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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조영제(趙嬰齊)가 즉위한 뒤 천자를 알현하라는 말을 거절하고 대신 아들 차공(車公)을 보냄

  • 국가
    남월(南粤)
영제(嬰齊)가 [조호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선왕 무제(武帝), 문제(文帝)의 옥새를 창고에 넣어두었다.주 001
각주 001)
『史記』에는 武帝璽밖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索隱』은 李奇의 말을 인용하여 “그동안 참칭한 제호를 버린 것”으로 해석하였다. 비록 史書에는 嬰齊 때 황제호의 참칭을 버렸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출토된 南越王墓의 玉璽를 보면 여전히 국내에서 帝號와 玉璽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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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長安)에서 숙위하던 시절 영제는 한단(邯鄲)주 002
각주 002)
邯鄲 : 『漢書』 「地理志」에는 “옛날 秦의 한단군을 고제 4년에 조국으로 바꿨고 경제 3년에 다시 한단군으로 고쳤다가 5년에 다시 원래대로 복구하였다(趙國, 故秦邯鄲郡, 高帝四年爲趙國, 景帝三年復爲邯鄲郡, 五年復故)”고 전한다. 郡의 屬縣이 4개였는데, 그중 하나가 邯鄲縣이다. 그 治所는 현재 河北省 邯鄲市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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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규씨(摎氏)주 003
각주 003)
摎氏 : 『史記』에는 樛氏로 되어 있다. 『索隱』은 樛氏를 摎氏라고 하며 그 음은 기(紀)와 규(虯)의 반절이라 하였다. 또 摎姓은 邯鄲이 본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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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취하여 아들 흥(興) 주 004
각주 004)
興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興이 일설에는 ‘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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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낳았었다. 영제는 왕위에 오르자 조정에 상서하여 규씨 여자를 왕후(王后)로 삼고 그 소생 을 후계자로 인정해 주기를 청하였다. 한(漢)은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영제에게 입조하여 천자를 알현하도록 권유했으나[風諭]주 005
각주 005)
風諭 : 顔師古는 이를 ‘넌지시 깨우쳐 입조하도록 하였다(風讀曰諷. 諷諭令入朝)’라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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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제는 제멋대로 살생을 즐기고 맘껏 사는 것을 좋아했는데, 입조하면 한법(漢法)의 적용을 받고 내제후(內諸侯)들과 같이 취급될까 두려워 한사코 병을 핑계로 입조하여 천자를 알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아들 차공(次公)을 보내 숙위토록 하였다. 영제가 죽자 시호를 명왕(明王)이라 하였다.주 006
각주 006)
1983년 5월 즉 象崗 대묘가 발견되기 1개월 전에 廣州市 西村 車輛段 숙소 공사현장에서 이미 도굴당한 前漢 초기 대형목곽묘를 발굴하였다. 이미 도굴당하였으나 몇 개의 정교한 옥제품으로 미루어 발굴단은 이 묘를 제3대 趙嬰齊의 묘로 추정하였다(麥英豪, 「象崗南越王墓反映的諸問題」, 『嶺南文史』, 198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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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史記』에는 武帝璽밖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索隱』은 李奇의 말을 인용하여 “그동안 참칭한 제호를 버린 것”으로 해석하였다. 비록 史書에는 嬰齊 때 황제호의 참칭을 버렸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출토된 南越王墓의 玉璽를 보면 여전히 국내에서 帝號와 玉璽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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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邯鄲 : 『漢書』 「地理志」에는 “옛날 秦의 한단군을 고제 4년에 조국으로 바꿨고 경제 3년에 다시 한단군으로 고쳤다가 5년에 다시 원래대로 복구하였다(趙國, 故秦邯鄲郡, 高帝四年爲趙國, 景帝三年復爲邯鄲郡, 五年復故)”고 전한다. 郡의 屬縣이 4개였는데, 그중 하나가 邯鄲縣이다. 그 治所는 현재 河北省 邯鄲市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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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摎氏 : 『史記』에는 樛氏로 되어 있다. 『索隱』은 樛氏를 摎氏라고 하며 그 음은 기(紀)와 규(虯)의 반절이라 하였다. 또 摎姓은 邯鄲이 본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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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興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興이 일설에는 ‘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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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風諭 : 顔師古는 이를 ‘넌지시 깨우쳐 입조하도록 하였다(風讀曰諷. 諷諭令入朝)’라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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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1983년 5월 즉 象崗 대묘가 발견되기 1개월 전에 廣州市 西村 車輛段 숙소 공사현장에서 이미 도굴당한 前漢 초기 대형목곽묘를 발굴하였다. 이미 도굴당하였으나 몇 개의 정교한 옥제품으로 미루어 발굴단은 이 묘를 제3대 趙嬰齊의 묘로 추정하였다(麥英豪, 「象崗南越王墓反映的諸問題」, 『嶺南文史』, 198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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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영제(嬰齊), 조호, 무제(武帝), 문제(文帝), 영제, 흥(興), 영제, , 영제, 영제, 영제, 명왕(明王)
지명
장안(長安), , 한(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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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제(趙嬰齊)가 즉위한 뒤 천자를 알현하라는 말을 거절하고 대신 아들 차공(車公)을 보냄 자료번호 : jo.k_0002_0095_0020_0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