewe(1979 : 143)는 赤谷이라는 말은 意譯이라기보다는 音譯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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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余太山(2005 : 153)은 8,900里라는 숫자가 姑墨國에서 長安까지가 8,150里, 烏孫에서 姑墨까지가 7日半 行程(750리)이기 때문에 생겨난 숫자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赤谷에서 都護의 治所까지는 동쪽으로 7,021리, 姑墨城에서 都護의 治所까지는 동쪽으로 2,021리라는 기사를 고려할 때, 赤谷에서 姑墨까지의 거리는 5,000리(50日程)에 이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赤谷에서 長安까지의 8,900리라는 숫자는 姑墨을 媒介로 산출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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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漢書』 「西域傳」에 기재된 각국의 戶口資料가 정확하게 언제 작성된 것이냐에 대해서는 학계에 일치된 견해가 없는 상황이다. 西域都護가 初置된 직후인 甘露 4년(전50)으로 보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漢書』 「地理志」에 기재된 戶口數가 작성된 것과 같은 해 즉 元始 2년(후2)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 역시 개연성이 희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에는 成帝 永始 2년(전15) 혹은 永始 3년(전14)에 작성된 것이라는 가설도 제시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錢伯泉 (1982)․袁延勝 (200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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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相, 大祿 : 원문에는 다른 도시국가의 官制를 설명할 때처럼 ‘相大祿 各一人’이라고 명시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相大祿’ 전체를 하나의 관직명으로 볼 수도 있으나, 뒤에서 大祿이라는 직명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相과 大祿”으로 해석하였다. 相은 물론 중국식 관제에서 최고위직에 해당하는 것이고, 大祿은 烏孫 고유의 職名으로 보인다. 『史記』 「大宛列傳」에는 張騫이 烏孫을 방문했을 당시 昆莫의 아들로 ‘大祿彊’이라는 인물이 부친에 대하여 반기를 들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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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侯三人 : 侯는 원래 周代에 公․侯․伯․子․男이라는 五等爵 가운데 하나였는데, 秦代를 거쳐 漢代로 들어온 뒤 宗室․外戚․功臣들에게 封爵하는 칭호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여기서도 漢式 職名인 ‘侯’를 소지한 3명이 두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하지만, Hulsewe(1979 : 144)는 烏孫에 당연히 있어야 할 翕侯라는 직명이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하면서, ‘侯三人’이라는 말은 錯簡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 여기에 보이는 ‘侯’는 사실 翕侯에 관한 언급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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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大監 : 漢代 中國에는 보이지 않는 官名이며 烏孫國에만 보이고 있고, 職能은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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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大吏 : 戰國․秦漢代에는 고급 관리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職能인지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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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騎君 : 때로는 左右로 별도의 騎君이 두어지기도 하며, 西域의 11개국에 모두 21명의 騎君이 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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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0)
    都護 : 西域都護가 언제 처음으로 설치되었느냐, 즉 初置問題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심하게 엇갈리고 있는데,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 說이 있다. ①地節 2년(전68)說인데 이는 『漢書』 「百官表」에 “西域都護는 加官이며, 宣帝 地節二年에 初置되었다.”라는 기사에 근거한 것이다. ②神爵 2年(전60)說인데 이는 『資治通鑑』 卷26에서 神爵二年條에 “鄭吉이 車師를 공파하고 日逐王을 투항케 하니 그 위세가 西域을 떨게 하였다. 마침내 護車師以西北道하게 하니 이런 연유로 都護라고 칭하게 된 것이며, 都護의 설치는 鄭吉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기사를 위시하여, 여러 학자들의 考證에 기초를 두고 있다. ③神爵 3년(전59)說인데 이는 『漢書』 「西域傳」 본문에서 “그 후 日逐王이 선우에게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이끌고 투항해 오니…… 그 해는 神爵 3년(전59)이었다. 이에 정길로 하여금 護車師以西北道하게 했고, 그런 연유로 都護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도호의 시초는 정길에서부터 두어지기 시작한 것이다.”라는 기사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논란에 관해서는 劉洪波(1986)․劉國防(2002)․李炳泉(2003) 등을 참조. 또 한 가지 都護와 관련된 문제는 그 정식 職名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漢書』 「百官志」에도 명시되었듯이 西域都護는 처음에는 ‘加官’에 불과했지 ‘本官’은 아니었다. 즉 鄭吉의 本官은 騎都尉였는데 여기에 西域都護가 추가되어 ‘西域都護騎都尉’로 불렸던 것이고, 예를 들어 甘延壽는 郎中․諫大夫가 本官이었고, 段會宗은 光祿大夫가 本官이었다. 그런데 많은 경우 西域都護 뒤에 騎都尉가 병칭되는 것을 두고 ‘西域都護騎都尉’가 하나의 고정된 관직명인 것처럼 오해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騎都尉는 서역도호가 되기 위해 반드시 구비해야 할 本官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처음에 이처럼 ‘加官’에 불과했던 ‘西域都護’라는 관명은 前漢 말기, 구체적으로 말하면 成帝(전32~전7) 때부터 그 자체가 고정된 하나의 ‘本官’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李大龍 (1991)․李炳泉(2003 : 69-7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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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蕃內 : 이 표현은 이미 앞에서 康居國條에서도 나왔다. 고유명사로 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領內’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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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莽平 : 本書 앞의 烏弋山離國條에도 “烏弋地暑熱莽平”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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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顔注에 의하면 “樠은 나무 이름이고, 그 속은 소나무와 비슷하다.” Karlgren(1972 : 183e)은 이것을 느릎나무(elm)의 일종으로 보았다. 『漢語大詞典』에 따르면 『左傳』 庄公四年條에 “王遂行, 卒於樠木之下.”라는 기사가 보이며, 明代 徐光啓는 『農政全書』(卷一)에서 “其地不乾, 其草如茅與走, 其木乃樠.”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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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朝會 : 「大宛列傳」의 註釋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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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종족명 ‘塞’에 대해서는 前揭 주석 참조. 여기서 ‘塞地’는 天山山脈 북방에 있는 이리 강과 추(Chu) 강 유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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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縣度 : 前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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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顔注는 “오손은 서역의 여러 이민족들 가운데에서도 그 외모가 가장 기이하다. 오늘날의 胡人들은 눈이 파랗고 수염이 붉어서 그 모습이 마치 원숭이처럼 생겼는데, 본디 그 종족이었다.”라고 하여, 烏孫人들의 외모가 唐代의 胡人 즉 소그드(Soghd)인들과 유사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사실 烏孫과 大月氏와 塞은 모두 인도․이란 계통에 속하는 종족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런 면에서 동일한 계통의 소그드인들과 외적인 유사성을 가졌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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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지명
오손국, 적곡성(赤谷城), 장안, 강거, 강거, 대완, 대월지, 현도(縣度), 대월지, 오손, 대월지, 대월지, 대하, 오손, 오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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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국(烏孫國)에 대한 소개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3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