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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한나라가 서역과 개통한 후의 과정을 설명

  • 국가
    서역(西域)
한나라가 발흥하여 효무[의 시대]에 이르러 사이(四夷)를 정벌함에 힘쓰고 위덕을 넓혔으며, 장건은 서역으로 가는 길을 처음으로 개통했다. 그 후 표기장군(驃騎將軍)주 001
각주 001)
驃騎將軍 : 票騎將軍이라고도 표기하며, 霍去病을 지칭. 그는 원래 驃姚校尉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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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흉노의 우지(右地)주 002
각주 002)
右地 : 匈奴는 제국의 영역을 中央․左地․右地로 나누었다. 제국의 高官인 소위 ‘二十四將’도 左右賢王, 左右谷蠡王, 左右大將, 左右大都尉, 左右大當戶, 左右骨都侯 등의 칭호로 불렸다. 匈奴는 기본적인 방향설정이 南向이었기 때문에 右地는 西方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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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공격하여 혼야왕(渾邪王)과 휴도왕(休屠王)주 003
각주 003)
渾邪(γuən-ia)’는 ‘昆邪’(kuən-ia)라고도 표기. 渾邪와 休屠(xiəu-d’iwo), 이 두 명칭에 관해서는 「大宛列傳」의 譯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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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항복시키고 마침내 그 지역에서 [흉노를] 몰아낸 뒤 비로서 영거(令居) 주 004
각주 004)
令居 : 「大宛列傳」의 譯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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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서쪽에 [성을] 쌓았다. 처음으로 주천(酒泉)군을 설치했고 그 후에 차츰 사민시켜서 그곳을 충실하게 채웠다. 무위(武威)·장액(張掖)·돈황(敦煌) [등의 군]을 나누어 설치하여 사군(四郡)주 005
각주 005)
四郡 : 河西四郡에 관해서는 「大宛列傳』의 譯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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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늘어놓고 두 개의 관문주 006
각주 006)
兩關 : 陽關과 玉門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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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지하도록 하였다. 이사장군(貳師將軍)이 대완을 정벌한 뒤 서역이 두려움에 떨었고 많은 [나라들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헌상했으며, 한나라에서 서역으로 사신을 갔던 사람들은 더욱 더 임무를 다할 수 있게 되었다.주 007
각주 007)
益得職 : 顔注 : “그 勤勞함을 賞讚하다. 모두 배수된 직책을 수행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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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돈황에서 서쪽으로 염택에 이르기까지 자주 정(亭)을 세웠다. 또한 윤대(輪臺)주 008
각주 008)
輪臺 : 현재 新疆 輪臺[Bugur]縣 東南. 원래 輪臺國(혹은 侖頭國)이 있었으나 전102년 李廣利의 大宛遠征時 멸망했고, 한나라는 이곳에 屯田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武帝 末年 즉 征和4년(전89) 桑弘羊이 輪臺 以東의 捷枝․渠犁 등에 관개된 밭 五千頃 이상이 있으므로 屯田을 보내 匈奴와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비축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에 대해 武帝는 더 이상 전쟁을 통해 백성들을 어렵게 하지 않도록 屯田民의 파견을 반대한 ‘輪臺의 詔’를 내렸다. 黃文弼은 현재 輪臺의 동남쪽에 남아 있는 고대 수리관개의 흔적을 漢代 輪臺의 유적으로 보았다(Hulsewé, 1979 : 166 ; 嶋崎昌, 1977 : 5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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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渠犁) 주 009
각주 009)
渠犁(g’iwo-liei) : 渠黎라고도 표기. 현재 신강의 庫爾勒(Kurla)․尉犁 以西 一帶. 땅도 넓고 수초도 풍부하여, 李廣利의 大宛 遠征 이후 한나라는 이곳에 屯田을 실시하고 使者校尉를 두어 감독케 했으며, 후에는 西域都護가 監護했다. 嶋崎昌(1977 : 17, 50)은 渠犁의 위치가 烏壘城[Chadir]의 남쪽 혹은 동남쪽 330里되는 지점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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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전졸(田卒) 수백 명이 있어, 사자교위(使者校尉)주 010
각주 010)
使者校尉 :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武帝 太初4년(전101) 輪臺․渠犁 일대의 屯田을 위해서 설치된 관직으로, 서역을 왕래하는 使者들을 보호하고 필요한 물자를 지급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宣帝 때 西域都護로 改置되면서 이 명칭은 다시 보이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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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두고 [그들을] 지휘·보호주 011
각주 011)
‘領護’ : 顔注 : “營田의 사무를 統領․保護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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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외국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거기서 생산되는 식량을] 지급하게 했다.주 012
각주 012)
‘給使外國者’ : 顔注 : “심은 五穀을 거두어서 공급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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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驃騎將軍 : 票騎將軍이라고도 표기하며, 霍去病을 지칭. 그는 원래 驃姚校尉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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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右地 : 匈奴는 제국의 영역을 中央․左地․右地로 나누었다. 제국의 高官인 소위 ‘二十四將’도 左右賢王, 左右谷蠡王, 左右大將, 左右大都尉, 左右大當戶, 左右骨都侯 등의 칭호로 불렸다. 匈奴는 기본적인 방향설정이 南向이었기 때문에 右地는 西方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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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渾邪(γuən-ia)’는 ‘昆邪’(kuən-ia)라고도 표기. 渾邪와 休屠(xiəu-d’iwo), 이 두 명칭에 관해서는 「大宛列傳」의 譯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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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令居 : 「大宛列傳」의 譯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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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四郡 : 河西四郡에 관해서는 「大宛列傳』의 譯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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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兩關 : 陽關과 玉門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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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益得職 : 顔注 : “그 勤勞함을 賞讚하다. 모두 배수된 직책을 수행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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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輪臺 : 현재 新疆 輪臺[Bugur]縣 東南. 원래 輪臺國(혹은 侖頭國)이 있었으나 전102년 李廣利의 大宛遠征時 멸망했고, 한나라는 이곳에 屯田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武帝 末年 즉 征和4년(전89) 桑弘羊이 輪臺 以東의 捷枝․渠犁 등에 관개된 밭 五千頃 이상이 있으므로 屯田을 보내 匈奴와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비축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에 대해 武帝는 더 이상 전쟁을 통해 백성들을 어렵게 하지 않도록 屯田民의 파견을 반대한 ‘輪臺의 詔’를 내렸다. 黃文弼은 현재 輪臺의 동남쪽에 남아 있는 고대 수리관개의 흔적을 漢代 輪臺의 유적으로 보았다(Hulsewé, 1979 : 166 ; 嶋崎昌, 1977 : 5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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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渠犁(g’iwo-liei) : 渠黎라고도 표기. 현재 신강의 庫爾勒(Kurla)․尉犁 以西 一帶. 땅도 넓고 수초도 풍부하여, 李廣利의 大宛 遠征 이후 한나라는 이곳에 屯田을 실시하고 使者校尉를 두어 감독케 했으며, 후에는 西域都護가 監護했다. 嶋崎昌(1977 : 17, 50)은 渠犁의 위치가 烏壘城[Chadir]의 남쪽 혹은 동남쪽 330里되는 지점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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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使者校尉 :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武帝 太初4년(전101) 輪臺․渠犁 일대의 屯田을 위해서 설치된 관직으로, 서역을 왕래하는 使者들을 보호하고 필요한 물자를 지급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宣帝 때 西域都護로 改置되면서 이 명칭은 다시 보이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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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領護’ : 顔注 : “營田의 사무를 統領․保護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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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給使外國者’ : 顔注 : “심은 五穀을 거두어서 공급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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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효무, 장건
지명
한나라, 영거(令居), 주천(酒泉)군, 무위(武威), 장액(張掖), 돈황(敦煌), 대완, 한나라, 돈황, 염택, 거리(渠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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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서역과 개통한 후의 과정을 설명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01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