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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빈국(罽賓國)에 대한 소개

  • 국가
    계빈국(罽賓國)
계빈국(罽賓國).주 001
각주 001)
罽賓(kiäi-pien) : 이미 오래 전에 Levi에 의해서 Kapisi를 音譯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Kapisi는 중국측 자료 가운데 『大唐西域記』와 『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迦畢試, 『冊府元龜』에 訶毗施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罽賓으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罽賓으로 칭해지는 지명이 반드시 한 지역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상이한 지역을 지칭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즉 白鳥庫吉(1917)은 漢代의 罽賓이 간다라를, 隋唐代의 罽賓은 카슈미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大唐西域記』는 카슈미르[迦濕彌邏]에 대해서 “전에 罽賓이라고 했던 것은 잘못”이라고 기록하여 唐代 이전에 카슈미르가 罽賓이라 불리웠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Pulleyblank는 罽賓의 古音이 Kashmir의 프라크리트語形인 *Kaspir를 옮긴 것이며 곧 헤로도투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글에 보이는 그리스 語形 Kaspeiria에 해당된다고 보았고, Hulsewe(1979 : 104)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漢書』의 罽賓은 간다라와 카슈미르를 모두 포함하는 넓은 지역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는 카불에서 동북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Kapisa라는 이름의 省이 있다고 한다(桑山正進, 1992 : 100-101, 115-120). 그러나 Daffinà(1982 : 316-318)는 Pulleyblank의 견해를 비판하며, 엄격하게 말해 罽賓이 前漢 당시에는 지리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인도 북부의 Saka 지역을 지칭하는 정치적인 개념이며, “간다라, 카피시, 펀잡 일부를 포함하지만, 아마 카시미르는 제외되었을 것”이라고 한 Petech(1950 : 64)의 견해를 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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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읍은 순선성(循鮮城) 주 002
각주 002)
循鮮(ziuen-siän) : 『新唐書』 卷221上 「西域上」에는 ‘脩鮮’으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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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장안에서 12,200리 떨어져 있으며,주 003
각주 003)
長安~烏秅 9,950리+烏秅~罽賓 2,250=12,200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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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에게 복속하지 않는다. 호구와 병사가 많으며 큰 나라이다. 동북으로 6,840리 가면 도호의 치소에 이르며, 동쪽으로 2,250 가면 오타국, 동북쪽으로 9일 거리 가면 난두국에 이른다. 서북으로는 대월지, 서남으로는 오익산리와 접한다. 과거에 흉노가 대월지를 격파했을 때, 대월지는 서쪽으로 가서 대하를 지배했는데, [이때] 색왕(塞王)주 004
각주 004)
塞王 : Saka王을 지칭. 흉노의 공격을 받은 大月氏의 西遷으로 인해 당시 중앙아시아 지방에 거주하던 Saka계통의 부족들이 압력을 받고 남하하기 시작하여 아무다리아 강을 건너서 아프가니스탄 지방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던 박트리아(大夏) 왕국을 무너뜨린 사실은 이미 고대 그리스 작가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Strabo는 Asioi, Pasianoi, Tocharoi, Sacarauloi라는 4종족을 언급했고, Trogus Pompeius는 Asiani가 Tokhara인들의 맹주가 되어 Sacaraucae를 정복했다고 기록했다. 많은 학자들이 그리스 측 기록과 중국 측 기록을 정합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이에 관해서는 Tarn(1938 : 269-311)과 Enoki(1959 : 22-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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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남쪽으로 가서 계빈을 지배했다. 색 종족은 나뉘어져 왕왕 여러 나라를 만들었는데,주 005
각주 005)
顔注 : “여러 종류로 갈라졌다는 것도 역시 그들 언어가 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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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륵에서부터 서북쪽으로 휴순·연독 등은 모두 원래 색 종족이었다. 계빈의 토지는 평평하고 온화하며, 목숙(目宿)주 006
각주 006)
目宿 : 『史記』 「大宛列傳』에는 ‘苜蓿’으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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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초와 기이한 나무, 박달나무[檀]·홰나무[櫰]주 007
각주 007)
顔注 : “櫰의 音은 懷이다. 즉 홰나무(槐)의 일종이며, 잎이 크고 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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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나무[梓]·대나무[竹]·옻나무[漆] 등이 있다. 오곡과 포도 및 여러 과일을 심고, 분뇨를 밭에 뿌린다. 토지는 낮고 습하며, 벼를 기르고, 겨울에는 날야채를 먹는다. 그 주민들은 손재주가 좋아서 무늬를 조각하거나 새겨 넣기를 잘하고, 궁전과 가옥을 짓고, 모직물을 짜고 자수를 놓기도 하며, 음식 만들기를 좋아한다. 금·은·동·주석이 있으며 그것으로 그릇을 만들고, 시장에는 [점포가] 늘어서 있다.주 008
각주 008)
市列 : ‘市有列’이 되어야 옳다. 顔注 : “시장에 늘어선 점포가 있는 것이 중국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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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 은으로 화폐를 만드는데, 정면에는 기마상이, 배면에는 사람 얼굴이 있다. 혹이 난 소[封牛]주 009
각주 009)
封牛 : 顔注 : “封牛는 [등] 위가 隆起한 소이다.” zebu 즉 혹소를 가리키며 犎牛로 표기되기도 한다. 『後漢書』 卷6에 “䟽勒國이 師子․封牛를 헌상했다.”라는 구절에 달린 注에 “『東觀記』에는 ‘䟽勒王 盤이 文時라는 사신을 보내 詣闕했다.’라고 하였다. 師子는 호랑이와 비슷한데, 正黃色이고 수염(䫇耏)이 있으며, 꼬리 끝에 무성한 털의 크기가 마치 자루(斗)와 같다. 封牛는 그 목 위에 살이 융기해서 마치 무엇을 쌓아놓은 것(封)과 같기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인데, 곧 오늘날의 峯牛이다.”라는 설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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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소[水牛], 코끼리[象], 큰 개[大狗], 원숭이[沐猴], 공작(孔爵)주 010
각주 010)
孔爵 : 孔雀이라는 표기가 더 일반적이지만 爵이 ‘새’를 의미했던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기원전 61년 신성한 새의 출현을 기리기 위해 神爵이라는 年號가 채택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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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珠璣], 산호(珊瑚), 호박(虎魄), 벽유리(璧流離)주 011
각주 011)
璧流離 : lapis lazuli 즉 靑金石을 가리킨다. 孟康注 : “流離는 青色이고 玉과 비슷하다.” 顔注 : “『魏略』은 ‘大秦國에서는 赤․白․黑․黃․青․綠․縹․紺․紅․紫 등 10종류의 流離가 나온다. 孟康은 青色 [유리]를 말했지만 두루 언급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대저 自然의 산물인데, 색깔이 곱고 빛이 나서 일반적인 玉보다 더 뛰어나지만 그 색깔이 항구적이지 못하다. 지금 세상에서 사용하는 것은 모두 돌가루(石汁)를 녹여서 거기에 여러 약품을 가한 뒤 부어서 만든 것이며, 취약하고 순정하지 못하니 사실 진품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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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생산된다. 다른 가축은 여러 나라와 동일하다.주 012
각주 012)
罽賓의 자연환경과 주민생활 특산품 등에 관해서는 『大唐西域記』와 『往五天竺國傳』의 기록과 비교해 볼 만하다(桑山正進, 1992 : 40, 115-120 ; 정수일, 2004 : 311-318 ; 水谷眞成, 1999 : I, 129-1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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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때 처음으로 계빈과 소통하기 시작한 이후, [계빈은] 자기들이 아주 먼 곳에 있어서 한나라 병사가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왕 오두로(烏頭勞) 주 013
각주 013)
烏頭勞(uo-d’əu-lau) : 확인되지 않은 인물이다. Tarn(1938 : 340-341)은 이 단어가 그리이스어로 ‘兄弟’를 뜻하는 adelphou를 옮긴 것이며, ‘왕의 형제’(adelphou tou basileus)이자 카불 지방의 통치자였던 Spalyris가 바로 烏頭勞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Daffinà(1982 : 319)는 이러한 견해를 비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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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사신을 자주 겁략했다. 오두로가 죽고 아들이 뒤를 이어 즉위하자 사신을 보내어 헌물을 바쳤다. 한나라는 관도위(關都尉)주 014
각주 014)
關都尉 : 秦代에 처음 두어졌다가 後漢代 초기에 폐지된 官名으로 주요한 關門에 배치된 職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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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文忠)으로 하여금 그 사신을 [데리고] 보내도록 했다. 왕이 다시 문충을 해치려고 했는데 문충이 이를 깨닫고 용굴왕(容屈王)의 아들 음말부(陰末 赴) 주 015
각주 015)
容屈(iwong-k’iuət), 陰末赴(iəm-muât-p’iu) : Tarn(1938 : 340-343)은 容屈이 Yonaki 즉 ‘그리스인’을 뜻하고, 陰末赴는 Hermaeus를 音寫한 것이라고 보았다. 즉 카불 지방의 통치자였던 Spalyris[烏頭勞]가 한나라 사신들을 겁략했었고 그가 사망한 뒤 아들 Spalagadames가 뒤를 이었는데, 文忠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스인들의 수령’(容屈王) 즉 Amyntas의 아들인 Hermaeus(陰末赴)와 연맹하여 Kabul을 공격하여 Spalagadames를 죽인 뒤 Hermaeus를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이다. Hermaeus는 인도 서북부를 통치한 마지막 그리스 군주로서 치세는 기원전 90~70년이었으며, 그의 치세에 주조된 銀貨는 전면에 王과 王女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배면에는 기마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왕의 이름은 Ermaiou라고 표기되어 陰末赴와 매우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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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함께 모의하여 계빈을 공격하고 그 왕을 죽인 뒤, 음말부를 계빈왕으로 세우고 인수(印綬)주 016
각주 016)
印綬 : 綬는 도장에 달린 끈을 지칭하는데, 地位의 高下에 따라 그 색깔과 길이가 달랐다. 자세한 내용은 『後漢書』 卷30 「輿服志」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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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주었다. 후에 군후(軍候) 조덕(趙德)계빈에 사신으로 갔는데, 음말부와 서로 사이가 어그러졌다[相失].주 017
각주 017)
相失 : 顔注 : “서로 뜻이 어그러졌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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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말부조덕을 사슬[琅當]주 018
각주 018)
琅當 : 顔注 : “琅當은 長鎖이니, 오늘날 사람을 묶는 사슬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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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묶고, 부사(副使) 이하 70여 명을 살해한 뒤 사신을 보내어 글을 올려 변명을 했다. 효원제(孝元帝) 주 019
각주 019)
元帝 : 治世 전48~전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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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계빈이] 극히 먼 지역이어서 고려하지 않고, 그 사신을 현도에서 놓아주고는 [관계를] 끊고 교통하지 않았다. 성제(成帝) 주 020
각주 020)
成帝 : 治世 전32~전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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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계빈은] 다시 사신을 보내 헌물을 바치며 사죄했고, 한나라는 그 사신을 호송하기 위해 다시 사신을 보내려고 했으나, 두흠(杜欽) 주 021
각주 021)
杜欽 : 南陽 杜衍人. 杜延年의 아들, 字는 子夏. 한쪽 눈이 장님이었으나 어려서 經書를 좋아했다. 그는 大將軍 王鳳의 신임을 받고 그를 위해 자문을 했다. 또한 議郞에 拜受된 후 匈奴의 降臣을 조정이 받아들이지 말 것을 건의하고(전28), 罽賓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전25), 또한 西南夷의 하나인 夜郞에 대한 군사적 원정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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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장군 왕봉(王鳳) 주 022
각주 022)
王鳳 : 魏郡 元城(현재 河北 大名 동쪽)人. 字는 孝卿이며 元帝의 황후 王政君의 兄이었다. 永光 2년(전42) 부친의 뒤를 이어 陰平侯에 봉해졌고, 成帝 즉위 후에는 大司馬大將軍領尙書事에 임명되어 정치를 擅斷하였으니 王氏의 집권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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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에 계빈왕 음말부는 본시 한나라가 세운 사람인데 후에는 마침내 반역을 했습니다. 무릇 나라를 갖고 백성을 자식처럼 대하는 것보다 더 큰 덕은 없고, 사신을 붙잡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계빈이]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 [사신을] 주살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한나라에서]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어 군대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빈은] 구하는 것이 있으면 비굴한 언사를 쓰고, 바라는 것이 없으면 교만하고 방자하니, 결국 [한나라에] 진심으로 복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저 중국이 만이(蠻夷)와 통교하여 후대하고 그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켜 주는 까닭은 [서로] 토지가 가까워[壤比] 노략질당하기 때문입니다.주 023
각주 023)
壤比 : 顔注 : “比는 近의 의미이다. 그 땅이 근접하여 약탈을 당하기 쉬웠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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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현도의 막힘으로 인하여 계빈이 넘어올 수 없으니, 그들이 [한나라를] 향해서 흠모[鄉慕]주 024
각주 024)
鄉慕 : 顔注 : “鄉은 嚮으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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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서역을 안정시키기에는 부족하고, 설령 추종하지 않는다고 해도 [서역의] 성곽(城郭)주 025
각주 025)
城郭 : 顔注 : “城郭은 西域諸國을 총칭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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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태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전에는 [계빈왕이] 직접 반역[逆節]하여 그 포악함이 서역에 드러나[暴],주 026
각주 026)
暴 : 顔注 : “暴은 章露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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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연유로 [한나라는] 절교하고 교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회개하고 [사람들을 보내] 왔지만 [왕의] 친속이나 귀족은 하나도 없고, 헌물을 바치는 자들은 모두 장사하는 천민들이며, 상품을 교환하고 장사를 하려고 할 뿐 헌납한다는 것은 명분일 뿐입니다. 그러니 번거롭게 사신을 보내 현도까지 호송한다는 것은 실(實)을 잃고 기만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됩니다. 대저 사신을 보내 손님을 호송하는 것은 노략의 해를 입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려 함입니다. [그런데 사신들은] 피산의 남쪽부터 시작해서 한나라에 복속하지 않는 4~5개 나라를 지나갑니다[更].주 027
각주 027)
更 : 顔注 : “漢나라에 속하지 않는 4~5나라를 지나간다.” 여기서 更은 ‘지나가다, 통과하다’는 의미이다(예를 들어 『史記』 권123의 “道必更匈奴”와 같은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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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후를 서는 병사 백여 명이 밤을 다섯 [기간]으로 나누어주 028
각주 028)
五分夜 : 顔注 : “밤에는 오경이 있기 때문에 이를 나누어 지킨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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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刀斗]주 029
각주 029)
刀斗 : 『集解』 : “孟康이 말하기를 ‘銅으로 鐎器를 만드는데 한 말(斗)을 담을 만한 크기이고, 낮에는 취사하고 밤에는 그것으로 두드리며 돌아다니는데, 이름하여 刀斗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荀悅은 ‘刀斗는 小鈴이며 宮中에서 사용하는 夜鈴과 같다.’라고 하였다. 蘇林은 ‘형태는 냄비(鋗) 같은데 銅으로 만들었고 테두리(緣)가 없으며 한 말을 담을 만한 크기이므로 刀斗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 냄비(鋗)는 즉 鈴이다. 埤倉이 말하기를 ‘鐎는 溫器이니 자루(柄斗)가 있고 냄비(銚)처럼 테두리가 없는 것이다. 音은 焦이다.’라고 하였다.” 즉 刀斗(刁斗라고도 표기)는 銅으로 만든 三足形 그릇이며 1斗를 담을 정도의 크기. 낮에는 취사용으로 밤에는 두드리며 夜警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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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두드리며 스스로 경비하는데, 아직도 때로는 공격과 도적질을 당합니다. 나귀와 가축과 양식은 여러 나라에서 식량을 제공해 주어야 비로서 충족됩니다.주 030
각주 030)
稟食, 自贍 : 顔注 : “稟은 給의 뜻이고, 贍은 足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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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라가 빈약하고 작아서 식량을 대주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사나워서 공급하지 않으려고 하며, 강력한 한나라의 절(節)을 갖고서도 산곡 사이에서 배를 곯고 구걸하여도 얻는 바가 없으니, 10~20일이 지나면 사람과 가축이 광야에 버려지고 귀환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대두통(大頭痛)·소두통(小頭痛)의 산과, 적토(赤土)·신열(身熱)의 비탈길을 지나면, 사람들은 몸에서 열이 나고 창백해지며, 두통과 구토를 일으키니, 나귀와 가축이 모두 그러합니다. 또한 삼지(三池)주 031
각주 031)
三池 : 『魏書』 卷102 「西域傳」 〈波知國條〉에 “波知國은 鉢和의 西南에 있다. 지방은 협소하고 주민은 가난하여, 山谷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그 王은 능히 다 다스리지 못한다. 三池가 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大池에는 龍王이 있고, 그 다음 [연못에는] 龍婦가 있으며 작은 것에는 龍子가 있어서, 行人이 그곳을 지날 때에는 제사를 바쳐야 지나가지 제사를 바치지 않으면 風雪을 만나 어려움을 겪게 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즉 三池란 波知國에 있는 세 연못인데, 波知는 Zebak(현재 아프가니스탄의 Badakhshan省 소재)로 비정되고 있다(桑山正進, 1992 :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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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반석(盤石)주 032
각주 032)
盤石의 비탈길 :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파미르 협곡의 한 장소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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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비탈길[阪]이 있는데, 길이 좁은 곳은 1척 6~7촌[의 폭]주 033
각주 033)
漢代의 1寸은 2.31cm이므로 1척 6~7촌은 40cm가 채 안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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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길이는 30리나 뻗어있습니다. 험악하고 측량할 수 없는 심연[崢嶸]주 034
각주 034)
崢嶸 : 顔注 : “崢嶸은 깊고 험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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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닿아 있어, 행인들은 말을 탄 사람이건 걷는 사람이건 서로 붙잡고 끈으로 서로 끌면서, 2천여 리를 지나서 비로서 현도에 도달합니다. 가축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 골짜기 반도 내려가기 전에 모두 부서져 버리고,주 035
각주 035)
畜隊, 靡碎 : 顔注 : “隊는 墮의 뜻이고, 靡는 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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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추락하면 서로 거두고 살피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 험하고 위태로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성왕이 구주(九州)를 나누고 오복(五服)을 정한 것주 036
각주 036)
九州, 五服 : 顔注 : “九州는 冀․兗․豫․青․徐․荊․揚․梁․雍. 五服은 侯․甸․綏․要․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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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안을 번성케 하려고 노력한 것이지 밖에서 구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사신을 보내 지존하신 분의 명을 받들어 야만인 출신의 상인들을 호송케 하고, 많은 수의 장교와 사졸을 수고롭게 하여 위험하고 험난한 길을 가게 하는 것은, 믿고 의지해야 할 것 [즉 中國]을 피폐하게 하여 아무 쓸모없는 것 [즉 蠻夷]를 도모하는 것이니,주 037
각주 037)
罷弊所恃以事無用 : 顔注 : “罷는 疲로 읽어야 한다. 所恃는 中國의 주민을 가리키고, 無用은 遠方의 蠻夷의 나라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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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한 계책은 아닙니다. 사신은 이미 절(節)을 받았으니 피산까지만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이에 왕봉은 [황제께] 아뢰어 두흠의 말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계빈은 실제로 [조정의] 상사(賞賜)와 교역[賈市]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했고, 그 사신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왔다.

  • 각주 001)
    罽賓(kiäi-pien) : 이미 오래 전에 Levi에 의해서 Kapisi를 音譯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Kapisi는 중국측 자료 가운데 『大唐西域記』와 『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迦畢試, 『冊府元龜』에 訶毗施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罽賓으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罽賓으로 칭해지는 지명이 반드시 한 지역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상이한 지역을 지칭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즉 白鳥庫吉(1917)은 漢代의 罽賓이 간다라를, 隋唐代의 罽賓은 카슈미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大唐西域記』는 카슈미르[迦濕彌邏]에 대해서 “전에 罽賓이라고 했던 것은 잘못”이라고 기록하여 唐代 이전에 카슈미르가 罽賓이라 불리웠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Pulleyblank는 罽賓의 古音이 Kashmir의 프라크리트語形인 *Kaspir를 옮긴 것이며 곧 헤로도투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글에 보이는 그리스 語形 Kaspeiria에 해당된다고 보았고, Hulsewe(1979 : 104)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漢書』의 罽賓은 간다라와 카슈미르를 모두 포함하는 넓은 지역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는 카불에서 동북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Kapisa라는 이름의 省이 있다고 한다(桑山正進, 1992 : 100-101, 115-120). 그러나 Daffinà(1982 : 316-318)는 Pulleyblank의 견해를 비판하며, 엄격하게 말해 罽賓이 前漢 당시에는 지리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인도 북부의 Saka 지역을 지칭하는 정치적인 개념이며, “간다라, 카피시, 펀잡 일부를 포함하지만, 아마 카시미르는 제외되었을 것”이라고 한 Petech(1950 : 64)의 견해를 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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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循鮮(ziuen-siän) : 『新唐書』 卷221上 「西域上」에는 ‘脩鮮’으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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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長安~烏秅 9,950리+烏秅~罽賓 2,250=12,200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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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塞王 : Saka王을 지칭. 흉노의 공격을 받은 大月氏의 西遷으로 인해 당시 중앙아시아 지방에 거주하던 Saka계통의 부족들이 압력을 받고 남하하기 시작하여 아무다리아 강을 건너서 아프가니스탄 지방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던 박트리아(大夏) 왕국을 무너뜨린 사실은 이미 고대 그리스 작가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Strabo는 Asioi, Pasianoi, Tocharoi, Sacarauloi라는 4종족을 언급했고, Trogus Pompeius는 Asiani가 Tokhara인들의 맹주가 되어 Sacaraucae를 정복했다고 기록했다. 많은 학자들이 그리스 측 기록과 중국 측 기록을 정합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이에 관해서는 Tarn(1938 : 269-311)과 Enoki(1959 : 22-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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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顔注 : “여러 종류로 갈라졌다는 것도 역시 그들 언어가 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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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目宿 : 『史記』 「大宛列傳』에는 ‘苜蓿’으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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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顔注 : “櫰의 音은 懷이다. 즉 홰나무(槐)의 일종이며, 잎이 크고 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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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市列 : ‘市有列’이 되어야 옳다. 顔注 : “시장에 늘어선 점포가 있는 것이 중국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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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封牛 : 顔注 : “封牛는 [등] 위가 隆起한 소이다.” zebu 즉 혹소를 가리키며 犎牛로 표기되기도 한다. 『後漢書』 卷6에 “䟽勒國이 師子․封牛를 헌상했다.”라는 구절에 달린 注에 “『東觀記』에는 ‘䟽勒王 盤이 文時라는 사신을 보내 詣闕했다.’라고 하였다. 師子는 호랑이와 비슷한데, 正黃色이고 수염(䫇耏)이 있으며, 꼬리 끝에 무성한 털의 크기가 마치 자루(斗)와 같다. 封牛는 그 목 위에 살이 융기해서 마치 무엇을 쌓아놓은 것(封)과 같기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인데, 곧 오늘날의 峯牛이다.”라는 설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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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孔爵 : 孔雀이라는 표기가 더 일반적이지만 爵이 ‘새’를 의미했던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기원전 61년 신성한 새의 출현을 기리기 위해 神爵이라는 年號가 채택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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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璧流離 : lapis lazuli 즉 靑金石을 가리킨다. 孟康注 : “流離는 青色이고 玉과 비슷하다.” 顔注 : “『魏略』은 ‘大秦國에서는 赤․白․黑․黃․青․綠․縹․紺․紅․紫 등 10종류의 流離가 나온다. 孟康은 青色 [유리]를 말했지만 두루 언급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대저 自然의 산물인데, 색깔이 곱고 빛이 나서 일반적인 玉보다 더 뛰어나지만 그 색깔이 항구적이지 못하다. 지금 세상에서 사용하는 것은 모두 돌가루(石汁)를 녹여서 거기에 여러 약품을 가한 뒤 부어서 만든 것이며, 취약하고 순정하지 못하니 사실 진품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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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罽賓의 자연환경과 주민생활 특산품 등에 관해서는 『大唐西域記』와 『往五天竺國傳』의 기록과 비교해 볼 만하다(桑山正進, 1992 : 40, 115-120 ; 정수일, 2004 : 311-318 ; 水谷眞成, 1999 : I, 129-1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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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烏頭勞(uo-d’əu-lau) : 확인되지 않은 인물이다. Tarn(1938 : 340-341)은 이 단어가 그리이스어로 ‘兄弟’를 뜻하는 adelphou를 옮긴 것이며, ‘왕의 형제’(adelphou tou basileus)이자 카불 지방의 통치자였던 Spalyris가 바로 烏頭勞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Daffinà(1982 : 319)는 이러한 견해를 비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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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關都尉 : 秦代에 처음 두어졌다가 後漢代 초기에 폐지된 官名으로 주요한 關門에 배치된 職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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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容屈(iwong-k’iuət), 陰末赴(iəm-muât-p’iu) : Tarn(1938 : 340-343)은 容屈이 Yonaki 즉 ‘그리스인’을 뜻하고, 陰末赴는 Hermaeus를 音寫한 것이라고 보았다. 즉 카불 지방의 통치자였던 Spalyris[烏頭勞]가 한나라 사신들을 겁략했었고 그가 사망한 뒤 아들 Spalagadames가 뒤를 이었는데, 文忠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스인들의 수령’(容屈王) 즉 Amyntas의 아들인 Hermaeus(陰末赴)와 연맹하여 Kabul을 공격하여 Spalagadames를 죽인 뒤 Hermaeus를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이다. Hermaeus는 인도 서북부를 통치한 마지막 그리스 군주로서 치세는 기원전 90~70년이었으며, 그의 치세에 주조된 銀貨는 전면에 王과 王女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배면에는 기마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왕의 이름은 Ermaiou라고 표기되어 陰末赴와 매우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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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印綬 : 綬는 도장에 달린 끈을 지칭하는데, 地位의 高下에 따라 그 색깔과 길이가 달랐다. 자세한 내용은 『後漢書』 卷30 「輿服志」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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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相失 : 顔注 : “서로 뜻이 어그러졌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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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琅當 : 顔注 : “琅當은 長鎖이니, 오늘날 사람을 묶는 사슬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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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元帝 : 治世 전48~전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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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成帝 : 治世 전32~전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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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杜欽 : 南陽 杜衍人. 杜延年의 아들, 字는 子夏. 한쪽 눈이 장님이었으나 어려서 經書를 좋아했다. 그는 大將軍 王鳳의 신임을 받고 그를 위해 자문을 했다. 또한 議郞에 拜受된 후 匈奴의 降臣을 조정이 받아들이지 말 것을 건의하고(전28), 罽賓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전25), 또한 西南夷의 하나인 夜郞에 대한 군사적 원정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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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王鳳 : 魏郡 元城(현재 河北 大名 동쪽)人. 字는 孝卿이며 元帝의 황후 王政君의 兄이었다. 永光 2년(전42) 부친의 뒤를 이어 陰平侯에 봉해졌고, 成帝 즉위 후에는 大司馬大將軍領尙書事에 임명되어 정치를 擅斷하였으니 王氏의 집권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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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壤比 : 顔注 : “比는 近의 의미이다. 그 땅이 근접하여 약탈을 당하기 쉬웠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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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鄉慕 : 顔注 : “鄉은 嚮으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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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城郭 : 顔注 : “城郭은 西域諸國을 총칭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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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暴 : 顔注 : “暴은 章露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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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更 : 顔注 : “漢나라에 속하지 않는 4~5나라를 지나간다.” 여기서 更은 ‘지나가다, 통과하다’는 의미이다(예를 들어 『史記』 권123의 “道必更匈奴”와 같은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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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8)
    五分夜 : 顔注 : “밤에는 오경이 있기 때문에 이를 나누어 지킨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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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9)
    刀斗 : 『集解』 : “孟康이 말하기를 ‘銅으로 鐎器를 만드는데 한 말(斗)을 담을 만한 크기이고, 낮에는 취사하고 밤에는 그것으로 두드리며 돌아다니는데, 이름하여 刀斗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荀悅은 ‘刀斗는 小鈴이며 宮中에서 사용하는 夜鈴과 같다.’라고 하였다. 蘇林은 ‘형태는 냄비(鋗) 같은데 銅으로 만들었고 테두리(緣)가 없으며 한 말을 담을 만한 크기이므로 刀斗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 냄비(鋗)는 즉 鈴이다. 埤倉이 말하기를 ‘鐎는 溫器이니 자루(柄斗)가 있고 냄비(銚)처럼 테두리가 없는 것이다. 音은 焦이다.’라고 하였다.” 즉 刀斗(刁斗라고도 표기)는 銅으로 만든 三足形 그릇이며 1斗를 담을 정도의 크기. 낮에는 취사용으로 밤에는 두드리며 夜警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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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0)
    稟食, 自贍 : 顔注 : “稟은 給의 뜻이고, 贍은 足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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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1)
    三池 : 『魏書』 卷102 「西域傳」 〈波知國條〉에 “波知國은 鉢和의 西南에 있다. 지방은 협소하고 주민은 가난하여, 山谷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그 王은 능히 다 다스리지 못한다. 三池가 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大池에는 龍王이 있고, 그 다음 [연못에는] 龍婦가 있으며 작은 것에는 龍子가 있어서, 行人이 그곳을 지날 때에는 제사를 바쳐야 지나가지 제사를 바치지 않으면 風雪을 만나 어려움을 겪게 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즉 三池란 波知國에 있는 세 연못인데, 波知는 Zebak(현재 아프가니스탄의 Badakhshan省 소재)로 비정되고 있다(桑山正進, 1992 :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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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2)
    盤石의 비탈길 :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파미르 협곡의 한 장소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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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3)
    漢代의 1寸은 2.31cm이므로 1척 6~7촌은 40cm가 채 안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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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4)
    崢嶸 : 顔注 : “崢嶸은 깊고 험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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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5)
    畜隊, 靡碎 : 顔注 : “隊는 墮의 뜻이고, 靡는 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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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6)
    九州, 五服 : 顔注 : “九州는 冀․兗․豫․青․徐․荊․揚․梁․雍. 五服은 侯․甸․綏․要․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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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7)
    罷弊所恃以事無用 : 顔注 : “罷는 疲로 읽어야 한다. 所恃는 中國의 주민을 가리키고, 無用은 遠方의 蠻夷의 나라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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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무제, 오두로(烏頭勞), 오두로, 문충(文忠), 문충, 문충, 음말부(陰末 赴), 음말부, 조덕(趙德), 음말부, 음말부, 조덕, 성제(成帝), 계빈, 두흠(杜欽), 왕봉(王鳳), 음말부, 왕봉, 두흠
지명
계빈국(罽賓國), 순선성(循鮮城), 장안, 오타국, 난두국, 대월지, 오익산리, 대월지, 대월지, 대하, 계빈, 소륵, 휴순, 연독, 계빈, 계빈, 계빈,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계빈, 계빈, 효원제(孝元帝), 계빈, 현도, 한나라, 한나라, 계빈, 한나라, 계빈, 한나라, 현도, 계빈, 한나라, 한나라, 현도, 피산, 한나라, 한나라, 현도, 피산, 계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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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빈국(罽賓國)에 대한 소개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18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