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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위도기(尉屠耆)가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누란에서 선선(鄯善)으로 변경함

  • 국가
    선선국·누란국(鄯善國·樓蘭國)
원봉(元鳳) 4년(전77) 대장군 곽광(霍光) 주 001
각주 001)
霍光 : 河東 平陽(현재 山西省 臨汾 西南)人. 字는 子孟이며, 霍去病의 異母弟로서 『漢書』 卷68에 立傳된 인물이다. 20여 년 궁정을 출입하면서 성심으로 황제를 모셔 武帝의 신임을 획득했다. 무제 임종시 大司馬大將軍에 임명되고 博擊侯에 봉해졌으며, 金日磾․上官桀․桑弘羊 등과 함께 遺詔를 받들었으나, 昭帝 즉위 후 上官桀․桑弘羊 등과 틈이 벌어져 上官桀을 모반죄로 살해하고 朝廷의 정치를 擅斷하기에 이른다. 그 후 20년간 집권하면서 武帝 이후 어려워진 정치․경제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地節 2년(전68) 病死하였으나, 그 뒤 그의 妻가 許皇后를 암살하려던 계획이 탄로나서 아들 霍禹 등이 謀反罪를 쓰고 一族이 誅殺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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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황제에게] 아뢴 뒤 평락감(平樂監)주 002
각주 002)
平樂監 : 『漢書』 「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는 平樂廐監으로 기록. 그는 아마 上林苑에 있던 平樂觀의 마굿간[廐]을 관할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漢書』 「傅介子傳」에 그가 駿馬監으로 大宛에 파견된 것도 그의 직책과 유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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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개자(傅介子) 주 003
각주 003)
傅介子 : 北地 義渠(현재 甘肅省 寧縣 西北)人으로 『漢書』 卷70에 立傳된 인물. 昭帝 元風年間에 駿馬監으로서 大宛에 사신으로 갔고, 詔勅을 받들어 樓蘭․龜玆 등이 漢使를 遮斷하고 살해하는 것을 견책하였으며, 龜玆에서는 匈奴의 使者를 斬殺하기도 했다. 돌아와서 中郞에 拜受되고 平樂監에 임명되었다. 霍光의 지시에 따라 士卒들과 함께 金幣를 갖고 여러 나라에 賞賜를 내려주러 간다고 속이면서 樓蘭에 도착하여 王 安歸(嘗歸)를 刺殺하였다. 귀환한 뒤에는 義陽侯에 봉해졌으며 元康元年(전65)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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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내서 그 왕을 암살하라고 했다. 부개자는 가벼운 [차림을 하고] 용맹한 병사들을 데리고 갔다. 황금과 비단을 휴대했는데, 외국에 하사품을 줌으로써 명성을 얻기 위해서라고 공언하였다. 그가 누란에 도착해서 그 왕에게 하사품을 주겠다고 속이니, 왕이 기뻐서 부개자와 함께 마시고 취하였는데, 그가 왕과 은밀한 말을 하는 사이에 장사(壯士) 2명이 뒤에서 그를 찔러 죽였다. 좌우의 귀족들이 모두 흩어져 도망갔다. 부개자는 “왕이 한나라에 죄를 지어서 천자께서 나를 보내어 왕을 주살한 것이다. 마땅히 왕의 동생으로 한나라에 있는 위도기를 다시 세울 것이다. 한나라 군대가 이제 막 도착할 테니 감히 [반항하여] 움직여 나라의 멸망을 자초하지 말도록 하라.”고 선포하였다. 이윽고 부개자는 왕 상귀(嘗歸) 주 004
각주 004)
嘗歸 : 顔注 : “嘗歸는 그 왕의 이름이다. 昭帝紀에는 安歸라고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嘗歸라고 되어 있으니, 本紀와 列傳의 기록이 서로 달라서 [그중 하나는] 마땅히 오류일 것이다.” 嘗歸(z’ang-kjwei)는 Changi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語頭音 ca와 ja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a로도 들릴 수 있었기 때문에 Angi 즉 安歸로 표기되었을 가능성이 지적되었다(Hulsewé, 1979 :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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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머리를 베어서 역전을 통해서 궁궐로 보내니, 북궐 아래에 그 머리를 매달았다. 부개자의양후(義陽侯)에 봉해졌다.주 005
각주 005)
義陽侯 : 『漢書』 「傅介子傳」에는 昭帝가 그를 義陽侯로 봉하면서 내린 다음과 같은 詔文이 기재되어 있다. “平樂監 傅介子는 持節使로서 樓蘭王 安歸의 首級을 베어 北闕에 걸어서 원수를 갚았으며 무리를 지휘하는 일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다. 傅介子를 義陽侯에 봉하여 食邑 700戶를 내린다. 왕을 刺殺한 士卒들은 모두 侍郞으로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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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위도기를 그 왕으로 세우고 그 나라의 이름을 선선(鄯善) 주 006
각주 006)
鄯善 : 이는 漢字의 의미상 ‘向善’이 되겠지만, 현지어에서 유사한 발음을 근거로 한자로 뜻이 통하게 만든 말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Charchan이라는 지명과 鄯善은 동일한 語源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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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바꾸었으며, 그를 위하여 인장을 새겨주고, 궁녀를 하사하여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수레와 기병과 치중(輜重)을 마련해 주고, 승상·장군이 백관을 이끌고 횡문(橫門)주 007
각주 007)
橫門 : 孟康은 橫을 光으로 발음하라고 注記했다. 『三輔黃圖』에 따르면 橫門은 長安城 西北方에 있던 城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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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밖에 이를 때까지 배웅하여, 제사[祖]주 008
각주 008)
祖 : 『漢書』 「景十三王傳」에 있는 顔注에 따르면 祖라는 것은 送行의 祭祀이며 饗飮의 禮를 올리는 것으로, 과거 黃帝의 아들 纍祖가 멀리 여행다니는 것을 좋아하다가 길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후일 사람들이 그를 여행의 신(行神)으로 추앙해서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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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지낸 뒤에 그를 보냈다. 왕은 천자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저는 오랫동안 한나라에 있다가 지금 귀환하는데 혼자이고 약합니다. 그러나 전왕의 아들이 있으니 살해될까 두렵습니다. 나라 안에 이순성(伊循城) 주 009
각주 009)
伊循(i-ziuen) : 과거에 학자들은 전77년 한나라가 樓蘭을 장악하면서 國名을 鄯善으로 고쳐 부르고 首都도 扜泥/扞泥 즉 현재의 Miran遺址에서 伊循 즉 Charklik[若羌]으로 옮긴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Enoki(1960 : 200-210)는 전77년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은 없고 다만 尉屠耆가 國內人들의 반대를 두려워하여 伊循城에 거주한 것이며, 伊循城도 마찬가지로 樓蘭의 도읍인 扜泥 부근에 있었고 漢軍이 주둔했던 곳이라는 신설을 제기했다. 그는 扜泥/驩泥가 樓蘭遺址에서 발견된 카로슈티 문서(3~4세기경)에 Kroraina(樓蘭)의 별칭으로 기록된 kuhani 혹은 khvani를 音寫한 것이며, 鄯善이라는 명칭은 그 근처를 흐르는 강의 이름 Charchan을 音寫한 것으로 보았다. 결론적으로 Enoki는 扜泥를 樓蘭遺址가 발견된 곳으로, 伊循은 Miran遺址라고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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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있는데 그 땅이 비옥하니, 원컨대 한나라에서 한 지휘관을 보내 둔전을 설치하고 곡식을 쌓는다면, 신(臣)은 그 위엄에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한나라는 사마(司馬) 1명과 이사(吏士) 40명을 파견하여 이순에 둔전을 실시하고 그곳을 진무하도록 하였다.주 010
각주 010)
伊循지역의 屯田에 관해서는 張德芳(2001)․李炳泉(2003)․張運德(2007) 등을 참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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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도위로 바꾸어 설치했으니, 이순의 관직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선선한나라[와 서역을 연결하는] 도로의 요충에 있으며, 서쪽으로 720리 가면 차말과 통한다. 차말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모두 오곡을 심고 토지·초목·축산·무기가 대략 한나라와 동일하니, 다른 점이 있을 경우에만 기록하도록 하겠다.

  • 각주 001)
    霍光 : 河東 平陽(현재 山西省 臨汾 西南)人. 字는 子孟이며, 霍去病의 異母弟로서 『漢書』 卷68에 立傳된 인물이다. 20여 년 궁정을 출입하면서 성심으로 황제를 모셔 武帝의 신임을 획득했다. 무제 임종시 大司馬大將軍에 임명되고 博擊侯에 봉해졌으며, 金日磾․上官桀․桑弘羊 등과 함께 遺詔를 받들었으나, 昭帝 즉위 후 上官桀․桑弘羊 등과 틈이 벌어져 上官桀을 모반죄로 살해하고 朝廷의 정치를 擅斷하기에 이른다. 그 후 20년간 집권하면서 武帝 이후 어려워진 정치․경제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地節 2년(전68) 病死하였으나, 그 뒤 그의 妻가 許皇后를 암살하려던 계획이 탄로나서 아들 霍禹 등이 謀反罪를 쓰고 一族이 誅殺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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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平樂監 : 『漢書』 「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는 平樂廐監으로 기록. 그는 아마 上林苑에 있던 平樂觀의 마굿간[廐]을 관할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漢書』 「傅介子傳」에 그가 駿馬監으로 大宛에 파견된 것도 그의 직책과 유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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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傅介子 : 北地 義渠(현재 甘肅省 寧縣 西北)人으로 『漢書』 卷70에 立傳된 인물. 昭帝 元風年間에 駿馬監으로서 大宛에 사신으로 갔고, 詔勅을 받들어 樓蘭․龜玆 등이 漢使를 遮斷하고 살해하는 것을 견책하였으며, 龜玆에서는 匈奴의 使者를 斬殺하기도 했다. 돌아와서 中郞에 拜受되고 平樂監에 임명되었다. 霍光의 지시에 따라 士卒들과 함께 金幣를 갖고 여러 나라에 賞賜를 내려주러 간다고 속이면서 樓蘭에 도착하여 王 安歸(嘗歸)를 刺殺하였다. 귀환한 뒤에는 義陽侯에 봉해졌으며 元康元年(전65)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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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嘗歸 : 顔注 : “嘗歸는 그 왕의 이름이다. 昭帝紀에는 安歸라고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嘗歸라고 되어 있으니, 本紀와 列傳의 기록이 서로 달라서 [그중 하나는] 마땅히 오류일 것이다.” 嘗歸(z’ang-kjwei)는 Changi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語頭音 ca와 ja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a로도 들릴 수 있었기 때문에 Angi 즉 安歸로 표기되었을 가능성이 지적되었다(Hulsewé, 1979 :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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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義陽侯 : 『漢書』 「傅介子傳」에는 昭帝가 그를 義陽侯로 봉하면서 내린 다음과 같은 詔文이 기재되어 있다. “平樂監 傅介子는 持節使로서 樓蘭王 安歸의 首級을 베어 北闕에 걸어서 원수를 갚았으며 무리를 지휘하는 일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다. 傅介子를 義陽侯에 봉하여 食邑 700戶를 내린다. 왕을 刺殺한 士卒들은 모두 侍郞으로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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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鄯善 : 이는 漢字의 의미상 ‘向善’이 되겠지만, 현지어에서 유사한 발음을 근거로 한자로 뜻이 통하게 만든 말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Charchan이라는 지명과 鄯善은 동일한 語源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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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橫門 : 孟康은 橫을 光으로 발음하라고 注記했다. 『三輔黃圖』에 따르면 橫門은 長安城 西北方에 있던 城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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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祖 : 『漢書』 「景十三王傳」에 있는 顔注에 따르면 祖라는 것은 送行의 祭祀이며 饗飮의 禮를 올리는 것으로, 과거 黃帝의 아들 纍祖가 멀리 여행다니는 것을 좋아하다가 길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후일 사람들이 그를 여행의 신(行神)으로 추앙해서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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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伊循(i-ziuen) : 과거에 학자들은 전77년 한나라가 樓蘭을 장악하면서 國名을 鄯善으로 고쳐 부르고 首都도 扜泥/扞泥 즉 현재의 Miran遺址에서 伊循 즉 Charklik[若羌]으로 옮긴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Enoki(1960 : 200-210)는 전77년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은 없고 다만 尉屠耆가 國內人들의 반대를 두려워하여 伊循城에 거주한 것이며, 伊循城도 마찬가지로 樓蘭의 도읍인 扜泥 부근에 있었고 漢軍이 주둔했던 곳이라는 신설을 제기했다. 그는 扜泥/驩泥가 樓蘭遺址에서 발견된 카로슈티 문서(3~4세기경)에 Kroraina(樓蘭)의 별칭으로 기록된 kuhani 혹은 khvani를 音寫한 것이며, 鄯善이라는 명칭은 그 근처를 흐르는 강의 이름 Charchan을 音寫한 것으로 보았다. 결론적으로 Enoki는 扜泥를 樓蘭遺址가 발견된 곳으로, 伊循은 Miran遺址라고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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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伊循지역의 屯田에 관해서는 張德芳(2001)․李炳泉(2003)․張運德(2007) 등을 참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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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곽광(霍光), 부개자(傅介子), 부개자, 부개자, 부개자, 위도기, 부개자, 상귀(嘗歸), 부개자, 의양후(義陽侯), 위도기
지명
누란,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선선(鄯善), 한나라, 이순성(伊循城), 한나라, 한나라, 이순, 선선, 한나라, 차말, 차말,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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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기(尉屠耆)가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누란에서 선선(鄯善)으로 변경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03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