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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반고의 말 : 한대 이후 흉노와의 관계에 있어 화친 및 정벌이 지속되었음을 설명함

  • 국가
    흉노(匈奴)
[반고(班固)는] 밝혀 말한다. 『서(書)주 001
각주 001)
『書』 : 『尙書』라고도 한다. ‘尙’이란 上古를 뜻하고 ‘書’란 竹帛 위에 쓴 역사 기록이란 의미이다. 즉 『尙書』란 ‘上古의 史書’를 뜻한다. 주로 商․周 두 시대 통치자의 講話를 기록하였다. 商代와 관련된 몇 편은 周代에 流傳되었는데, 周代 사람들의 표현 방식에 영향을 받았으며 周代 宋國의 史官이 윤식을 가하기도 하였다. 별도의 4편은 虞夏의 書로 알려져 있는데, 「甘誓」가 商周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 밖에 「堯典」․「皋陶謨」․「禹貢」 등은 춘추전국시대에 가공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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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만이가 제하(諸夏)를 어지럽혔”음을 경계하였다.주 002
각주 002)
이 구절은 『尙書』 「虞書」의 「舜典」에서 舜 임금이 皋陶를 士로 삼으면서 명령하는 말 가운데 나온다. 순 임금은 “皐陶여! 蠻夷가 諸夏를 어지럽히고, 寇賊이 안팎으로 들끓고 있소. 너를 士로 임명하니, 다섯 가지 형벌을 행하고 ……”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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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03
각주 003)
『詩』 : 중국 최초의 詩歌集으로 西周에서 春秋 중기까지 대략 500년간 305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크게 「風」․「雅」․「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風」은 「國風」이라고도 하는데 각지의 民歌를 수록하였다. 「雅」는 귀족의 작품을 모아 놓은 「大雅」와 民歌도 포함하고 있는 「小雅」로 구분된다. 「頌」은 귀족들이 신령과 조상에게 제사지낼 때 부르던 詩歌를 수록한 것인데, 「周頌」․「魯頌」․「商頌」으로 구분된다. 『詩』는 고대인들의 예술적 창조물이며 아울러 당시 사회생활과 典章 제도, 풍속 습관 등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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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융적을 무찌른” 일을 칭찬하였다.주 004
각주 004)
「魯頌」에는 ‘駉’․‘有駜’․‘泮水’․‘閟宮’ 등 4편의 시가 있다. 이들 詩의 풍격은 廟에서 제사를 지낼 때 불리는 「頌」보다는 「風」과 「雅」에 가깝다. 그 가운데 ‘閟宮’편은 魯 僖公이 오랑캐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하고, 善政을 베푸는 것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원문 구절의 전후 내용은 다음과 같다. “僖公의 군대는 3만 명인데, 조개 장식 갑옷을 붉은 실로 꿰맸으며, 많은 무리들 시끌시끌하네. 戎狄을 무찌르고 남쪽 나라를 경계하니, 아무도 감히 우리에게 맞서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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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주 005
각주 005)
『春秋』 :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編年體 史書다. 魯國의 隱公 元年(전772)에서 哀公 14년(전481) 혹은 16년(전479)까지의 사건들을 기록하였다. 문장이 간략하고 殘缺의 부분이 있으나, 1만 6천여 자의 분량에 이른다. 紀年은 비록 魯國을 기준으로 하지만, 기술 범위는 주변 지역을 포괄한다. 내용은 정치, 군사, 경제, 문화, 천문기상, 물질생산, 사회생활 등 다방면에 관련된다. 기술 내용은 비록 짧지만 그 정확성은 높이 평가된다. 가령 日食이 37차 등장하는데, 현대 천문학자들은 36차의 日食이 실제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 점에서 『春秋』를 후대의 杜撰으로 보기는 어렵다. 작자는 孔子로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는 魯國의 역대 史官들이 편찬한 것이며, 『春秋』의 학습과 연구가 孔子에서 시작되었다. 현존의 『春秋』는 『左傳』․『公羊傳』․『穀梁傳』 등 三傳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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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천자에게) 도(道)가 있으면 오랑캐들이 [제하(諸夏)를] 방비한다”고 하였다.주 006
각주 006)
원문에서 “有道守在四夷”가 『春秋』에 나온다고 하였으나, 실제 동일한 구절은 없다. 顔師古는 그것이 『左傳』 昭公 23년조의 “古者天子, 守在四夷”를 말한다고 하였다. 당시 楚나라 囊瓦가 令尹이 되어 郢에 築城하자 沈尹인 戌은 “囊瓦는 반드시 郢을 멸망시킬 것이다. …… 고대에는 天子의 守衛가 四夷에 있었다. …… 백성에게 안으로 근심이 없고, 밖으로 두려움이 없다면 국가에게 城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라며 토목공사를 비판하였다. 顔師古는 그것이 천자의 德이 멀리 [四夷에게] 미친다는 말이라 하였는데, 그 의미는 (天子가) 四夷를 和柔하면, 그들이 諸夏의 侍衛가 된다는 것이다(竹添光鴻, 『左傳會箋』, 楊伯峻 :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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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었구나! 이적의 근심이 되었음이.
그래서 이 흥기한 이래, 일찍이 충성스런 말로 [간쟁하고] 훌륭한 계책을 [세웠던] 신하들이 어찌 조정주 007
각주 007)
원문의 “廟堂”은 원래 종묘와 明堂을 말하는데, 朝廷을 지칭한다. 조정에서 국사를 의결 집행하기 전에 먼저 宗廟에서 조상에게 고하고 群臣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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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서로 논쟁하지 않았겠는가? 고조 시기에는 유경(劉敬) 주 008
각주 008)
劉敬 : 본명은 婁敬이다. 齊나라 사람으로 漢高祖 5년(전220)에 낙양으로 와서 劉邦을 만나, 關中 천도를 권유했다. 郞中으로 임명되었고 劉氏 성을 사여받았다. 關內侯로 봉해졌고 建信侯라 칭했다. 유방이 平城에서 匈奴에 포위되었을 때, 종실의 여자를 匈奴 선우에게 보내어 和親할 것을 주장했다. 그 뒤 과거 六國 귀족의 후예들을 關中으로 옮겨 지방의 할거 세력을 약화시키도록 하였다. 박학다식하였으며 『漢書』 「藝文志」에 의하면, 『劉敬』 3篇을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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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후 시기에는 번쾌·계포, 효문제 시기에는 가의(賈誼) 주 009
각주 009)
賈誼(전201∼전168) : 洛陽 사람으로 詩書의 암기에 능하고 문장을 잘 지어 어린 나이에 이름을 날렸다. 18세 때 河南 군수 吳公이 그를 門下에 두었다. 文帝가 즉위한 뒤, 吳公의 추천을 받아 겨우 20여 세에 博士로 임명되었다. 매번 朝議에 참가하여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太中大夫로 승진하였다. 그는 正朔 개정과 服色제도의 개혁, 禮樂의 진작과 法令의 개정 등 다방면의 개혁안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중신이었던 周勃과 灌嬰 등의 견제를 받아 長沙王 太傅로 좌천된다. 이때 지은 「鵩鳥賦」가 남아 있어 당시 그의 심정을 전하고 있다. 그 후 특별히 문제의 부름을 받아 梁懷王 太傅로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治安의 방도를 상소하였다. 文帝 전원 11년 梁懷王이 낙마하여 사망하자 그 일을 자책하다가 33세의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漢書』 「藝文志」에 賈誼의 저서로 『賈子』 58편, 賦 7편이 보인다. 그의 정치사상이 반영된 글로 『治安策』과 『過秦論』을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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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朝錯) 주 010
각주 010)
朝錯(?∼전154) : 朝錯는 『史記』 권101, 『漢書』 권49에 立傳된 鼂錯이고 통상 이렇게 쓰나, 朝錯 혹은 晁錯라고도 한다. 景帝 때 주로 활동한 政論家이다. 潁川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申不害와 商鞅 등의 刑名之學을 배웠다. 文學으로 太常掌故로 임명되었다. 이 때 伏生에게 가서 今文 『尙書』를 배웠다. 그 뒤 太子舍人 文大夫 등을 역임하다가 博士와 太子家令으로 遷任되었다. 太子 劉啓(훗날 景帝)의 신임을 얻었으며 ‘智囊’이란 별명도 얻었다. 鼂錯는 匈奴와 토지 겸병문제에 대하여 여러 차례 上書하여 邊塞의 방어와 勸農이 급선무임을 설파했다. 또한 徙民實邊 정책과 邊塞에 곡물을 보내면 작위를 주고 죄를 사하는 정책 등을 세워 실현시켰다. 그 후 中大夫로 천임되어 諸侯王의 권력을 삭탈하고 법령 개정을 주장하여 중앙집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는데, 景帝는 이를 받아들여 削藩의 조치를 단행한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諸侯國들이 이른바 吳楚七國의 난을 일으켰으며, 景帝는 이들을 무마하기 위해 鼂錯를 처형하였다. 『漢書』 「藝文志」에 의하면 『鼂錯 31篇』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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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무제 시기에는 왕회(王恢) 주 011
각주 011)
王恢(?∼전134) : 燕 지역 출신이다. 여러 차례 邊吏로 일하다가 武帝 建元 4년(전137)에 大行令이 되었다. 건원 6년 閩越과 東越이 싸우자, 韓安國과 함께 출병하였다. 한편 匈奴의 사신이 와서 화친을 요구하자, 무제는 廷議를 개최하였는데, 王恢는 이 자리에서 화친을 반대하고 전쟁을 주장했다. 元光 2년(전133)에는 將屯將軍에 임명되어, 馬邑에서 匈奴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눈치를 챈 匈奴 군대가 철수하여 실패한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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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안국(韓安國) 주 012
각주 012)
韓安國(?∼전127) : 字는 長孺이고, 梁國 成安 사람이다. 처음 梁孝王 劉武 밑에서 中大夫로 있었다. 吳楚七國의 난 때 叛軍이 梁國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武帝 建元 연간(전140∼전135)에는 北地都尉로 徵召되었고, 大司農, 御史大夫로 천임되었다. 元光 2년(전133)에는 馬邑에서 匈奴를 습격하는데 참여하였다. 元朔 2년(전127) 材官將軍으로 임명되어 漁陽郡에 주둔하였다. 匈奴가 멀리 도망하였다는 이유로 변경의 軍屯 철폐를 주장하였으나 얼마 뒤 匈奴가 대거 침공하여 大敗하였다. 그 뒤 右北平에 주둔하다가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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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매신(朱買臣) 주 013
각주 013)
朱買臣(?∼전115) : 자는 翁子이며, 吳人이다. 일찍이 집안이 가난하여 땔나무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 후 무제에게 발탁이 되어 中大夫로 임명되었다. 東越王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자 무제에게 東越 토벌책을 제시하고 會稽太守로 임명되었다. 東越을 격파한 뒤, 主爵都尉로 徵召되었고 丞相府 長史가 되었을 때, 張湯을 고발하여 자살시켰으나 그 자신도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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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홍(公孫弘) 주 014
각주 014)
公孫弘(전200∼전121) : 漢武帝 때의 丞相이다. 淄川薛人이다. 빈한한 집안의 출신으로 獄吏였다가 면직되어 돼지를 기르며 살았다. 40여 세 때 비로소 『春秋』 雜說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武帝가 賢良文學을 徵召할 때 천거되어 博士가 되었다. 후에 匈奴에 사행을 갔다가 武帝의 뜻을 어겨 면직되어 돌아왔다. 元光 5년 다시 博士로 임명되어 金馬門에서 待詔하였다. 공손홍은 법률을 잘 알고, 아울러 儒術로 수식할 줄 알았다. 무제의 환심을 사서 御史大夫와 丞相을 역임하였는데, 漢代 평민 출신으로 丞相이 된 첫 사례이다. 平津侯로 봉해졌다. 공손홍은 향후 儒士가 고위 관료로 진출하는 선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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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서(董仲舒) 주 015
각주 015)
董仲舒(전179∼전104) : 전한시기 儒家 公羊學派의 大師이고 今文經學의 창시자로 칭해진다. 廣川 사람이다. 어려서 『春秋』를 공부하여 景帝 때 博士가 되었다. 연구에 몰두하여 3년 동안 마당에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武帝 建元元年 賢良對策으로 武帝의 칭찬을 받는다. 이 대책문에서 ‘天人感應’, ‘君權神授’ 등을 표방하여 유가 神學化의 길을 열었고 ‘三綱五常’의 윤리체계를 세우고, 春秋大一統의 정치사상을 주장했다. 또한 儒術 獨尊을 요구하여 太學을 설립하고 州郡에서 秀才와 孝廉 등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限田과 奴婢제도 폐지, 賦役 경감 등도 요구하였다. 江都國의 相 등을 역임하고 사직한 뒤 학문에 몰두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현재 『春秋繁露』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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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사람마다 자기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각각 같고 다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요점을 총괄하면 두 가지 항목으로 나눌 수 있을 따름이다.
허리띠에 [홀(笏)을] 꽂고 있는주 016
각주 016)
“縉紳”의 번역이다. 文官의 복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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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儒者)들은 화친을 지키자고 하고,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무사들은 정벌을 주장하였으나, 모두 한때의 이익과 해로움만을 치우쳐 보았을 뿐, 흉노[와 한 관계]의 전 과정을 깊이 고려하지는 못하였다.
흥기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이 지나 『춘추』[의 244년]보다 오래되었다.주 017
각주 017)
『春秋』는 隱公 1년부터 哀公 14년까지 모두 244년 동안의 編年史이며, 漢의 건립 이래 班固가 『漢書』를 완성한 시기인 章帝 建初 연간(76∼83)까지는 3백 년이 조금 못 미치는 기간이다. 그래서 『春秋』보다 오래되었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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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흉노 사이에는 문치에 주력하여 화친한 때도 있었고, 무력을 사용하여 정복한 때도 있었으며, [이 스스로를] 비하하고 [흉노를] 받들어 섬긴 경우도 있었고, 위압으로 복종시켜 신하로 부린 경우도 있었다. [의 흉노 정책이] 굽히기도 하고 떨치기도 하며 다양하게 변화하였는데, [시기마다 국세의] 강함과 약함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 상세[한 사정]은 가히 설명할 수 있다.

  • 각주 001)
    『書』 : 『尙書』라고도 한다. ‘尙’이란 上古를 뜻하고 ‘書’란 竹帛 위에 쓴 역사 기록이란 의미이다. 즉 『尙書』란 ‘上古의 史書’를 뜻한다. 주로 商․周 두 시대 통치자의 講話를 기록하였다. 商代와 관련된 몇 편은 周代에 流傳되었는데, 周代 사람들의 표현 방식에 영향을 받았으며 周代 宋國의 史官이 윤식을 가하기도 하였다. 별도의 4편은 虞夏의 書로 알려져 있는데, 「甘誓」가 商周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 밖에 「堯典」․「皋陶謨」․「禹貢」 등은 춘추전국시대에 가공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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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이 구절은 『尙書』 「虞書」의 「舜典」에서 舜 임금이 皋陶를 士로 삼으면서 명령하는 말 가운데 나온다. 순 임금은 “皐陶여! 蠻夷가 諸夏를 어지럽히고, 寇賊이 안팎으로 들끓고 있소. 너를 士로 임명하니, 다섯 가지 형벌을 행하고 ……”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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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詩』 : 중국 최초의 詩歌集으로 西周에서 春秋 중기까지 대략 500년간 305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크게 「風」․「雅」․「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風」은 「國風」이라고도 하는데 각지의 民歌를 수록하였다. 「雅」는 귀족의 작품을 모아 놓은 「大雅」와 民歌도 포함하고 있는 「小雅」로 구분된다. 「頌」은 귀족들이 신령과 조상에게 제사지낼 때 부르던 詩歌를 수록한 것인데, 「周頌」․「魯頌」․「商頌」으로 구분된다. 『詩』는 고대인들의 예술적 창조물이며 아울러 당시 사회생활과 典章 제도, 풍속 습관 등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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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魯頌」에는 ‘駉’․‘有駜’․‘泮水’․‘閟宮’ 등 4편의 시가 있다. 이들 詩의 풍격은 廟에서 제사를 지낼 때 불리는 「頌」보다는 「風」과 「雅」에 가깝다. 그 가운데 ‘閟宮’편은 魯 僖公이 오랑캐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하고, 善政을 베푸는 것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원문 구절의 전후 내용은 다음과 같다. “僖公의 군대는 3만 명인데, 조개 장식 갑옷을 붉은 실로 꿰맸으며, 많은 무리들 시끌시끌하네. 戎狄을 무찌르고 남쪽 나라를 경계하니, 아무도 감히 우리에게 맞서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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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春秋』 :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編年體 史書다. 魯國의 隱公 元年(전772)에서 哀公 14년(전481) 혹은 16년(전479)까지의 사건들을 기록하였다. 문장이 간략하고 殘缺의 부분이 있으나, 1만 6천여 자의 분량에 이른다. 紀年은 비록 魯國을 기준으로 하지만, 기술 범위는 주변 지역을 포괄한다. 내용은 정치, 군사, 경제, 문화, 천문기상, 물질생산, 사회생활 등 다방면에 관련된다. 기술 내용은 비록 짧지만 그 정확성은 높이 평가된다. 가령 日食이 37차 등장하는데, 현대 천문학자들은 36차의 日食이 실제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 점에서 『春秋』를 후대의 杜撰으로 보기는 어렵다. 작자는 孔子로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는 魯國의 역대 史官들이 편찬한 것이며, 『春秋』의 학습과 연구가 孔子에서 시작되었다. 현존의 『春秋』는 『左傳』․『公羊傳』․『穀梁傳』 등 三傳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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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원문에서 “有道守在四夷”가 『春秋』에 나온다고 하였으나, 실제 동일한 구절은 없다. 顔師古는 그것이 『左傳』 昭公 23년조의 “古者天子, 守在四夷”를 말한다고 하였다. 당시 楚나라 囊瓦가 令尹이 되어 郢에 築城하자 沈尹인 戌은 “囊瓦는 반드시 郢을 멸망시킬 것이다. …… 고대에는 天子의 守衛가 四夷에 있었다. …… 백성에게 안으로 근심이 없고, 밖으로 두려움이 없다면 국가에게 城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라며 토목공사를 비판하였다. 顔師古는 그것이 천자의 德이 멀리 [四夷에게] 미친다는 말이라 하였는데, 그 의미는 (天子가) 四夷를 和柔하면, 그들이 諸夏의 侍衛가 된다는 것이다(竹添光鴻, 『左傳會箋』, 楊伯峻 :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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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원문의 “廟堂”은 원래 종묘와 明堂을 말하는데, 朝廷을 지칭한다. 조정에서 국사를 의결 집행하기 전에 먼저 宗廟에서 조상에게 고하고 群臣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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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劉敬 : 본명은 婁敬이다. 齊나라 사람으로 漢高祖 5년(전220)에 낙양으로 와서 劉邦을 만나, 關中 천도를 권유했다. 郞中으로 임명되었고 劉氏 성을 사여받았다. 關內侯로 봉해졌고 建信侯라 칭했다. 유방이 平城에서 匈奴에 포위되었을 때, 종실의 여자를 匈奴 선우에게 보내어 和親할 것을 주장했다. 그 뒤 과거 六國 귀족의 후예들을 關中으로 옮겨 지방의 할거 세력을 약화시키도록 하였다. 박학다식하였으며 『漢書』 「藝文志」에 의하면, 『劉敬』 3篇을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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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賈誼(전201∼전168) : 洛陽 사람으로 詩書의 암기에 능하고 문장을 잘 지어 어린 나이에 이름을 날렸다. 18세 때 河南 군수 吳公이 그를 門下에 두었다. 文帝가 즉위한 뒤, 吳公의 추천을 받아 겨우 20여 세에 博士로 임명되었다. 매번 朝議에 참가하여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太中大夫로 승진하였다. 그는 正朔 개정과 服色제도의 개혁, 禮樂의 진작과 法令의 개정 등 다방면의 개혁안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중신이었던 周勃과 灌嬰 등의 견제를 받아 長沙王 太傅로 좌천된다. 이때 지은 「鵩鳥賦」가 남아 있어 당시 그의 심정을 전하고 있다. 그 후 특별히 문제의 부름을 받아 梁懷王 太傅로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治安의 방도를 상소하였다. 文帝 전원 11년 梁懷王이 낙마하여 사망하자 그 일을 자책하다가 33세의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漢書』 「藝文志」에 賈誼의 저서로 『賈子』 58편, 賦 7편이 보인다. 그의 정치사상이 반영된 글로 『治安策』과 『過秦論』을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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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朝錯(?∼전154) : 朝錯는 『史記』 권101, 『漢書』 권49에 立傳된 鼂錯이고 통상 이렇게 쓰나, 朝錯 혹은 晁錯라고도 한다. 景帝 때 주로 활동한 政論家이다. 潁川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申不害와 商鞅 등의 刑名之學을 배웠다. 文學으로 太常掌故로 임명되었다. 이 때 伏生에게 가서 今文 『尙書』를 배웠다. 그 뒤 太子舍人 文大夫 등을 역임하다가 博士와 太子家令으로 遷任되었다. 太子 劉啓(훗날 景帝)의 신임을 얻었으며 ‘智囊’이란 별명도 얻었다. 鼂錯는 匈奴와 토지 겸병문제에 대하여 여러 차례 上書하여 邊塞의 방어와 勸農이 급선무임을 설파했다. 또한 徙民實邊 정책과 邊塞에 곡물을 보내면 작위를 주고 죄를 사하는 정책 등을 세워 실현시켰다. 그 후 中大夫로 천임되어 諸侯王의 권력을 삭탈하고 법령 개정을 주장하여 중앙집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는데, 景帝는 이를 받아들여 削藩의 조치를 단행한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諸侯國들이 이른바 吳楚七國의 난을 일으켰으며, 景帝는 이들을 무마하기 위해 鼂錯를 처형하였다. 『漢書』 「藝文志」에 의하면 『鼂錯 31篇』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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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王恢(?∼전134) : 燕 지역 출신이다. 여러 차례 邊吏로 일하다가 武帝 建元 4년(전137)에 大行令이 되었다. 건원 6년 閩越과 東越이 싸우자, 韓安國과 함께 출병하였다. 한편 匈奴의 사신이 와서 화친을 요구하자, 무제는 廷議를 개최하였는데, 王恢는 이 자리에서 화친을 반대하고 전쟁을 주장했다. 元光 2년(전133)에는 將屯將軍에 임명되어, 馬邑에서 匈奴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눈치를 챈 匈奴 군대가 철수하여 실패한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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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韓安國(?∼전127) : 字는 長孺이고, 梁國 成安 사람이다. 처음 梁孝王 劉武 밑에서 中大夫로 있었다. 吳楚七國의 난 때 叛軍이 梁國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武帝 建元 연간(전140∼전135)에는 北地都尉로 徵召되었고, 大司農, 御史大夫로 천임되었다. 元光 2년(전133)에는 馬邑에서 匈奴를 습격하는데 참여하였다. 元朔 2년(전127) 材官將軍으로 임명되어 漁陽郡에 주둔하였다. 匈奴가 멀리 도망하였다는 이유로 변경의 軍屯 철폐를 주장하였으나 얼마 뒤 匈奴가 대거 침공하여 大敗하였다. 그 뒤 右北平에 주둔하다가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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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朱買臣(?∼전115) : 자는 翁子이며, 吳人이다. 일찍이 집안이 가난하여 땔나무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 후 무제에게 발탁이 되어 中大夫로 임명되었다. 東越王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자 무제에게 東越 토벌책을 제시하고 會稽太守로 임명되었다. 東越을 격파한 뒤, 主爵都尉로 徵召되었고 丞相府 長史가 되었을 때, 張湯을 고발하여 자살시켰으나 그 자신도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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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公孫弘(전200∼전121) : 漢武帝 때의 丞相이다. 淄川薛人이다. 빈한한 집안의 출신으로 獄吏였다가 면직되어 돼지를 기르며 살았다. 40여 세 때 비로소 『春秋』 雜說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武帝가 賢良文學을 徵召할 때 천거되어 博士가 되었다. 후에 匈奴에 사행을 갔다가 武帝의 뜻을 어겨 면직되어 돌아왔다. 元光 5년 다시 博士로 임명되어 金馬門에서 待詔하였다. 공손홍은 법률을 잘 알고, 아울러 儒術로 수식할 줄 알았다. 무제의 환심을 사서 御史大夫와 丞相을 역임하였는데, 漢代 평민 출신으로 丞相이 된 첫 사례이다. 平津侯로 봉해졌다. 공손홍은 향후 儒士가 고위 관료로 진출하는 선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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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董仲舒(전179∼전104) : 전한시기 儒家 公羊學派의 大師이고 今文經學의 창시자로 칭해진다. 廣川 사람이다. 어려서 『春秋』를 공부하여 景帝 때 博士가 되었다. 연구에 몰두하여 3년 동안 마당에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武帝 建元元年 賢良對策으로 武帝의 칭찬을 받는다. 이 대책문에서 ‘天人感應’, ‘君權神授’ 등을 표방하여 유가 神學化의 길을 열었고 ‘三綱五常’의 윤리체계를 세우고, 春秋大一統의 정치사상을 주장했다. 또한 儒術 獨尊을 요구하여 太學을 설립하고 州郡에서 秀才와 孝廉 등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限田과 奴婢제도 폐지, 賦役 경감 등도 요구하였다. 江都國의 相 등을 역임하고 사직한 뒤 학문에 몰두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현재 『春秋繁露』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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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縉紳”의 번역이다. 文官의 복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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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春秋』는 隱公 1년부터 哀公 14년까지 모두 244년 동안의 編年史이며, 漢의 건립 이래 班固가 『漢書』를 완성한 시기인 章帝 建初 연간(76∼83)까지는 3백 년이 조금 못 미치는 기간이다. 그래서 『春秋』보다 오래되었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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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반고(班固), 고조, 유경(劉敬), 여후, 번쾌, 계포, 효문제, 가의(賈誼), 조조(朝錯), 효무제, 왕회(王恢), 한안국(韓安國), 주매신(朱買臣), 공손홍(公孫弘), 동중서(董仲舒)
지명
, , , ,
서명
서(書), , 춘추,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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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의 말 : 한대 이후 흉노와의 관계에 있어 화친 및 정벌이 지속되었음을 설명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4_1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