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虎猛”은 현의 이름이다. 制虜塞는 그 경계 안에 있다. 西河郡은 漢武帝 元朔 4년(전125)에 설치되었다. 치소는 平定縣(현재 內蒙古 伊金霍洛旗 동남 경계)이다. 일설에는 富昌縣이라고도 한다. 관할 戶數는 13만 6천 390이고 口數는 69만 8천 836이다. 36개의 현을 관할하였다. 虎猛縣은 西部都尉의 치소이다. 後漢, 曹魏시대에는 치소의 위치가 바뀌었고, 西晉시대에는 西河國이 되었다가 이후 다시 西河郡으로 바뀌었다. 制虜塞의 위치는 현재 內蒙古 伊金霍洛旗 서남의 紅慶河 古城에 비정되고 있다.
中部都尉 : 秦代 이래 漢武帝 이전까지 邊郡에 설치된 都尉는 오로지 蠻夷를 관할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郡守의 지휘권 아래 속해 있기도 했고, 그러지 않기도 하였다. 마치 후한대 屬國과 같았다. 그러나 漢武帝 이후 邊郡에 모두 郡守가 설치되고, 都尉는 漢의 군대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신 屬國都尉를 신설하여 蠻夷 관장의 업무를 맡게 하였다(嚴耕望, 1961 : 160). 都尉는 1郡 안에 여러 개가 설치되는데, 東․西․南․北․中 등의 방위가 이름 앞에 오고 이를 五部都尉라고 한다. 『漢書』 「地理志」에 따르면 西河郡에는 屬國都尉(치소는 美稷縣), 南部都尉(塞外 翁龍․埤是), 西部都尉(虎猛縣), 北部都尉(千章․增山) 등이 보일 뿐 中部都尉는 없으나, 위의 기록처럼 설치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騎都尉 : 騎都尉의 설치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진한교체기 靳歙이 騎都尉로 劉邦을 도와 三秦 지역을 평정하였다. 전한시기 秩祿 比二千石의 무관으로 皇帝를 측근에서 시위하며 많은 경우 侍中을 加官으로 갖는다. 宣帝代 西域都護를 두고 騎都尉를 그 자리에 임명하였는데, 이후 그것이 제도가 되었다.
원문의 “焚如之刑”에 대하여 應劭는 『易經』에는 焚如, 死如, 棄如라는 말이 있어 王莽은 그에 따라 刑名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如淳은 焚如, 死如, 棄如 등이 모두 불효자식을 [다스리는 형벌을] 말하며 이들은 부모가 기를 수 없고, 친구들이 포용할 수 없으니, 燒殺한 뒤 버린다고 하였다.
天鳳원년(14) 변경지역에는 큰 기근이 들어 ‘人相食’의 참극이 벌어졌다. 諫大夫 如普가 변경의 군부대를 시찰하고 돌아와 “軍士들이 장기간 주둔하면서 추위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邊郡에서는 그들을 구휼할 수 없습니다. 지금 單于가 새롭게 화친의 관계를 맺으니, 응당 변경의 주둔군을 철수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校尉 韓威의 반대가 있기는 하였으나, 王莽은 如普의 주장을 받아들여 변경의 諸將을 철수시키고, 아울러 陳欽 등 18인을 면직시켰다(『資治通鑑』 권37 : 1203). 이때 유일하게 철수시키지 않은 游擊都尉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王莽이 將軍으로 임명한 韓威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漢故事”란 한과 匈奴가 和親을 맺을 경우, 한에서는 匈奴가 필요로 하는 歲幣를 제공하는 대신 匈奴는 한의 변경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상호간의 약속을 의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