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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무제(無諸)를 민월왕(閩越王), 요(搖)를 동해왕(東海王)에 봉함

  • 국가
    민월(閩粤)
민월왕(閩粤王)주 001
각주 001)
閩粤王 : 閩의 음은 『集解』에 인용된 韋昭에 따르면, 무(武)와 건(巾)의 반절 즉 민이며, 東越이라고도 한다. 『索隱』 역시 『說文解字』를 인용하여 東越의 일파라고 하였다. 閩越을 東越이라 한 것은 閩越王 郢을 죽이고 자립한 餘善이 東越王을 칭한 데에서 기인한다. 閩越國은 현재의 福建省 북부와 浙江省 남부에 걸쳐 기원전 334~기원전 110년간 존속하였다. 閩越國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기원전 334년 越王 句踐의 7대손인 無疆이 楚威王과의 전투에서 져 멸망한 뒤 월나라 유민들이 남하하여 백월족 원주민과 섞여 살게 되었다. 越國의 왕족은 이때 배를 타고 閩으로 들어가 월나라 사람들은 越遷山(현재의 福建省 長樂縣)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월인은 신체가 왜소하고 얼굴 길이가 짧으며 수염이 적고 코가 넓적하고 동공이 크다는 신체적 특징과 물가에 살아서 水戰에 능하고 조선 기술이 뛰어난 점, ‘斷髮文身’의 습속 등 중원과는 풍속이 달랐다. 이 지역은 뱀이 많았기에 당시 뱀을 토템으로 한 부락들이 많았는데, 뱀은 고어 중에는 長虫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에 이곳을 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許慎의 『說文解字』에도 이 閩자를 “閩은 東南越이다. 뱀의 일종이다”라고 하였는데, 閩자를 풀이해 보면, 門은 음을 나타내고 虫은 뜻을 나타낸다. 이 뜻을 나타내는 ‘虫’은 許慎이 뱀의 일종이라고 풀이하게 된 유래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은 許慎이 글자의 형태로 풀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민속학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뱀의 일종이라기보다는 뱀을 토템을 하는 민족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게 합리적이다. 후대 福建省을 가리키는 칭호로 ‘閩’을 사용하게 된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秦이 六國을 통일한 뒤 閩越이 있던 지역에 ‘閩中郡’을 설치하였고, 秦末에 守尉令長을 閩中에 파견하여 閩越王의 왕의 칭호를 ‘君長’으로 대체하였을 뿐 그 통치는 그대로 인정하는 등 직접 통제하에 두지는 않았다. 閩越의 역사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史記』 「東越列傳」에서 처음 보이며, 「한서양월열전」은 그대로 전재하고 있다. 「東越列傳」에 따르면, 기원전 209년 중원에서 陳勝, 吳廣의 난이 발발하자 閩越의 無諸는 병사들을 이끌고 북상하여 진 멸망에 일조하였으며, 기원전 206년 楚漢 전쟁시에는 劉邦을 도와 項羽를 쳐서 공을 세워, 그 공로로 기원전 202년 無諸는 閩越王에 책봉되었고, 이 일대에 閩越王城을 축성하였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閩越王城은 48m2에 달하고 4개의 성문으로 이루어졌으며, 東西 성문 사이에는 10m에 달하는 大道가 배치되었으며, 대도 북쪽에는 2만m2에 달하는 궁전터가 있는데, 중심 건축물은 900여 m2에 달한다. 이처럼 당시 閩越國은 漢代 동남일대에서 최강의 국가로서 자리잡았다. 無諸 사후 대내외적 분쟁과 전쟁으로 혼란을 거듭하다가 閩越王 郢을 죽이고 그 동생 餘善이 ‘武帝’를 칭하는 등 漢에 반기를 들었다. 漢武帝는 즉각 네 갈래 길로 대군을 파견하여 閩越國을 포위함과 동시에 閩越國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여 閩越 繇王 등이 여선을 살해하고 한에 귀속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후 漢武帝는 閩越의 백성을 江淮 內地로 천사시키고 閩越 왕성을 불태웠는데, 최근 발견된 城村古城과 그 궁전터는 바로 그 흔적이다. 1996년 福建省考古工作隊에서 新店古城을 발굴하였는데, 발굴단은 이 新店古城이 『史記』와 『漢書』에 묘사된 閩越王城으로 추정하고 있다. 왕성유지 주변에서는 다양한 문양과 ‘萬歲’, ‘萬歲未央’ 등의 문자가 새겨진 와당 파편과 ‘閩’자로 추정되는 瓦當이 발견되었다.(許智范-肖明華, 『南方文化與百越滇越文明』, 江蘇敎育出版社, 2005, 167~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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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無諸)월나라 동해왕(東海王)주 002
각주 002)
東海王 : 東海는 『漢書』 「惠帝紀」의 “[三年]夏五月, 立閩越君搖爲東海王” 그 應劭注에 “……東海, 在吳郡東南濱海云”이라고 하여 吳郡(後漢대 會稽郡을 나눠 설치, 현재의 江蘇省 동남일대) 東南 해안이라 하였고, 顔師古는 泉州(현재의 福建省 福州)라고 하여, 그 위치가 다르다. 이 東海는 秦代에 설치된 東海郡과는 무관하다. 즉 秦代에 설치된 東海郡은 현재의 山東省 郯城縣 일대인데, 도읍으로 삼은 東甌(현재의 福建省 溫州市)를 고려해보아도 顔師古가 말한 泉州가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동해가 구체적으로 어느곳인지 顔師古도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참고로 泉州는 唐 睿宗 景雲 2년(711)년 武榮州를 泉州로 개칭하고 閩州都督府에 귀속시키면서 이후 이 지역을 泉州라고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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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搖)는 그 선조가 모두 월왕 구천(句踐)의 후예로서 성은 추씨(騶氏)주 003
각주 003)
騶氏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騶는 ‘駱’으로도 되어 있다. 『索隱』도 徐廣설을 인용하여 위에서 말한 ‘歐駱’을 말하며 姓이 騶씨는 아니라고 하였다. 陳直도 『史記新證』에서 騶氏는 齊나라의 大姓으로 閩越에 이 성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하며 와전된 듯하다고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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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이들을 폐하여 군장(君長)주 004
각주 004)
君長 : 고대 소수민족의 수장을 가리키는 칭호이다. 『史記』 「五帝本紀」에, “[舜]遂見東方君長”이라고 되어 있다. 後漢 袁康의 『越絶書』 「外傳記地傳」에도 “親以上至句踐, 凡八君, 都瑯琊二百二十四歲. 無疆以上, 霸, 稱王. 之侯以下微弱, 稱君長”이라고 하여 無疆 이전에는 王을 칭하다가 세력이 미약해져 君長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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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고 그 땅에 민중군(閩中郡) 주 005
각주 005)
閩中郡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建安郡 侯(候)官縣(현재 福建省 福州市)이라고 하였다. 『索隱』도 徐廣의 설을 인용하는 한편, 閩州가 되었다고 한다. 또 아래 ‘東冶에 도읍하다’는 구절로 韋昭 역시 侯官縣에 있다고 하였다. 『正義』는 閩州이며 다시 福州로 개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또 顔師古는 “현재의 泉州 建安이 바로 이곳이다(卽今之泉州建安是也)”라고 하였는데, 唐代 泉州 建安은 현재 廣西省 全州縣 西南 60里이다. 그런데 『漢書』 「地理志」에 실려 있는 秦의 36郡에는 閩中郡이 없는데, 이에 대해 王鳴盛은 閩中郡이 始皇帝 말년에 설치되었으나 無諸와 搖가 여전히 그 땅의 왕노릇을 하고 있다가 秦에 복속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후들을 따라 秦을 멸망시켜 36군에 들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考證』, 4668쪽). 閩中郡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기왕에 많은 학자 사이에서 논란이 진행되어 왔다. 최근 辛德勇은 王國維가 『史記』 「秦始皇本紀」에 “二十五年, 大興兵……王翦遂定荊江南地 ; 降越君, 置會稽郡”을 근거로 秦始皇25년에 설치되었다고 한 고증에 대해 의문을 제시, 降越君이 통치한 지역은 會稽이지 閩中이 아니므로, 적어도 秦始皇 25년에 설치된 것은 아니며, 그 이후에 설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辛德勇, 「秦始皇三十六郡新考(上)」, 『文史』, 2006년 1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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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설치하였다. 제후들이 진(秦)에 반기를 들자 무제(無諸)요(搖)월나라 백성을 이끌고 파양령(番陽令) 오예(吳芮) 주 006
각주 006)
吳芮 : 吳芮(?~전202)는 番邑(현재의 江西省 鄱陽縣) 사람이다. 일설에는 餘干縣이라고도 한다. 「東越列傳」에서 언급한 것처럼 秦代 鄱陽令으로 있으면서 민심을 얻어 鄱君으로 존중받은 인물이다. 秦末 百越族을 이끌고 기병하여 부장 梅絹과 사위 英布를 보내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北上하여 項梁의 군대와 함께 秦을 쳤다. 함양을 공격할 때 吳芮는 入關의 공으로 衡山王에 책봉되었다. 楚漢 전쟁 때 吳芮는 劉邦을 도와 漢의 승리를 이끌었다. 漢高祖 4년에 長沙王에 봉해지고, 臨湘에 도읍하였다. 高祖 5년에 황제의 명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閩을 평정하러 가다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시호를 文王이라 하였다. 漢初 劉邦이 봉한 8명의 異姓諸侯王 중 7명이 반란을 일으켜 모두 주멸되었으나 오직 吳氏만이 漢에 충성하여 5대를 거쳐 존속하다가 후사가 없어 폐국되고 만다. 吳芮 사후 그 자손 吳臣, 吳回, 吳右, 吳著가 長沙王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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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귀순하였다. 오예는 파군(番君)이라고까지 불렸던 자인데, 제후들을 따라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때 항우(項羽) 주 007
각주 007)
項羽 : 『史記』에는 項籍으로 되어 있다. 西楚霸王(전232~전202)으로 잘 알려진 項羽는 이름이 籍이고 字가 羽이다. 下相(현재의 江蘇省 宿遷縣) 사람이다. 楚國의 名將인 項燕의 손자로, 楚 멸망 후 그 일족은 모두 살해되어 그의 숙부 項梁을 따라 吳中(현재의 江蘇省 蘇州)으로 피난하였다. 秦末 기의하여 제후들을 호령하고 西楚霸王을 자칭하며 천하를 호령하다가 한고조 유방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烏江에서 최후를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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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제후들을 호령하였는데, 이들을 왕으로 대접하지 않자주 008
각주 008)
『集解』에 인용된 『漢書音義』에 따르면, “제후들을 호령하며 無諸와 搖 등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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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초(楚)를 따르지 않았다. 항적(項籍)을 공격하자 무제월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을 도왔다. 한[고조] 5년(전202)에 다시 무제를 민월왕에 봉하니 민중(閩中)의 옛 땅을 통치하고 야(冶) 주 009
각주 009)
冶 : 顔師古는 冶에 대해 “지명이다. 바로 후관현이다(地名, 卽侯官縣是也)”라고 하였다. 『史記』에는 東冶로 되어 있다. 현재의 福建省 福州市이다. 後漢 때에는 東冶縣을 설치하고 會稽郡에 소속시켰다. 『後漢書』 「鄭弘傳」의 “舊交阯七郡貢獻轉運, 皆從東冶汎海而至, 風波艱阻, 沈溺相係. 弘奏開零陵․桂陽嶠道, 於是夷通 至今遂爲常路”의 李賢注에 “東冶, 縣, 屬會稽郡. 太康地理志云漢武帝名爲東冶, 後改爲東候官, 今泉州閩縣是”라고 하여 漢武帝 때 東冶라고 하였다가 東候官으로 개칭하였고, 唐代에는 泉州 閩縣이였으며, 交阯와 통하는 주요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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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읍하였다. 효혜제(孝惠帝) 3년(전192)에는 고제(高帝)월나라가 세운 공을 높이 추켜세워 ‘민군(閩君) 요(搖)의 공이 크다’고 칭찬하니, 그 백성들이 곧바로 에 귀부하였다. 그리하여 를 동해왕(東海王)에 봉하니 동구(東甌)주 100
각주 100)
東甌 : 東甌는 戰國末에 현재의 浙江 東部 甌江 유역 일대에 살았던 越族과 그 거주지역을 일컫는 명칭이다. 당시 嶺南지역의 桂江과 潯江 일대에도 또 다른 越族이 살고 있어 이 월족과 구별하기 위해 東甌라 하였다. 그리하여 晉代 郭璞注 『山海經』에, “甌在閩海中, 鬱林郡爲西甌”라고 하였다. 漢初에 東甌王이 東甌에 도읍하였고, 後漢 때 永寧縣을 설치, 隋代에 永嘉縣으로 개칭, 唐宋 이래 溫州에 해당한다. 地名의 유래에 대해서는 『索隱』에 인용된 姚氏에 따르면, 강 이름이며, 또 劉宋의 鄭緝之의 『永嘉記』에, “이 강은 永寧山에서 발원하며 30여 리를 흐르는데 郡城에서 5리 떨어진 곳에서 강으로 흘러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옛날 동구왕의 도성이 있어 정이 있고 돌을 아 도로를 만들었는데, 여전히 그 길이 남아 있다(永嘉記 : 水出永寧山, 行三十餘里, 去郡城五里入江, 昔有東甌王都城. 有亭, 積石爲道, 今猶在也.)”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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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읍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일러 동구왕(東甌王)이라 하였다.

  • 각주 001)
    閩粤王 : 閩의 음은 『集解』에 인용된 韋昭에 따르면, 무(武)와 건(巾)의 반절 즉 민이며, 東越이라고도 한다. 『索隱』 역시 『說文解字』를 인용하여 東越의 일파라고 하였다. 閩越을 東越이라 한 것은 閩越王 郢을 죽이고 자립한 餘善이 東越王을 칭한 데에서 기인한다. 閩越國은 현재의 福建省 북부와 浙江省 남부에 걸쳐 기원전 334~기원전 110년간 존속하였다. 閩越國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기원전 334년 越王 句踐의 7대손인 無疆이 楚威王과의 전투에서 져 멸망한 뒤 월나라 유민들이 남하하여 백월족 원주민과 섞여 살게 되었다. 越國의 왕족은 이때 배를 타고 閩으로 들어가 월나라 사람들은 越遷山(현재의 福建省 長樂縣)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월인은 신체가 왜소하고 얼굴 길이가 짧으며 수염이 적고 코가 넓적하고 동공이 크다는 신체적 특징과 물가에 살아서 水戰에 능하고 조선 기술이 뛰어난 점, ‘斷髮文身’의 습속 등 중원과는 풍속이 달랐다. 이 지역은 뱀이 많았기에 당시 뱀을 토템으로 한 부락들이 많았는데, 뱀은 고어 중에는 長虫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에 이곳을 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許慎의 『說文解字』에도 이 閩자를 “閩은 東南越이다. 뱀의 일종이다”라고 하였는데, 閩자를 풀이해 보면, 門은 음을 나타내고 虫은 뜻을 나타낸다. 이 뜻을 나타내는 ‘虫’은 許慎이 뱀의 일종이라고 풀이하게 된 유래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은 許慎이 글자의 형태로 풀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민속학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뱀의 일종이라기보다는 뱀을 토템을 하는 민족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게 합리적이다. 후대 福建省을 가리키는 칭호로 ‘閩’을 사용하게 된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秦이 六國을 통일한 뒤 閩越이 있던 지역에 ‘閩中郡’을 설치하였고, 秦末에 守尉令長을 閩中에 파견하여 閩越王의 왕의 칭호를 ‘君長’으로 대체하였을 뿐 그 통치는 그대로 인정하는 등 직접 통제하에 두지는 않았다. 閩越의 역사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史記』 「東越列傳」에서 처음 보이며, 「한서양월열전」은 그대로 전재하고 있다. 「東越列傳」에 따르면, 기원전 209년 중원에서 陳勝, 吳廣의 난이 발발하자 閩越의 無諸는 병사들을 이끌고 북상하여 진 멸망에 일조하였으며, 기원전 206년 楚漢 전쟁시에는 劉邦을 도와 項羽를 쳐서 공을 세워, 그 공로로 기원전 202년 無諸는 閩越王에 책봉되었고, 이 일대에 閩越王城을 축성하였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閩越王城은 48m2에 달하고 4개의 성문으로 이루어졌으며, 東西 성문 사이에는 10m에 달하는 大道가 배치되었으며, 대도 북쪽에는 2만m2에 달하는 궁전터가 있는데, 중심 건축물은 900여 m2에 달한다. 이처럼 당시 閩越國은 漢代 동남일대에서 최강의 국가로서 자리잡았다. 無諸 사후 대내외적 분쟁과 전쟁으로 혼란을 거듭하다가 閩越王 郢을 죽이고 그 동생 餘善이 ‘武帝’를 칭하는 등 漢에 반기를 들었다. 漢武帝는 즉각 네 갈래 길로 대군을 파견하여 閩越國을 포위함과 동시에 閩越國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여 閩越 繇王 등이 여선을 살해하고 한에 귀속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후 漢武帝는 閩越의 백성을 江淮 內地로 천사시키고 閩越 왕성을 불태웠는데, 최근 발견된 城村古城과 그 궁전터는 바로 그 흔적이다. 1996년 福建省考古工作隊에서 新店古城을 발굴하였는데, 발굴단은 이 新店古城이 『史記』와 『漢書』에 묘사된 閩越王城으로 추정하고 있다. 왕성유지 주변에서는 다양한 문양과 ‘萬歲’, ‘萬歲未央’ 등의 문자가 새겨진 와당 파편과 ‘閩’자로 추정되는 瓦當이 발견되었다.(許智范-肖明華, 『南方文化與百越滇越文明』, 江蘇敎育出版社, 2005, 167~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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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東海王 : 東海는 『漢書』 「惠帝紀」의 “[三年]夏五月, 立閩越君搖爲東海王” 그 應劭注에 “……東海, 在吳郡東南濱海云”이라고 하여 吳郡(後漢대 會稽郡을 나눠 설치, 현재의 江蘇省 동남일대) 東南 해안이라 하였고, 顔師古는 泉州(현재의 福建省 福州)라고 하여, 그 위치가 다르다. 이 東海는 秦代에 설치된 東海郡과는 무관하다. 즉 秦代에 설치된 東海郡은 현재의 山東省 郯城縣 일대인데, 도읍으로 삼은 東甌(현재의 福建省 溫州市)를 고려해보아도 顔師古가 말한 泉州가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동해가 구체적으로 어느곳인지 顔師古도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참고로 泉州는 唐 睿宗 景雲 2년(711)년 武榮州를 泉州로 개칭하고 閩州都督府에 귀속시키면서 이후 이 지역을 泉州라고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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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騶氏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騶는 ‘駱’으로도 되어 있다. 『索隱』도 徐廣설을 인용하여 위에서 말한 ‘歐駱’을 말하며 姓이 騶씨는 아니라고 하였다. 陳直도 『史記新證』에서 騶氏는 齊나라의 大姓으로 閩越에 이 성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하며 와전된 듯하다고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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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君長 : 고대 소수민족의 수장을 가리키는 칭호이다. 『史記』 「五帝本紀」에, “[舜]遂見東方君長”이라고 되어 있다. 後漢 袁康의 『越絶書』 「外傳記地傳」에도 “親以上至句踐, 凡八君, 都瑯琊二百二十四歲. 無疆以上, 霸, 稱王. 之侯以下微弱, 稱君長”이라고 하여 無疆 이전에는 王을 칭하다가 세력이 미약해져 君長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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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閩中郡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建安郡 侯(候)官縣(현재 福建省 福州市)이라고 하였다. 『索隱』도 徐廣의 설을 인용하는 한편, 閩州가 되었다고 한다. 또 아래 ‘東冶에 도읍하다’는 구절로 韋昭 역시 侯官縣에 있다고 하였다. 『正義』는 閩州이며 다시 福州로 개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또 顔師古는 “현재의 泉州 建安이 바로 이곳이다(卽今之泉州建安是也)”라고 하였는데, 唐代 泉州 建安은 현재 廣西省 全州縣 西南 60里이다. 그런데 『漢書』 「地理志」에 실려 있는 秦의 36郡에는 閩中郡이 없는데, 이에 대해 王鳴盛은 閩中郡이 始皇帝 말년에 설치되었으나 無諸와 搖가 여전히 그 땅의 왕노릇을 하고 있다가 秦에 복속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후들을 따라 秦을 멸망시켜 36군에 들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考證』, 4668쪽). 閩中郡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기왕에 많은 학자 사이에서 논란이 진행되어 왔다. 최근 辛德勇은 王國維가 『史記』 「秦始皇本紀」에 “二十五年, 大興兵……王翦遂定荊江南地 ; 降越君, 置會稽郡”을 근거로 秦始皇25년에 설치되었다고 한 고증에 대해 의문을 제시, 降越君이 통치한 지역은 會稽이지 閩中이 아니므로, 적어도 秦始皇 25년에 설치된 것은 아니며, 그 이후에 설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辛德勇, 「秦始皇三十六郡新考(上)」, 『文史』, 2006년 1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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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吳芮 : 吳芮(?~전202)는 番邑(현재의 江西省 鄱陽縣) 사람이다. 일설에는 餘干縣이라고도 한다. 「東越列傳」에서 언급한 것처럼 秦代 鄱陽令으로 있으면서 민심을 얻어 鄱君으로 존중받은 인물이다. 秦末 百越族을 이끌고 기병하여 부장 梅絹과 사위 英布를 보내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北上하여 項梁의 군대와 함께 秦을 쳤다. 함양을 공격할 때 吳芮는 入關의 공으로 衡山王에 책봉되었다. 楚漢 전쟁 때 吳芮는 劉邦을 도와 漢의 승리를 이끌었다. 漢高祖 4년에 長沙王에 봉해지고, 臨湘에 도읍하였다. 高祖 5년에 황제의 명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閩을 평정하러 가다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시호를 文王이라 하였다. 漢初 劉邦이 봉한 8명의 異姓諸侯王 중 7명이 반란을 일으켜 모두 주멸되었으나 오직 吳氏만이 漢에 충성하여 5대를 거쳐 존속하다가 후사가 없어 폐국되고 만다. 吳芮 사후 그 자손 吳臣, 吳回, 吳右, 吳著가 長沙王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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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項羽 : 『史記』에는 項籍으로 되어 있다. 西楚霸王(전232~전202)으로 잘 알려진 項羽는 이름이 籍이고 字가 羽이다. 下相(현재의 江蘇省 宿遷縣) 사람이다. 楚國의 名將인 項燕의 손자로, 楚 멸망 후 그 일족은 모두 살해되어 그의 숙부 項梁을 따라 吳中(현재의 江蘇省 蘇州)으로 피난하였다. 秦末 기의하여 제후들을 호령하고 西楚霸王을 자칭하며 천하를 호령하다가 한고조 유방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烏江에서 최후를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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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集解』에 인용된 『漢書音義』에 따르면, “제후들을 호령하며 無諸와 搖 등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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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冶 : 顔師古는 冶에 대해 “지명이다. 바로 후관현이다(地名, 卽侯官縣是也)”라고 하였다. 『史記』에는 東冶로 되어 있다. 현재의 福建省 福州市이다. 後漢 때에는 東冶縣을 설치하고 會稽郡에 소속시켰다. 『後漢書』 「鄭弘傳」의 “舊交阯七郡貢獻轉運, 皆從東冶汎海而至, 風波艱阻, 沈溺相係. 弘奏開零陵․桂陽嶠道, 於是夷通 至今遂爲常路”의 李賢注에 “東冶, 縣, 屬會稽郡. 太康地理志云漢武帝名爲東冶, 後改爲東候官, 今泉州閩縣是”라고 하여 漢武帝 때 東冶라고 하였다가 東候官으로 개칭하였고, 唐代에는 泉州 閩縣이였으며, 交阯와 통하는 주요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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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0)
    東甌 : 東甌는 戰國末에 현재의 浙江 東部 甌江 유역 일대에 살았던 越族과 그 거주지역을 일컫는 명칭이다. 당시 嶺南지역의 桂江과 潯江 일대에도 또 다른 越族이 살고 있어 이 월족과 구별하기 위해 東甌라 하였다. 그리하여 晉代 郭璞注 『山海經』에, “甌在閩海中, 鬱林郡爲西甌”라고 하였다. 漢初에 東甌王이 東甌에 도읍하였고, 後漢 때 永寧縣을 설치, 隋代에 永嘉縣으로 개칭, 唐宋 이래 溫州에 해당한다. 地名의 유래에 대해서는 『索隱』에 인용된 姚氏에 따르면, 강 이름이며, 또 劉宋의 鄭緝之의 『永嘉記』에, “이 강은 永寧山에서 발원하며 30여 리를 흐르는데 郡城에서 5리 떨어진 곳에서 강으로 흘러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옛날 동구왕의 도성이 있어 정이 있고 돌을 아 도로를 만들었는데, 여전히 그 길이 남아 있다(永嘉記 : 水出永寧山, 行三十餘里, 去郡城五里入江, 昔有東甌王都城. 有亭, 積石爲道, 今猶在也.)”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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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무제(無諸), 요(搖), 구천(句踐), 무제(無諸), 요(搖), 오예(吳芮), 오예, 항우(項羽), 항적(項籍), 무제, , 무제, 효혜제(孝惠帝), 고제(高帝), 요(搖),
지명
월나라, 진(秦), 민중군(閩中郡), 진(秦), 월나라, 진나라, 초(楚), , 월나라, , 야(冶), 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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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무제(無諸)를 민월왕(閩越王), 요(搖)를 동해왕(東海王)에 봉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5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