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월이 영토를 확장하고 황제의 의례를 같이 사용함
고후(高后)
주 001때 유사(有司)가 월(粤)
주 002과 국경 관문에서 거래하던[關市]주 003철기의 교역을 중단할 것을 주청하였다. 조타가 말하기를, “고황제(高皇帝)
주 004가 나를 왕으로 인정해 [한과] 사신이 오고가며 물자를 교역해 왔는데, 지금 고후(高后)는 [남월을] 중상하는 신하의 말만 듣고 오랑캐라 차별하며 기물의 교역을 중단하였다. 이는 장사왕(長沙王)주 005의 음모임이 분명하다. 장사왕은 중국에 기대어 남해(南海)주 006를 공격해 멸망시키고 이를 병합해 왕이 되어 공업을 이루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조타는 스스로 호를 높여 남무제(南武帝)
주 007라고 한 다음 군사를 일으켜 장사국 변방의 읍을 공격하고 여러 현들을 쳐부수었다주 008
고후가 장군 융려후(隆慮侯)
조(竈)
주 009를 파견하여 공격하게 하였다. 때마침 덥고 습한 여름이어서 병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아 군대는 [양산]령
주 010을 넘지 못했다. 1년 뒤(전180)에 고후가 죽자 곧바로 군대를 철수하였다. 조타는 이때를 틈타 민월(閩越)주 011과 서구(西甌)주 012
각주 012)
, 낙(駱)주 013西甌 : 『漢書』 「西南夷兩粵」에 따르면, “蠻夷中, 西有西甌, 衆半羸, 南面稱王 ; 東有閩粵, 其衆數千人 ; 亦稱王”이라 하여 동쪽의 閩越과 대칭하여 서쪽의 만이를 西甌라 한 것을 알 수 있다. 顔師古도 西甌는 곧 駱越이며, 西라고 한 것은 東甌와 구별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西甌卽駱越也. 言西者, 以別東甌也.”). 이처럼 사서에는 어떤 때에는 낙월이라 하고, 또 어떤 때는 서구라고 하며 또 어떤 때에는 서구와 낙월이라 병칭할 때에도 있어 매우 혼란스럽다. 그러나 『考證』이 지적하듯이(4652쪽), 閩越, 西甌, 駱은 각각 별개의 나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각주 013)
등을 군사로 위협하는 한편,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많은 선물을 보내 이들의 환심을 사서 그 밑에 복속시켰다.주 014이로써 남월은 동서로 만여 리나 되었다. 마침내 조타는 황옥(黃屋)주 015과 좌독(左纛)주 016을 갖춘 수레를 타고 칭제(稱制)주 017하는 등 중국과 [황제의 의례를] 같이 하였다[與中國侔].주 018
駱 : 『集解』는 『漢書音義』를 인용하여 ‘駱越’이라 하였다. 『索隱』 또한 鄒氏의 말을 인용하여 駱越이라 하는 한편, 姚氏의 말을 인용하여, 『廣州記』에 “交趾에는 駱田이 있는데, 潮水가 위 아래로 흘러들어가 그 밭을 일구어 먹고 사는 사람들을 ‘駱人’이라 부른다. 그래서 駱王도 있고 駱侯도 있다. 또 그 밖의 여러 현에서는 자칭 ‘駱將’이라 하며 銅印에 靑綬를 하니 오늘날의 令長에 해당한다. 뒤에 蜀王의 아들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駱侯를 토벌한 뒤 安陽王이라 자칭하며 치소를 封溪縣에 두었다. 뒤에 南越王 尉他가 安陽王을 쳐서 두 명의 사자로 하여금 交阯와 九眞郡의 사람들을 다스리도록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駱은 바로 甌駱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西甌는 하나의 국명으로 여기의 駱은 『考證』(4652쪽)에 따르면, 아래 문장에 ‘其西甌駱裸國’과 같이 西甌와 駱裸처럼 駱 아래에 裸자가 덧붙여져야 되는 것과는 달리 甌駱을 병칭해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駱자는 원래 壯族 언어로는 地名을 가리키는데, 산록이나 산기슭을 壯語로는 六(lok)이라고 하며, ‘六’과 ‘駱’은 음이 비슷하다. 壯族은 원래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한자로 표기할 때 각양각색으로 표기된 경우가 많은데, 이를테면 『廣州記』에서 말한 ‘駱田’은 바로 ‘六田’ 즉, 산기슭 사이에 있는 밭을 말한다(黃現璠, 『壯族通史』, 廣西民族出版社, 1988).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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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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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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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2)
西甌 : 『漢書』 「西南夷兩粵」에 따르면, “蠻夷中, 西有西甌, 衆半羸, 南面稱王 ; 東有閩粵, 其衆數千人 ; 亦稱王”이라 하여 동쪽의 閩越과 대칭하여 서쪽의 만이를 西甌라 한 것을 알 수 있다. 顔師古도 西甌는 곧 駱越이며, 西라고 한 것은 東甌와 구별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西甌卽駱越也. 言西者, 以別東甌也.”). 이처럼 사서에는 어떤 때에는 낙월이라 하고, 또 어떤 때는 서구라고 하며 또 어떤 때에는 서구와 낙월이라 병칭할 때에도 있어 매우 혼란스럽다. 그러나 『考證』이 지적하듯이(4652쪽), 閩越, 西甌, 駱은 각각 별개의 나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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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3)
駱 : 『集解』는 『漢書音義』를 인용하여 ‘駱越’이라 하였다. 『索隱』 또한 鄒氏의 말을 인용하여 駱越이라 하는 한편, 姚氏의 말을 인용하여, 『廣州記』에 “交趾에는 駱田이 있는데, 潮水가 위 아래로 흘러들어가 그 밭을 일구어 먹고 사는 사람들을 ‘駱人’이라 부른다. 그래서 駱王도 있고 駱侯도 있다. 또 그 밖의 여러 현에서는 자칭 ‘駱將’이라 하며 銅印에 靑綬를 하니 오늘날의 令長에 해당한다. 뒤에 蜀王의 아들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駱侯를 토벌한 뒤 安陽王이라 자칭하며 치소를 封溪縣에 두었다. 뒤에 南越王 尉他가 安陽王을 쳐서 두 명의 사자로 하여금 交阯와 九眞郡의 사람들을 다스리도록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駱은 바로 甌駱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西甌는 하나의 국명으로 여기의 駱은 『考證』(4652쪽)에 따르면, 아래 문장에 ‘其西甌駱裸國’과 같이 西甌와 駱裸처럼 駱 아래에 裸자가 덧붙여져야 되는 것과는 달리 甌駱을 병칭해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駱자는 원래 壯族 언어로는 地名을 가리키는데, 산록이나 산기슭을 壯語로는 六(lok)이라고 하며, ‘六’과 ‘駱’은 음이 비슷하다. 壯族은 원래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한자로 표기할 때 각양각색으로 표기된 경우가 많은데, 이를테면 『廣州記』에서 말한 ‘駱田’은 바로 ‘六田’ 즉, 산기슭 사이에 있는 밭을 말한다(黃現璠, 『壯族通史』, 廣西民族出版社, 1988).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색인어
- 이름
- 고후(高后), 조타, 고황제(高皇帝), 고후(高后), 조타, 남무제(南武帝), 고후, 융려후(隆慮侯), 조(竈), 고후, 조타, 조타
- 지명
- 월(粤), 한, 남월, 장사국, [양산]령, 남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