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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동구(東甌)가 한의 뇌물을 받고 오왕(吳王)을 단도(丹徒)에서 살해함

  • 국가
    민월(閩粤)
그 뒤 몇 대가 지나 효경제(孝景帝) 3년(전156)에 이르러 오왕(吳王) 비(濞) 주 001
각주 001)
吳王 濞 : 吳는 한초 同姓 제후에게 분봉한 나라 중 하나로 東陽, 彰郡, 會稽 등 3郡을 관할하였고 廣陵(현재의 江蘇省 揚州 西北)에 도읍하였다. 吳國의 彰郡은 銅 생산지였으며 해변가의 소금 생산으로 부강국이었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천하의 유민을 초치하여 동과 소금 생산, 운반 등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文帝 때 吳太子가 입조하였을 때 태자와 함께 바둑 때문에 다투다가 태자 劉啓(후에 景帝)에게 피살되어 이 일로 인해 吳王 濞는 20여 년 동안 稱病하고 입조하지 않았다. 마침내 景帝 3년(전154) 廣陵(현재의 江蘇省 揚州)에서 기병하여 楚와 연합해서 淮水를 건너 서진하여 진격, 이에 景帝는 太尉 周亞夫 등 장군을 파견하여 吳楚 연합군을 공격, 진압에 진전이 없자 吳의 丞相을 지내던 爰盎의 건의에 따라 처음 반란의 빌미가 되었던 削藩令을 제안한 晁錯을 죽여 七國의 난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유리한 상황에 있었던 吳王 濞는 스스로 ‘東帝’를 자칭하며 황제의 명을 받들기를 거부, 전쟁은 계속되었다. 吳楚軍이 洛陽을 향해 진군하던 중 景帝의 동생인 劉武의 封國인 梁國에서 대치하게 되었는데, 이때 周亞夫가 이끄는 漢軍이 남하하여 吳軍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淮水 북쪽에서 漢軍에 유리한 평지에서 전투를 벌여 吳楚軍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吳王 濞는 패하여 도주하여 長江 이남의 丹徒(현재의 江蘇省 鎭江)로 물러났다. 漢은 吳軍 중에 포함되어 있던 東越人을 시켜 吳에 반기를 들게 하였는데, 東越人들이 마침내 吳王 濞를 살해하였다. 楚王 劉戊도 자살하여 吳楚七國의 亂은 정월에 시작되어 3월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吳楚七國의 亂이 평정됨으로써 漢初 이래 문제가 되었던 제후왕들의 세력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漢武帝의 ‘推恩令’에 의해 ‘强幹弱枝’의 중앙집권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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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오왕은 민월을 반란에 동참시키려 했으나주 002
각주 002)
顔師古는 “월을 끌여들여 따르게 하다(招粵令從也)”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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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월은 이에 응하려 하지 않았고 오직 동구(東甌)만이 [에] 동참했다.주 003
각주 003)
『史記』에는 從 다음에 吳 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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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격파될 즈음에 동구는 의 뇌물을 받고 오왕을 단도(丹徒) 주 004
각주 004)
丹徒 : 縣名으로 前漢代 會稽郡 속현이었으며, 현재의 江蘇省 鎭江市 동북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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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살해하였다. 이 때문에 동구는 주살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주 005
각주 005)
『史記』에는 ‘歸國’ 두 글자가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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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吳王 濞 : 吳는 한초 同姓 제후에게 분봉한 나라 중 하나로 東陽, 彰郡, 會稽 등 3郡을 관할하였고 廣陵(현재의 江蘇省 揚州 西北)에 도읍하였다. 吳國의 彰郡은 銅 생산지였으며 해변가의 소금 생산으로 부강국이었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천하의 유민을 초치하여 동과 소금 생산, 운반 등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文帝 때 吳太子가 입조하였을 때 태자와 함께 바둑 때문에 다투다가 태자 劉啓(후에 景帝)에게 피살되어 이 일로 인해 吳王 濞는 20여 년 동안 稱病하고 입조하지 않았다. 마침내 景帝 3년(전154) 廣陵(현재의 江蘇省 揚州)에서 기병하여 楚와 연합해서 淮水를 건너 서진하여 진격, 이에 景帝는 太尉 周亞夫 등 장군을 파견하여 吳楚 연합군을 공격, 진압에 진전이 없자 吳의 丞相을 지내던 爰盎의 건의에 따라 처음 반란의 빌미가 되었던 削藩令을 제안한 晁錯을 죽여 七國의 난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유리한 상황에 있었던 吳王 濞는 스스로 ‘東帝’를 자칭하며 황제의 명을 받들기를 거부, 전쟁은 계속되었다. 吳楚軍이 洛陽을 향해 진군하던 중 景帝의 동생인 劉武의 封國인 梁國에서 대치하게 되었는데, 이때 周亞夫가 이끄는 漢軍이 남하하여 吳軍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淮水 북쪽에서 漢軍에 유리한 평지에서 전투를 벌여 吳楚軍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吳王 濞는 패하여 도주하여 長江 이남의 丹徒(현재의 江蘇省 鎭江)로 물러났다. 漢은 吳軍 중에 포함되어 있던 東越人을 시켜 吳에 반기를 들게 하였는데, 東越人들이 마침내 吳王 濞를 살해하였다. 楚王 劉戊도 자살하여 吳楚七國의 亂은 정월에 시작되어 3월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吳楚七國의 亂이 평정됨으로써 漢初 이래 문제가 되었던 제후왕들의 세력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漢武帝의 ‘推恩令’에 의해 ‘强幹弱枝’의 중앙집권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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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顔師古는 “월을 끌여들여 따르게 하다(招粵令從也)”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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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史記』에는 從 다음에 吳 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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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丹徒 : 縣名으로 前漢代 會稽郡 속현이었으며, 현재의 江蘇省 鎭江市 동북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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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史記』에는 ‘歸國’ 두 글자가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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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효경제(孝景帝), 비(濞)
지명
, , , 단도(丹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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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東甌)가 한의 뇌물을 받고 오왕(吳王)을 단도(丹徒)에서 살해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5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