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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흉노를 정벌하려는 왕망의 계획을 장군 엄우(嚴尤)가 간쟁하며 말렸지만 왕망이 거절함

  • 국가
    흉노(匈奴)
왕망의 장군 엄우(嚴尤) 주 001
각주 001)
嚴尤(?∼23) : 王莽 때의 大臣이다. 建國 3년(11) 王莽이 군대를 내어 匈奴를 공격할 때, 嚴尤는 討穢將軍이었다. 그 뒤 高句麗가 新을 離叛하자, 王莽은 嚴尤를 파견하여 공격한 뒤 고구려의 이름을 ‘下句麗’로 바꾸었다. 이 일로 嚴尤는 武建伯이 되었다. 天鳳 3년(16) 大司馬에 제수되었다. 6년에는 王莽의 西夷 정벌을 비판하였다가 免官되었다. 얼마 뒤 納言大將軍이 되어 綠林軍을 막았다. 更始 원년(23) 昆陽의 전투에서 패한 뒤, 汝南에 있는 漢 皇族 劉聖의 세력에 투항하여 大司馬의 지위를 얻었으나 얼마 뒤 피살되었다. 「匈奴傳」에는 嚴尤의 高句麗 공격이 등장하지 않지만 『三國史記』 권13 「高句麗本紀」에 관련 기사가 있다. 당시 遼西尹 田譚이 邊塞를 侵寇한 고구려 군대를 추격하다가 피살되었는데, 嚴尤는 이 일을 지나치게 문제삼을 경우 도리어 高句麗가 背叛할 것이고 이에 夫餘․濊貊도 동조할 수 있기 때문에, 慰安策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王莽은 듣지 않고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嚴尤는 고구려 장수 延丕를 꾀어 목을 베어 京師에 보냈다. 이에 王莽이 기뻐하여 고구려왕을 ‘下句麗侯’라고 改稱하고 천하에 布告하였으나, 이후 高句麗의 侵寇는 더욱 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漢書』 권99중, 「王莽傳」(4130)에는 嚴尤가 高句麗侯 騶를 유인 살해했다고 하였다. ‘我將 延丕’를 살해했다는 『三國史記』와 다르다. 이 점에 대하여 이병도는 『漢書』의 기록이 誤傳 내지 과장이 아닐까 추정하였다(『國譯 三國史記』 권13 :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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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다음과 같이] 간쟁하였다. “신이 듣건대 흉노가 [중국에] 해를 입히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었습니다만, 상고시기에 [그들을] 반드시 정벌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후대 ·· 세 왕조에서 정벌하였습니다만, 모두 상책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주(周)는 중책(中策), 은 하책(下策)을 얻고, 은 무책(無策)이었습니다. 선왕(宣王) 주 002
각주 002)
周 宣王(재위 전827∼전782) : 西周 제11대 王이다. 姬姓이고 이름은 靜이다. 周 厲王의 아들이다. 厲王 때 國人의 난이 일어나자 대신 召穆公 虎가 太子 靜을 구해 내었다. 共和 14년(전828) 厲王이 사망하자, 대신들은 靜을 王으로 옹립하였다. 宣王은 즉위한 뒤 召穆公과 周定公, 尹吉甫 등 대신을 등용하여 朝政을 정비하여 일시 중흥기를 가져왔다. 宣王의 주요 공적은 周朝를 침공한 戎狄과 淮夷를 토벌한 것이다. 재위 5년에는 尹吉甫와 獫允(西戎)을 정벌하였다. 江漢 지구를 침공한 淮夷는 召穆公 등에게 명령하여 토벌하게 하고, 淮水 유역의 최강대국인 徐國을 복종시켰다. 뿐만 아니라 荊蠻도 정벌하였다. 南土 지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舅․弟를 봉건하였다. 그러나 宣王의 중흥기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재위 30년 이후에는 戎과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였고,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太原에서 ‘料民’하기도 하였다. 宣王은 모두 46년간 재위하였고 幽王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幽王 때 西周는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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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험윤(獫允)주 003
각주 003)
獫允 : 지금의 섬서성, 감숙성 북부와 內蒙古 자치구 서부에 토착하였던 종족을 말한다. 『史記』에는 “獫允”을 “獫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史記集解』에서 晉灼은 “堯임금 때는 葷粥, 周代에는 獫狁, 秦代에는 匈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史記』 권110, 「匈奴列傳」 : 2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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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으로 침략해 경양(涇陽) 주 004
각주 004)
“涇陽”은 현재 섬서성 중부 涇河의 서북 지역이다. 본래 西周의 邑이었고, 戰國時代 秦나라는 이곳에 도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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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머물렀습니다. [선왕은] 장군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으나, 변경을 보존한 뒤 돌아왔을 뿐입니다. 융적의 침입을 보길 마치 모기나 등애가 쏘는 것에 비유하여 쫓아낼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은] 그 현명함을 칭양하였습니다. 이것이 중책입니다. 무제 때에는 장수를 선발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옷가지와 짐] 식량을 소량만 가지고서 [흉노의 진영] 깊숙이 멀리 들어가 지켰습니다. 비록 [전투에] 승리하고 [적의 수급을] 얻는 공적을 세운 일은 있었습니다만 오랑캐는 그때마다 보복하였습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그 참화는 30여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중국은 피폐해졌으며 흉노 또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천하가 그 무위(武威)를 칭송하였으나, 이는 하책(下策)입니다. 진시황은 작은 수치를 참지 못하고 민력을 가볍게 여겨 견고한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는데 그 길이가 만 리(萬里)나 이어졌습니다. [공사 물자의] 운반 행렬은 해안 지대로부터 시작되었고 강역의 경계는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지라도, 중국의 내부는 고갈되어 사직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는 무책(無策)입니다.
지금 천하는 양구(陽九)의 액년주 005
각주 005)
陽九 : 陰陽五行에 기초한 術數學에서는 天文과 曆數에 따라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데, “陽九”란 陽의 五厄과 陰의 四厄을 합친 재난을 말한다. 『漢書』(권21上) 「律曆志」에는 “『周易』의 九戹說에 따르면, 元年에 진입한 뒤, 106년 동안 旱災가 9차례 발생하고, 그 다음 374년 동안에는 水災가 9차례 발생하고 …… 모두 4617년이 되면 一元이 結束된다. 4560년을 거치면서 재해가 발생한 해는 57년이다”(『漢書』 : 948)라고 하였다. 다른 한편 “陽九”를 太乙數라고 하여 456년 동안 한 번의 ‘陽九’, 288년 동안 한 번의 ‘百六’의 때가 찾아와 재해가 발생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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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나 매년 기근이 들고 있습니다. 서북 변경지대는 특히 심합니다. 30만의 군대를 일으키고 300일 먹을 수 있는 군량을 갖추려면, 동쪽으로 발해태산[이 있는 청주(靑州) 지역주 006
각주 006)
원문은 “海代”이다. 胡三省은 여기서 ‘代’는 응당 ‘岱’이고 ‘岱山’을 뜻한다고 했다(『資治通鑑』 : 1192). 岱山은 산동성 태안시에 있는 泰山의 별칭이다. 『尙書』 「禹貢」편에 “海岱惟靑州”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渤海와 泰山 사이의 지역이 靑州”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海岱”란 靑州 지역을 지칭하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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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물자]를 끌어오고, 남쪽으로 양자강회수 지역[의 물자]를 끌어온 연후에야 구비할 수 있습니다. [물자가 이동하는] 거리를 계산해 보면 1년이 지나도 여전히 다 모을 수 없습니다. 먼저 도착한 군사들은 노천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모여 있게 되어, 병사들은 지치고 병장기도 손상되어 동원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될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어려운 점입니다. 변경의 [인구와 물자가] 비게 되면 군량을 댈 수 없을 것입니다. 안으로 군국에서 징발해야 하는데 모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어려운 점입니다. 한 사람이 300일 동안 먹는 식량을 계산하면 말린 밥 18곡이 필요합니다. 소의 힘이 없으면 [군량 수송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또한 소는 스스로 먹을 건초도 짊어져야 하기에 20곡이 추가되어 [그 짐이] 무겁습니다. 오랑캐 지역은 소금기가 많은 사막이어서 물과 풀이 없는 곳이 많습니다. 지난 일을 가지고 따져보면 군대가 출동하고 100일을 채우지 못하고 소들은 필경 모두 죽을 것입니다. 남아 있는 식량이 여전히 많아서 사람들이 지고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난점입니다. 오랑캐 땅은 가을과 겨울에 매우 춥고 봄과 여름에는 바람이 심합니다. 가마솥이나 아가리가 큰 솥,주 007
각주 007)
원문의 “鬴”는 솥의 옛 글자이다. “鍑”은 아가리가 큰 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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땔나무와 숯 등을 많이 싣고서는 그 무게를 이겨낼 수 없을 것입니다. 말린 밥과 마실 물은 4계절을 지나게 되면 [부패하여] 군사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번질 우려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과거에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100일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장기간 [정벌하려는] 욕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형편과 힘이 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네 번째 난점입니다. 군수품들도 자연히 따르게 되는데 가볍고 날랜 병사들이 적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랑캐가 서서히 도주하여도 따라 잡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다행히 적과 마주친다고 할지라도 [무거운] 짐에 얽매일 것입니다. 만일 험난한 곳을 만나면 말의 재갈과 꼬리가 한 줄로 늘어서듯 [부대가 한 줄로 길게 늘어설 터인데], 적군이 요격하여 [대오의] 앞과 뒤를 차단하면 그 위태로움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난점입니다. 백성의 힘을 크게 사용하고도 공을 반드시 세울 수 없다면, 신은 엎드려 그 일을 근심합니다. 지금 이미 군대를 일으켰으니 응당 먼저 [적지에] 도착한 군사들을 출동시키고, 신 엄우 등으로 하여금 [이들을 이끌고] 깊이 침투하여 번개처럼 공격하게 하여, 오랑캐 적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도록 하소서.”
왕망엄우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전처럼 군대와 식량을 [변경지대로] 운송하였다. 천하가 큰 혼란에 빠졌다.

  • 각주 001)
    嚴尤(?∼23) : 王莽 때의 大臣이다. 建國 3년(11) 王莽이 군대를 내어 匈奴를 공격할 때, 嚴尤는 討穢將軍이었다. 그 뒤 高句麗가 新을 離叛하자, 王莽은 嚴尤를 파견하여 공격한 뒤 고구려의 이름을 ‘下句麗’로 바꾸었다. 이 일로 嚴尤는 武建伯이 되었다. 天鳳 3년(16) 大司馬에 제수되었다. 6년에는 王莽의 西夷 정벌을 비판하였다가 免官되었다. 얼마 뒤 納言大將軍이 되어 綠林軍을 막았다. 更始 원년(23) 昆陽의 전투에서 패한 뒤, 汝南에 있는 漢 皇族 劉聖의 세력에 투항하여 大司馬의 지위를 얻었으나 얼마 뒤 피살되었다. 「匈奴傳」에는 嚴尤의 高句麗 공격이 등장하지 않지만 『三國史記』 권13 「高句麗本紀」에 관련 기사가 있다. 당시 遼西尹 田譚이 邊塞를 侵寇한 고구려 군대를 추격하다가 피살되었는데, 嚴尤는 이 일을 지나치게 문제삼을 경우 도리어 高句麗가 背叛할 것이고 이에 夫餘․濊貊도 동조할 수 있기 때문에, 慰安策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王莽은 듣지 않고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嚴尤는 고구려 장수 延丕를 꾀어 목을 베어 京師에 보냈다. 이에 王莽이 기뻐하여 고구려왕을 ‘下句麗侯’라고 改稱하고 천하에 布告하였으나, 이후 高句麗의 侵寇는 더욱 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漢書』 권99중, 「王莽傳」(4130)에는 嚴尤가 高句麗侯 騶를 유인 살해했다고 하였다. ‘我將 延丕’를 살해했다는 『三國史記』와 다르다. 이 점에 대하여 이병도는 『漢書』의 기록이 誤傳 내지 과장이 아닐까 추정하였다(『國譯 三國史記』 권13 :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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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周 宣王(재위 전827∼전782) : 西周 제11대 王이다. 姬姓이고 이름은 靜이다. 周 厲王의 아들이다. 厲王 때 國人의 난이 일어나자 대신 召穆公 虎가 太子 靜을 구해 내었다. 共和 14년(전828) 厲王이 사망하자, 대신들은 靜을 王으로 옹립하였다. 宣王은 즉위한 뒤 召穆公과 周定公, 尹吉甫 등 대신을 등용하여 朝政을 정비하여 일시 중흥기를 가져왔다. 宣王의 주요 공적은 周朝를 침공한 戎狄과 淮夷를 토벌한 것이다. 재위 5년에는 尹吉甫와 獫允(西戎)을 정벌하였다. 江漢 지구를 침공한 淮夷는 召穆公 등에게 명령하여 토벌하게 하고, 淮水 유역의 최강대국인 徐國을 복종시켰다. 뿐만 아니라 荊蠻도 정벌하였다. 南土 지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舅․弟를 봉건하였다. 그러나 宣王의 중흥기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재위 30년 이후에는 戎과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였고,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太原에서 ‘料民’하기도 하였다. 宣王은 모두 46년간 재위하였고 幽王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幽王 때 西周는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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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獫允 : 지금의 섬서성, 감숙성 북부와 內蒙古 자치구 서부에 토착하였던 종족을 말한다. 『史記』에는 “獫允”을 “獫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史記集解』에서 晉灼은 “堯임금 때는 葷粥, 周代에는 獫狁, 秦代에는 匈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史記』 권110, 「匈奴列傳」 : 2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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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涇陽”은 현재 섬서성 중부 涇河의 서북 지역이다. 본래 西周의 邑이었고, 戰國時代 秦나라는 이곳에 도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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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陽九 : 陰陽五行에 기초한 術數學에서는 天文과 曆數에 따라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데, “陽九”란 陽의 五厄과 陰의 四厄을 합친 재난을 말한다. 『漢書』(권21上) 「律曆志」에는 “『周易』의 九戹說에 따르면, 元年에 진입한 뒤, 106년 동안 旱災가 9차례 발생하고, 그 다음 374년 동안에는 水災가 9차례 발생하고 …… 모두 4617년이 되면 一元이 結束된다. 4560년을 거치면서 재해가 발생한 해는 57년이다”(『漢書』 : 948)라고 하였다. 다른 한편 “陽九”를 太乙數라고 하여 456년 동안 한 번의 ‘陽九’, 288년 동안 한 번의 ‘百六’의 때가 찾아와 재해가 발생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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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원문은 “海代”이다. 胡三省은 여기서 ‘代’는 응당 ‘岱’이고 ‘岱山’을 뜻한다고 했다(『資治通鑑』 : 1192). 岱山은 산동성 태안시에 있는 泰山의 별칭이다. 『尙書』 「禹貢」편에 “海岱惟靑州”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渤海와 泰山 사이의 지역이 靑州”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海岱”란 靑州 지역을 지칭하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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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원문의 “鬴”는 솥의 옛 글자이다. “鍑”은 아가리가 큰 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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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왕망, 엄우(嚴尤), 선왕(宣王), 무제, 진시황, 엄우, 왕망, 엄우
지명
, , , 주(周), , , , 경양(涇陽), , 발해, 태산, 청주(靑州), 양자강, 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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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를 정벌하려는 왕망의 계획을 장군 엄우(嚴尤)가 간쟁하며 말렸지만 왕망이 거절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4_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