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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거국(康居國)에 대한 소개

  • 국가
    강거국(康居國)
강거국(康居國).주 001
각주 001)
康居에 대해서는 「大宛列傳」 康居國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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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도읍은 낙월익(樂越匿) 주 002
각주 002)
樂越匿 : 사본에 따라 ‘樂越慝’으로도 표기. 그러나 樂은 衍字이고, 匿이 정확한 표기로 추정. Pelliot에 따르면 越匿(jiwɐt-niək)은 隋唐代 문헌에 보이는 越諾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Hulsewé, 1979 : 124-125). Laufer는 開元 연간(713~741)에 康國에서 보내온 물품 가운데 越諾布가 포함되어 있었고, 『宋史』에서 越諾은 아랍인들의 수출품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越과 諾은 각각 ‘비단 직물’을 뜻하는 vala와 nak이라는 단어를 옮긴 것으로 추정했다(Laufer, 1919 : 493-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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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이다. 비전성(卑闐城) 주 003
각주 003)
卑闐(pjiə-d’ien) : 『漢書』 卷70 「陳湯傳」에 “溫宿國을 출발하여 北道를 따라 赤谷에 들어가고, 烏孫을 지나 康居의 경계를 지나면 闐池의 西쪽에 이르게 된다.”라는 구절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康居 변경 지역에 闐池라는 호수가 있고 卑闐도 그 부근의 도시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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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는 ……주 004
각주 004)
문장에 脫字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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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장안에서 12,300리 떨어져 있다. 도호에 복속하지 않는다. 월익(越匿) 지방까지 말을 타고 7일 거리이며, 왕의 여름 거처가 있는 영내[蕃內]주 005
각주 005)
蕃內 : 이 단어를 뜻으로 새겨서 ‘蕃國의 領內’로 본다면 “왕의 여름 거처는 나라의 영내에 있으며”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고유명사(古音은 b’iwɐn-nâp)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예를 들어 Herrmann은 蕃內를 파르티아 북부에 있는 Parni로 추정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왕은 매년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우면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데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顔注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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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는 9,104리이다. 호수는 12만, 인구는 60만, 병사는 12만 명이다. 동쪽으로 5,550리 가면 도호의 치소에 이른다. 대월지와 풍속이 같고, 동쪽으로 흉노의 견제를 받고 있다. 선제(宣帝) 때에 흉노에 난리가 벌어져주 006
각주 006)
기원전 60년에 일어난 흉노의 내분과 五單于의 쟁립에 대해서는 前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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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우(五單于)주 007
각주 007)
五單于 : 즉 呼韓邪單于, 屠耆單于(日逐王 薄胥堂), 呼揭單于(呼揭王), 車犂單于(薁鞮王), 烏籍單于(烏籍都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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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쟁립했다. 한나라호한야(呼韓邪)를 옹립하자, 질지(郅支)선우는 원망을 품고 한나라 사신을 살해하고 서쪽으로 강거[와의 교통]을 막았다. 그 후 도호 감연수(甘延壽) 주 008
각주 008)
甘延壽 : 『漢書』 卷70에 立傳. 北地 郁郅(현재 甘肅 慶陽)人. 字는 君況. 어려서 騎射에 능숙하여 羽林이 되고 期門이 되었다가 遼東太守로 승진했으며, 후에 西域都護․騎都尉가 되었다. 元帝 建昭 3년(전36)에, 西域副校尉 陳湯과 함께 矯制하여 서역의 城郭諸國兵과 車師戊己校尉屯田의 吏士들을 징발하여 康居로 진격하여 匈奴의 郅支單于를 살해하였다. 義成侯에 봉해졌고, 후에 長水校尉, 城門校尉, 護軍校尉 등을 역임했으며, 전25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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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교위(副校尉) 진탕(陳湯) 주 009
각주 009)
陳湯 : 『漢書』 卷70에 立傳. 山陽 瑕丘(현재 山東 袞州 東北)人. 字는 子公. 元帝 때 郞이 되었고 여러 차례 사신으로 외국에 파견되었다. 당시 흉노의 郅支單于가 康居를 복속시키고 烏孫․大宛 등을 공략하자, 建昭 3년(전36) 矯制하여 甘延壽와 함께 康居로 진격하여 郅支를 주살했다. 關內侯에 봉해졌고 射成校尉에 임명되었다. 成帝 초에 승상 匡衡이 그가 과거에 矯制하여 出征한 것과 康居의 財物을 私取한 것을 彈劾하여 免職되었다. 또한 그는 康居에서 보낸 侍子가 왕의 實子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조사 결과 實子임이 밝혀진 일도 있었다. 鴻嘉 2년(전19) 成帝가 昌陵을 廢罷하는 조칙을 내렸을 때 오히려 徙民實陵을 주장하다가 탄핵을 받아 庶人으로 강등되었으며, 전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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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기교위와 서역제국의 병사를 보내어 강거에 이르러 질지선우를 주살했는데, 그 이야기는 감연수전과 진탕전에 나와 있다. 그 해는 원제(元帝) 건소(建昭) 3년(전36)이었다. 성제 때에 이르러 강거가 아들을 보내 한나라에 근시케 하고 공물을 바쳤다. 그러나 스스로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여 홀로 교만하여 다른 나라들처럼 [한나라와의] 관계를 갖기를 원치 않았다. 도호 곽순(郭舜) 주 100
각주 100)
郭舜 : 永始 2년(전15)에서 元延元年(전12)까지 西域都護를 역임했다. 『漢書』 卷70에 “郭舜은 청렴하고 공평한 것으로 유명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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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여러 차례 황상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본디 흉노가 강성했을 때 그것은 오손강거의 고토를 모두 겸병했기 때문이 아니며, 그들이 [한나라에] 신첩(臣妾)이라고 칭했을 때에도 그 두 나라를 잃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나라가 비록 그들 모두로부터 질자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세 나라는 내적으로 서로 물자를 주고받으며 전과 마찬가지로 교통하고 있고, 또한 서로 틈을 살피다가 적절한 기회가 오면 공격합니다. 그들은 연합해도 서로 믿지 못하고, 떨어져도 서로 복속케 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상황]을 말하자면 오손과 혼인을 통한 결연은 끝내 유익하지 못한 채 오히려 중국에 어려움만 줄 것입니다. 그러나 오손은 과거에 이미 결연을 맺었었고, 지금 흉노와 함께 칭신을 하니, 도의상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강거는 교만하고 간사하여 끝내주 011
각주 011)
顔注 : “訖은 竟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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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사신을 받들려 하지 않습니다. 도호의 관리가 그 나라에 도착하면 오손과 여러 [나라의] 사신들보다 더 아랫자리에 앉히고, 왕과 귀족들이 먼저 먹고 마시기를 다한 연후에 도호의 관리에게 먹고 마시도록 합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들은 눈치보면서] 살필 것이 없다는 것을 이웃나라에게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은 무슨 연유로 아들을 보내 입시(入侍)케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교역을 원하여 그럴싸한 말로 속이는 것입니다. 흉노는 수많은 야만인들 가운데 대국주 012
각주 012)
百蠻大國 : 顔注 : “百蠻 가운데 가장 大國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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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도 오늘날 한나라를 모시는 것이 심히 예절을 갖추었는데,주 013
각주 013)
전51년 呼韓邪의 入朝稱臣을 일컫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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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거가 절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듣는다면 이는 선우로 하여금 스스로 비하의 느낌을 갖게 할 것이니,주 014
각주 014)
顔注 : “單于는 康居가 漢을 모시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康居)은 높아지고 자신은 漢를 모심으로 크게 낮아지니, [이제까지 漢에 대해서 품던] 생각을 바꾸려 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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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강거의] 질자를 돌려보내고 관계를 단절하여 다시는 사신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한나라 황실[漢家]이 무례한 나라와는 통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줘야 합니다. 돈황·주천 등의 작은 군들과 남도(南道)의 여덟 나라는 사신과 왕래하는 사람·말·나귀·낙타에게 식량을 공급하느라 모두들 고생을 합니다. 경유하는 곳들은 고갈되고 소모되니, [이렇게 해서] 교만하고 간사한 아주 먼 나라 [사신들]을 영접하고 배웅하는 것은 온당한 계책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나라는 [강거와의 관계가] 새로 열렸다는 점주 015
각주 015)
康居와의 관계가 오랫동안 두절되었다가 成帝 때에 侍子를 보냄으로써 관계가 회복된 사실을 일컫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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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고려하고 또 먼 곳의 사람들을 초치하는 것을 중시하여, 끝내 기미[로써 견제]할 뿐 [관계를] 단절하지는 않았다.

  • 각주 001)
    康居에 대해서는 「大宛列傳」 康居國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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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樂越匿 : 사본에 따라 ‘樂越慝’으로도 표기. 그러나 樂은 衍字이고, 匿이 정확한 표기로 추정. Pelliot에 따르면 越匿(jiwɐt-niək)은 隋唐代 문헌에 보이는 越諾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Hulsewé, 1979 : 124-125). Laufer는 開元 연간(713~741)에 康國에서 보내온 물품 가운데 越諾布가 포함되어 있었고, 『宋史』에서 越諾은 아랍인들의 수출품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越과 諾은 각각 ‘비단 직물’을 뜻하는 vala와 nak이라는 단어를 옮긴 것으로 추정했다(Laufer, 1919 : 493-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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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卑闐(pjiə-d’ien) : 『漢書』 卷70 「陳湯傳」에 “溫宿國을 출발하여 北道를 따라 赤谷에 들어가고, 烏孫을 지나 康居의 경계를 지나면 闐池의 西쪽에 이르게 된다.”라는 구절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康居 변경 지역에 闐池라는 호수가 있고 卑闐도 그 부근의 도시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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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문장에 脫字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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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蕃內 : 이 단어를 뜻으로 새겨서 ‘蕃國의 領內’로 본다면 “왕의 여름 거처는 나라의 영내에 있으며”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고유명사(古音은 b’iwɐn-nâp)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예를 들어 Herrmann은 蕃內를 파르티아 북부에 있는 Parni로 추정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왕은 매년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우면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데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顔注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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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기원전 60년에 일어난 흉노의 내분과 五單于의 쟁립에 대해서는 前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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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五單于 : 즉 呼韓邪單于, 屠耆單于(日逐王 薄胥堂), 呼揭單于(呼揭王), 車犂單于(薁鞮王), 烏籍單于(烏籍都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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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甘延壽 : 『漢書』 卷70에 立傳. 北地 郁郅(현재 甘肅 慶陽)人. 字는 君況. 어려서 騎射에 능숙하여 羽林이 되고 期門이 되었다가 遼東太守로 승진했으며, 후에 西域都護․騎都尉가 되었다. 元帝 建昭 3년(전36)에, 西域副校尉 陳湯과 함께 矯制하여 서역의 城郭諸國兵과 車師戊己校尉屯田의 吏士들을 징발하여 康居로 진격하여 匈奴의 郅支單于를 살해하였다. 義成侯에 봉해졌고, 후에 長水校尉, 城門校尉, 護軍校尉 등을 역임했으며, 전25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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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陳湯 : 『漢書』 卷70에 立傳. 山陽 瑕丘(현재 山東 袞州 東北)人. 字는 子公. 元帝 때 郞이 되었고 여러 차례 사신으로 외국에 파견되었다. 당시 흉노의 郅支單于가 康居를 복속시키고 烏孫․大宛 등을 공략하자, 建昭 3년(전36) 矯制하여 甘延壽와 함께 康居로 진격하여 郅支를 주살했다. 關內侯에 봉해졌고 射成校尉에 임명되었다. 成帝 초에 승상 匡衡이 그가 과거에 矯制하여 出征한 것과 康居의 財物을 私取한 것을 彈劾하여 免職되었다. 또한 그는 康居에서 보낸 侍子가 왕의 實子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조사 결과 實子임이 밝혀진 일도 있었다. 鴻嘉 2년(전19) 成帝가 昌陵을 廢罷하는 조칙을 내렸을 때 오히려 徙民實陵을 주장하다가 탄핵을 받아 庶人으로 강등되었으며, 전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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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0)
    郭舜 : 永始 2년(전15)에서 元延元年(전12)까지 西域都護를 역임했다. 『漢書』 卷70에 “郭舜은 청렴하고 공평한 것으로 유명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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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顔注 : “訖은 竟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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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百蠻大國 : 顔注 : “百蠻 가운데 가장 大國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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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전51년 呼韓邪의 入朝稱臣을 일컫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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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顔注 : “單于는 康居가 漢을 모시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康居)은 높아지고 자신은 漢를 모심으로 크게 낮아지니, [이제까지 漢에 대해서 품던] 생각을 바꾸려 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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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康居와의 관계가 오랫동안 두절되었다가 成帝 때에 侍子를 보냄으로써 관계가 회복된 사실을 일컫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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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선제(宣帝), 호한야(呼韓邪), 질지(郅支), 감연수(甘延壽), 진탕(陳湯), 질지선우, 원제(元帝), 성제, 곽순(郭舜)
지명
강거국(康居國), 낙월익(樂越匿), 비전성(卑闐城), 장안, 월익(越匿), 대월지,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오손, 강거, 한나라, 한나라, 오손, 오손, 강거, 한나라, 오손, 한나라, 강거, 돈황, 주천, 한나라, 강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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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거국(康居國)에 대한 소개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2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