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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월이 반란을 일으키자 한무제가 격파하니 야량(夜郞)이 입조함

  • 국가
    서남이(西南夷)
남월(南粵)이 반란을 일으키자,주 001
각주 001)
南越의 相 呂嘉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원정 6년(전111) 여름 사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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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武帝)치의후(馳義侯)에게 건위군을 통하여 남이(南夷)의 군대를 동원하게 하였다. 차란주 002
각주 002)
且蘭 : 且蘭國은 滇國시기부터 漢初에 이르는 古國이다. 그 위치는 현재 貴州의 都勻․福泉․黃平․貴定 등의 市縣 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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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且蘭君)은 멀리 군대를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주변의 국(國)들이 (남은) 노약자들을 사로잡을까 두려워한 것이다.주 003
각주 003)
師古가 말하기를, “군대를 동원하여 한과 함께 원정한 뒤에 그 국이 비게 되면, 주변의 국들이 침구하여 그 노약자들을 약취하여 갈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且의 音은 子와 餘의 반절이다”라고 하였다(師古曰, “恐發兵與漢行後, 其國空虛, 而旁國來寇, 鈔取其老弱也. 且音子餘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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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자신의 무리와 함께 배반하여, 사자와 건위태수를 죽였다. 이 때문에 파촉(巴蜀)의 죄인을 징발하여 남월 공격을 담당하게 하였던 여덟 교위(校尉)에게 그들을 격파하게 하였다. 마침 월이 이미 격파된주 004
각주 004)
남월이 격파된 것은 원정 6년 겨울 시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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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에 의 여덟 교위는 남하(南下)하지 않았는데, 중랑장(中郞將)주 005
각주 005)
中郞將 : 『漢書』 「百官公卿表」에 “議郞, 中郞, 侍郞, 郞中이 있는데, 모두 정해진 員이 없어서, 많으면 천명에까지 이른다. 議郞과 中郞은 秩이 比六百石이고, 侍郞은 比四百石이며, 郞中은 比三百石이다. 中郞에는 五官과 左右 3將이 있는데, 秩이 모두 比二千石이다”라고 하였다(『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 第7上, 727쪽). 이로 보건대, 여기에서의 중랑장은 오관 과 좌우 중랑장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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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창(郭昌) 주 006
각주 006)
郭昌 : 『漢書』 「郭昌傳」에서는 “郭昌은 雲中人이다. 校尉로서 大將軍 衛靑을 종군하였다. 元封 4년에 太中大夫로서 拔胡將軍이 되었으며 朔方에 둔수하였다. 昆明을 쳤으나 功이 없어 인수를 회수당하였다”라고 하였다(『漢書』 卷55 「郭昌傳」, 2492). 『漢書』 「武帝紀」에 따르면, 곽창은 元封 6년(전105) 삼월에 일어난 益州郡의 昆明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하는데(『漢書』卷6 「武帝本紀」, 198), ‘功이 없어 인수를 회수당하였다’라고 한 것은 이때의 일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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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광(衛廣) 주 007
각주 007)
衛廣 : 『漢書』 「西南夷傳」 외에 별다른 기록을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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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으로 향하는 길을 막던 차란(且蘭) 주 008
각주 008)
『史記』에서는 ‘頭蘭’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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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하여 바로 주벌(誅罰)주 009
각주 009)
顔師古는 『漢書』 「嚴助傳」에 주를 달면서, “왕자의 군대는 단지 주벌을 행할 뿐, 전투는 있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不伐’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王者之兵, 但行誅耳, 無有戰鬪, 故云不伐也”. 『漢書』 卷64上 「嚴助傳」, 27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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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행하였으며,주 010
각주 010)
師古가 말하기를, “군대가 행군하면서 바로 주벌을 행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言因軍行而便誅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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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명을 참수하고, 마침내 남이를 평정하여 장가군(牂柯郡)을 설치하였다. 야랑후는 처음에 남월에 의지하였다. 남월이 이미 멸망하고, [한군이] 귀환하던 중 이반한 자들을 주벌하니,주 011
각주 011)
師古가 말하기를, “군대가 귀환하다가 차란을 주벌한 것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師古曰, “謂軍還而誅且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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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랑이 마침내 입조(入朝)하였고, 천자가 야랑왕(夜郞王)으로 삼았다. 그런데 남월이 격파된 뒤, 차란과 공군(邛君)을 주멸하고, 아울러 작후(筰侯)주 012
각주 012)
여기에서의 君과 侯의 爵號는 이들이 한 왕조의 왕․후․군․장의 봉작체제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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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죽이자, 염방(冉駹)이 모두 떨며 두려워하여 칭신(稱臣)하고 [군현을 설치하여] 관리를 둘 것을 요청하였다. 공도(邛都)에 월수군(粵嶲郡)을 설치하고, 작도(筰都)를 침려군(沈犁郡)으로 만들고, 염방(冉駹)에 문산군(汶山郡)을 설치하였으며, 광한군(廣漢郡) 서쪽의 백마(白馬)는 무도군(武都郡)으로 삼았다.

  • 각주 001)
    南越의 相 呂嘉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원정 6년(전111) 여름 사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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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且蘭 : 且蘭國은 滇國시기부터 漢初에 이르는 古國이다. 그 위치는 현재 貴州의 都勻․福泉․黃平․貴定 등의 市縣 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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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師古가 말하기를, “군대를 동원하여 한과 함께 원정한 뒤에 그 국이 비게 되면, 주변의 국들이 침구하여 그 노약자들을 약취하여 갈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且의 音은 子와 餘의 반절이다”라고 하였다(師古曰, “恐發兵與漢行後, 其國空虛, 而旁國來寇, 鈔取其老弱也. 且音子餘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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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남월이 격파된 것은 원정 6년 겨울 시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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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中郞將 : 『漢書』 「百官公卿表」에 “議郞, 中郞, 侍郞, 郞中이 있는데, 모두 정해진 員이 없어서, 많으면 천명에까지 이른다. 議郞과 中郞은 秩이 比六百石이고, 侍郞은 比四百石이며, 郞中은 比三百石이다. 中郞에는 五官과 左右 3將이 있는데, 秩이 모두 比二千石이다”라고 하였다(『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 第7上, 727쪽). 이로 보건대, 여기에서의 중랑장은 오관 과 좌우 중랑장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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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郭昌 : 『漢書』 「郭昌傳」에서는 “郭昌은 雲中人이다. 校尉로서 大將軍 衛靑을 종군하였다. 元封 4년에 太中大夫로서 拔胡將軍이 되었으며 朔方에 둔수하였다. 昆明을 쳤으나 功이 없어 인수를 회수당하였다”라고 하였다(『漢書』 卷55 「郭昌傳」, 2492). 『漢書』 「武帝紀」에 따르면, 곽창은 元封 6년(전105) 삼월에 일어난 益州郡의 昆明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하는데(『漢書』卷6 「武帝本紀」, 198), ‘功이 없어 인수를 회수당하였다’라고 한 것은 이때의 일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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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衛廣 : 『漢書』 「西南夷傳」 외에 별다른 기록을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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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史記』에서는 ‘頭蘭’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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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顔師古는 『漢書』 「嚴助傳」에 주를 달면서, “왕자의 군대는 단지 주벌을 행할 뿐, 전투는 있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不伐’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王者之兵, 但行誅耳, 無有戰鬪, 故云不伐也”. 『漢書』 卷64上 「嚴助傳」, 27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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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師古가 말하기를, “군대가 행군하면서 바로 주벌을 행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言因軍行而便誅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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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師古가 말하기를, “군대가 귀환하다가 차란을 주벌한 것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師古曰, “謂軍還而誅且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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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여기에서의 君과 侯의 爵號는 이들이 한 왕조의 왕․후․군․장의 봉작체제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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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무제(武帝), 치의후(馳義侯), 곽창(郭昌), 위광(衛廣)
지명
남월(南粵), 건위군, , 파촉(巴蜀), 남월, , , 차란(且蘭), 장가군(牂柯郡), 남월, 남월, 야랑, 남월, , 차란, 월수군(粵嶲郡), 침려군(沈犁郡), 문산군(汶山郡), 광한군(廣漢郡), 무도군(武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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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월이 반란을 일으키자 한무제가 격파하니 야량(夜郞)이 입조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5_0010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