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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반고의 말 : 한나라가 화친정책을 폈으나 흉노가 약속을 여겨 화친의 무익함이 드러났음을 설명함

  • 국가
    흉노(匈奴)
과거 화친의 논리는 유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천하가 갓 평정되었고 새롭게 평성의 곤경을 만난 탓에 그의 말을 따라 약속하여 화친을 맺고 선우에게 뇌물을 주어 변경의 안정을 바랐다.주 001
각주 001)
漢高祖가 平城에서 匈奴에게 포위되었다가 劉敬의 화친 제안으로 풀려난 사정은 『漢書』 권43(「酈陸朱劉叔孫傳」 : 21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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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혜제고후 시대에는 [화친의 약속을] 존중하고 어기지 않았으나, 흉노의 침략과 도적질이 줄어들거나 그치지 않았으며, 선우는 도리어 교만한 [태도를] 더하였다.주 002
각주 002)
惠帝 3년(전192) 흉노 冒頓單于가 편지를 보내 남편을 잃은 高后를 조롱한 사건이(『漢書』 권94 「匈奴」上 : 2754∼2755) 이 시기 흉노와 한의 관계를 잘 이야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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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제 때에 이르러서 관시를 열고, [황실]의 딸을 처로 주었으며, 사여하는 재물도 많이 늘려 해마다 천금에 달하였다.주 003
각주 003)
漢文帝는 전원 6년(전174) 시월(『漢書』 권94 「匈奴」上 : 2758)과 후원 2년(전162)(『漢書』 권94 「匈奴」上 : 2762∼2764) 和親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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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흉노는 여러 차례 약속을 어겼고 변경은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다.주 004
각주 004)
文帝시기 匈奴는 전원 3년(전177), 전원 11년(전169), 전원 14년(전166), 후원 6년(전158)에 한을 침공하였다. 『漢書』 권94 「匈奴」上 (2756∼276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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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문제는 [재위 시기] 중간에 크게 발분하여 마침내 몸소 군복을 입고 친히 안장을 올린 말을 몰고, 6군주 005
각주 005)
六郡 : 隴西郡, 天水郡, 安定郡, 北地郡, 上郡, 西河郡을 말한다. 그런데 安定郡과 天水郡, 西河郡은 武帝때 설치된 것이다. 史書에는 文帝 때부터 그 郡이 있는 것처럼 표현했지만, 그것은 소급해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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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良家)의 재력(材力) 있는 군사들을 따라 상림[원]에서 말달리며 활을 쏘고, 전투 대오를 강습하고, 천하의 날랜 병사를 모아 광무(廣武)[성] 주 006
각주 006)
廣武城 : 현재 河南省 滎陽 동북 지역에 있는 廣武山 위에 東과 西의 두 성이 있다. 楚․漢이 싸울 때 유방과 항우가 각각 한 성씩을 점거하고 대치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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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하도록 하였다.주 007
각주 007)
漢文帝 전원 14년(전166)의 일이다. 匈奴 老上單于가 14만기의 기병을 이끌고 침범하여 인민과 가축을 약탈하고 安定郡 彭陽縣까지 들어왔다. 이에 中尉 周舍와 郞中令 張武를 장군으로 삼고 車 1千乘, 騎卒 10만을 일으켜 長安을 방비하였다. 文帝도 친히 군대를 격려하고 병사들을 단속하며 敎令을 내려 스스로 匈奴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신료들이 간쟁하고 皇太后의 만류가 있어 親征은 중단한다. 대신 張相如와 董赤, 欒布 등을 장군으로 삼아 공격하도록 하였다. 匈奴는 塞內에 한 달여 간 머물다가 돌아갔다(『漢書』 권4 「文帝紀」 : 1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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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친정(親征)을 포기한 다음] 풍당(馮唐) 주 008
각주 008)
馮唐 : 安陵 사람이다. 어려서 효행으로 이름이 나 郞中이 되었고 郞署의 長에 올랐다. 文帝代 雲中郡守 魏尙이 공적을 상신하면서 斬首한 匈奴 사람의 숫자에 착오가 생겼다. 이에 文帝가 그의 작위를 박탈하고 벌을 내리려 하자 馮唐은 그러한 조치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에 魏尙은 죄를 사면받고 다시 雲中郡太守가 되었다. 景帝가 즉위한 후, 馮唐은 楚相이 되었고, 武帝 때 90여 세의 나이로 다시 천거되었지만, 대신 아들 馮尙을 郞官으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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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개인적인 문제에 대하여] 물어보다가 더불어 장수(將帥)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크게 탄식하면서 과거의 명신을 생각하였다.주 009
각주 009)
직접 親征에 나서지 못한 文帝는 郞署에 들렀다. 文帝가 馮唐 부친의 집이 어디에 있냐고 묻자 馮唐은 代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文帝가 代에서 자랄 때, 조나라 장수 李齊의 賢함에 대하여 늘 들었노라고 말하였다. 이에 馮唐이 李齊가 廉頗와 李牧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자 文帝는 “아아, 나는 어째서 廉頗와 李牧을 장수로 갖지 못하였는가!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어찌 흉노를 근심하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漢書』 권50, 「馮唐傳」 : 2312∼2313). 『漢書』 「馮唐傳」에서는 위 일화가 언제 발생한 일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資治通鑑』(권15 : 478)에서는 文帝 전원 14년 匈奴가 침공하고 문제가 親征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뒤의 일로 나온다. 『資治通鑑』에서 이렇게 비정한 근거가 위 『漢書』의 문장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일단 『資治通鑑』에 근거해서 주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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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즉 화친의 무익함이 이미 밝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 각주 001)
    漢高祖가 平城에서 匈奴에게 포위되었다가 劉敬의 화친 제안으로 풀려난 사정은 『漢書』 권43(「酈陸朱劉叔孫傳」 : 21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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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惠帝 3년(전192) 흉노 冒頓單于가 편지를 보내 남편을 잃은 高后를 조롱한 사건이(『漢書』 권94 「匈奴」上 : 2754∼2755) 이 시기 흉노와 한의 관계를 잘 이야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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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漢文帝는 전원 6년(전174) 시월(『漢書』 권94 「匈奴」上 : 2758)과 후원 2년(전162)(『漢書』 권94 「匈奴」上 : 2762∼2764) 和親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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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文帝시기 匈奴는 전원 3년(전177), 전원 11년(전169), 전원 14년(전166), 후원 6년(전158)에 한을 침공하였다. 『漢書』 권94 「匈奴」上 (2756∼276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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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六郡 : 隴西郡, 天水郡, 安定郡, 北地郡, 上郡, 西河郡을 말한다. 그런데 安定郡과 天水郡, 西河郡은 武帝때 설치된 것이다. 史書에는 文帝 때부터 그 郡이 있는 것처럼 표현했지만, 그것은 소급해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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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廣武城 : 현재 河南省 滎陽 동북 지역에 있는 廣武山 위에 東과 西의 두 성이 있다. 楚․漢이 싸울 때 유방과 항우가 각각 한 성씩을 점거하고 대치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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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漢文帝 전원 14년(전166)의 일이다. 匈奴 老上單于가 14만기의 기병을 이끌고 침범하여 인민과 가축을 약탈하고 安定郡 彭陽縣까지 들어왔다. 이에 中尉 周舍와 郞中令 張武를 장군으로 삼고 車 1千乘, 騎卒 10만을 일으켜 長安을 방비하였다. 文帝도 친히 군대를 격려하고 병사들을 단속하며 敎令을 내려 스스로 匈奴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신료들이 간쟁하고 皇太后의 만류가 있어 親征은 중단한다. 대신 張相如와 董赤, 欒布 등을 장군으로 삼아 공격하도록 하였다. 匈奴는 塞內에 한 달여 간 머물다가 돌아갔다(『漢書』 권4 「文帝紀」 : 1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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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馮唐 : 安陵 사람이다. 어려서 효행으로 이름이 나 郞中이 되었고 郞署의 長에 올랐다. 文帝代 雲中郡守 魏尙이 공적을 상신하면서 斬首한 匈奴 사람의 숫자에 착오가 생겼다. 이에 文帝가 그의 작위를 박탈하고 벌을 내리려 하자 馮唐은 그러한 조치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에 魏尙은 죄를 사면받고 다시 雲中郡太守가 되었다. 景帝가 즉위한 후, 馮唐은 楚相이 되었고, 武帝 때 90여 세의 나이로 다시 천거되었지만, 대신 아들 馮尙을 郞官으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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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직접 親征에 나서지 못한 文帝는 郞署에 들렀다. 文帝가 馮唐 부친의 집이 어디에 있냐고 묻자 馮唐은 代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文帝가 代에서 자랄 때, 조나라 장수 李齊의 賢함에 대하여 늘 들었노라고 말하였다. 이에 馮唐이 李齊가 廉頗와 李牧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자 文帝는 “아아, 나는 어째서 廉頗와 李牧을 장수로 갖지 못하였는가!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어찌 흉노를 근심하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漢書』 권50, 「馮唐傳」 : 2312∼2313). 『漢書』 「馮唐傳」에서는 위 일화가 언제 발생한 일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資治通鑑』(권15 : 478)에서는 文帝 전원 14년 匈奴가 침공하고 문제가 親征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뒤의 일로 나온다. 『資治通鑑』에서 이렇게 비정한 근거가 위 『漢書』의 문장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일단 『資治通鑑』에 근거해서 주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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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유경, 효혜제, 고후, 효문제, 문제, 문제, 풍당(馮唐)
지명
평성, , 광무(廣武)[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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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의 말 : 한나라가 화친정책을 폈으나 흉노가 약속을 여겨 화친의 무익함이 드러났음을 설명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4_1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