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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 왕조가 흉노의 인문(印文)을 새로 만들고 옛 인문(印文)을 없애자 선우가 다시 인장을 회복해 달라고 요구함

  • 국가
    흉노(匈奴)
왕망이 제위를 찬탈한 건국(建國)주 001
각주 001)
왕망이 제위를 찬탈한 뒤의 연호를 『漢書』 「匈奴傳」에서는 이처럼 “建國”이라고 하였으나, 『漢書』 권99中 (4099)에서는 이를 “始建國”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漢書』는 이 두 표현을 혼용하고 있으나 번역문에서는 “建國”으로 통일하여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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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9)에 오위장(五威將)주 002
각주 002)
五威將 : 新代의 관직명이다. ‘威’란 皇天上帝의 威命이고, ‘五’란 五行의 수를 뜻한다. 王莽은 자신이 漢을 대신하여 受命하였음을 알리기 위해 특별히 이 관직을 설치하였다. 모두 12명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천하에 循行하면서 『符令』 42편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新朝의 새 印綬를 주고 漢의 옛 印綬를 회수하였다. 五威將은 乾文車에 타고, 坤六馬를 몰며,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또한 한 사람마다 左․右․前․後․中帥 등 5명을 배속시켰다. 의복과 수레, 말의 장식 등은 각 方面의 色과 數에 따랐다. 將은 持節하고 太一之使라고 칭했으며, 帥는 幢을 쥐고 五帝之使라고 칭하였다. 동쪽 변계로 나간 사람은 玄菟, 樂浪, 高句麗, 夫餘에 이르렀고, 남쪽 변계로 나간 사람은 徼外로 넘어가 益州, 鉤町을 지났다. 서쪽 변계로 나간 사람은 西域에 이르렀고, 북쪽 변계로 나간 사람은 匈奴에 이르렀다. 五威將에 대한 기사는 『漢書』 권99중, 「王莽傳」(4112∼41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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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준과 장수[率]주 003
각주 003)
일역본은 “率”을 官名으로 보아 일반명사로 두었으나(內田吟風, 1971 : 130), 五威將 휘하에 左․右․前․後․中帥 등 “凡五帥”가 있다는 「王莽傳」의 기사(4115)처럼 ‘帥’로도 표현된다. 그래서 ‘장수’라고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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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부·왕립(王颯) 주 004
각주 004)
王颯 : 王莽시대의 관리이다. 관직은 騎都尉이고 展德侯에 봉해졌다. 建國 1년(9) 五威將 王駿을 따라 匈奴에 出使하여 匈奴 선우의 印章을 교체하였다. 天鳳 1년(14)에 다시 匈奴에 出使하여 烏累若鞮單于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地皇 4년(23) 更始帝의 군대가 長安에 진입하자, 王颯은 항복하여, 中郞將의 관직을 얻고 歸德侯에 봉해졌다. 更始 2년(24) 다시 匈奴에 出使하여 漢代 舊制의 印綬를 單于에게 사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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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요(陳饒) 주 005
각주 005)
陳饒 : 王莽시대의 장군으로 燕 지역 사람이다. 품성이 과감하고 용맹하였다. 建國 1년 五威將 王駿을 따라 匈奴에 사신으로 가서 선우의 印章을 교체하였다. 單于가 故印을 회수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부수어 버렸다. 귀환한 뒤, 王莽은 陳饒를 大將軍으로 임명하고, 威德子로 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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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정업(丁業) 주 006
각주 006)
丁業 : 王莽대의 관리로 建國 1년(9)과 天鳳 2년(15) 두 차례에 걸쳐 匈奴에 出使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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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6인을 파견하여, 많은 귀금속과 비단을 실어 다시 선우에게 보냈다. [신조(新朝)가] 천명을 받아 을 대신한 상황에 대하여 깨우쳐 알렸고, 아울러 선우의 옛 인장을 교체하고자 하였다. 옛 인문(印文)에는 “흉노선우새(匈奴單于璽)”라고 되어 있는데, 왕망은 바꾸어 “신흉노선우장(新匈奴單于章)”주 007
각주 007)
“新”이란 王莽이 자신의 國號를 붙인 것이다. 栗原朋信은 漢代 天下가 內臣, 外臣, 外客臣, 絶域의 朝貢國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南匈奴의 선우는 그 안에서 外客臣의 지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宣帝가 呼韓邪單于에게 사여한 인장에는 ‘匈奴單于璽’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앞에 ‘漢’자를 쓰지 않은 점, 單于라는 흉노 고유의 군장 호칭을 인정받은 점 등은 일반 外臣과 다른 外客臣의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 外臣에게 사여하는 印章에는 ‘漢’․‘新’ 등 중국왕조의 이름이 앞에 나오고 끝에 ‘印’․‘章’ 등의 문자를 넣는다. 이 점에서 王莽이 ‘新匈奴單于章’이라 적힌 印章을 사여한 것은 흉노의 지위를 外客臣에서 外臣으로 조정하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客臣에는 內客臣과 外客臣의 구분이 있는데, 新朝가 건립된 후 漢 최후의 군주 孺子嬰을 定安侯로 책봉하고 新室의 ‘賓臣’으로 삼은 것은 ‘內客臣’의 예이다. 이 때 定安侯는 新室의 禮로부터 독립하여 漢禮를 지킬 수 있도록 허용받았으나, 新法으로부터 독립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면 外客臣인 匈奴의 경우에는 匈奴 내부에서 독자의 禮․法을 유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 점에서 ‘外客臣’과 ‘內客臣’의 차이가 있다(栗原朋信, 1970 : 475∼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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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하였다. [신의] 오위장과 장수들이 도착한 뒤 선우에게 [새로운] 인장과 인장 끈을 주고, 조서를 내려 옛 인장과 인장 끈을 바치게 하였다. 선우는 두 차례 절하고 조서를 받았다. 통역관이 앞으로 나가 [선우가 차고 있는] 옛 인장의 끈을 풀어서 취하려 하였다. 선우도 겨드랑이를 들어 올려 넘겨주려 하였다. 이 때 좌고석후(左姑夕侯) 소(蘇)가 옆에서 선우에게 말하였다. “새 인장의 인문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주지 말아야 합니다.” 선우도 [행동을] 멈추고 주려하지 않았다. [의] 사신에게 요청하여 궁려에 앉게 하고, 선우는 앞으로 나아가 [새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려 하였다. 오위장 [왕준]은 “옛 인장과 인장 끈은 제때에 바쳐야 합니다.”고 말했다. 선우는 “[마지못해] 알겠다.”주 008
각주 008)
『禮記』 曲禮上에 “父召無諾, 先生召無諾, 唯而起”란 구절이 있다. 이에 대하여 鄭玄은 “응대하는 말로 唯가 諾보다 공손하다”고 주석하였다. 또한 孔穎達은 부모와 선생이 부르면 반드시 ‘唯’라고 해야지 ‘諾’이라 대답해서는 안 되는데, ‘唯’란 급하게 대답하는 것이고, ‘諾’이란 천천히 대답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래서 원문의 “諾”을 마지못해 허락하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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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며 다시 겨드랑이를 들어 올려 통역관에게 [인장과 인장 끈을] 주려하였다. 는 다시 말하였다. “인문을 보기 전에는 주지 말아야 합니다.” 선우는 말했다. “인문이 바뀔 이유가 있겠는가!” 마침내 옛 인장의 끈을 풀어 받들어 올렸다. 오위장과 장수가 받았다. [선우는] 새로운 도장 끈을 착용하고, [주머니를] 풀어 [새] 인장을 보지는 않았다. 밤늦도록 마시고 먹은 뒤 [자리를] 파하였다.
우솔(右率)주 009
각주 009)
앞에서 五威將 한 사람에게 左․右․前․後․中帥 등 5명의 장수[率]가 따른다고 하였다. 右率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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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요는 오위장과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앞서 고석후 []가 인장의 문구를 의심하여 하마터면 선우가 우리에게 [옛 인장을] 주지 않을 뻔하였소. 만일 [새] 인장을 보고 [그 문구가] 바뀐 것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옛 인장을 찾을 것이오. 이는 말로 설득해서 거절할 수 없을 것이오. 이미 [옛 인장을] 얻은 다음 다시 잃는다면 [천자의] 명을 욕되게 하는 일이 그보다 더 클 수는 없을 것이오. 옛 인장을 때려 부수어 화근을 잘라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소.” [하지만] 오위장과 장수들은 망설이면서 응하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진요연(燕) 지방 출신의 군인으로 과단성 있고 용감하였는데 즉각 도끼를 가지고 와 [옛 인장을] 쳐서 부수었다.
다음날 선우는 과연 우골도후(右骨都侯)주 010
각주 010)
右骨都侯 : 匈奴에서 정치 보좌의 역할을 담당하는 관직이다. 그 지위는 左右大當戶의 아래이다. 官位는 세습되고, 左骨都侯와 상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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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當)을 보내 오위장과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은 선우에게 인장을 사여하였을 때, ‘새(璽)’라고 했지 ‘장(章)’이라 하지 않았으며 또한 ‘한(漢)’이란 글자도 없었소. 제왕(諸王) 이하[의 인장]에 비로소 ‘한’이 있고 ‘장’이라 말했소.주 011
각주 011)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반 外臣에게 사여하는 印章의 경우에는 먼저 ‘漢’․‘新’ 등 중국왕조의 이름이 나오고 끝에 ‘印’․‘章’ 등의 문자를 넣는다(栗原朋信, 1970 : 475∼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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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새’를 없애고 ‘신’을 [앞에] 더하여 [의] 신하와 다를 것이 없게 되었소. 원컨대 과거의 인장을 돌려 주시오.” 오위장과 장수들은 [부서진] 옛 인장을 보이며 말했다. “ 황실에서 천(天)[의 명령]에 따라 [새 인장을] 제작하고, 옛 인장은 오위장과 장수들의 [의견에] 따라 임의로 파괴해 버렸습니다. 선우께서도 응당 천명에 따라 황실의 제도를 받드십시오.” [흉노의 사신] 이 돌아가 [선우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고 선우는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알았다. 또한 [의] 뇌물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곧 동생 우현왕 여(輿)를 보내 말과 소를 가지고, 오위장과 장수들을 따라 [에] 들어가 사례하도록 하였다. 이 기회에 글을 올려 옛 인장을 [회복해 달라고도] 요구하였다.

  • 각주 001)
    왕망이 제위를 찬탈한 뒤의 연호를 『漢書』 「匈奴傳」에서는 이처럼 “建國”이라고 하였으나, 『漢書』 권99中 (4099)에서는 이를 “始建國”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漢書』는 이 두 표현을 혼용하고 있으나 번역문에서는 “建國”으로 통일하여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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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五威將 : 新代의 관직명이다. ‘威’란 皇天上帝의 威命이고, ‘五’란 五行의 수를 뜻한다. 王莽은 자신이 漢을 대신하여 受命하였음을 알리기 위해 특별히 이 관직을 설치하였다. 모두 12명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천하에 循行하면서 『符令』 42편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新朝의 새 印綬를 주고 漢의 옛 印綬를 회수하였다. 五威將은 乾文車에 타고, 坤六馬를 몰며,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또한 한 사람마다 左․右․前․後․中帥 등 5명을 배속시켰다. 의복과 수레, 말의 장식 등은 각 方面의 色과 數에 따랐다. 將은 持節하고 太一之使라고 칭했으며, 帥는 幢을 쥐고 五帝之使라고 칭하였다. 동쪽 변계로 나간 사람은 玄菟, 樂浪, 高句麗, 夫餘에 이르렀고, 남쪽 변계로 나간 사람은 徼外로 넘어가 益州, 鉤町을 지났다. 서쪽 변계로 나간 사람은 西域에 이르렀고, 북쪽 변계로 나간 사람은 匈奴에 이르렀다. 五威將에 대한 기사는 『漢書』 권99중, 「王莽傳」(4112∼41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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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일역본은 “率”을 官名으로 보아 일반명사로 두었으나(內田吟風, 1971 : 130), 五威將 휘하에 左․右․前․後․中帥 등 “凡五帥”가 있다는 「王莽傳」의 기사(4115)처럼 ‘帥’로도 표현된다. 그래서 ‘장수’라고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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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王颯 : 王莽시대의 관리이다. 관직은 騎都尉이고 展德侯에 봉해졌다. 建國 1년(9) 五威將 王駿을 따라 匈奴에 出使하여 匈奴 선우의 印章을 교체하였다. 天鳳 1년(14)에 다시 匈奴에 出使하여 烏累若鞮單于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地皇 4년(23) 更始帝의 군대가 長安에 진입하자, 王颯은 항복하여, 中郞將의 관직을 얻고 歸德侯에 봉해졌다. 更始 2년(24) 다시 匈奴에 出使하여 漢代 舊制의 印綬를 單于에게 사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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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陳饒 : 王莽시대의 장군으로 燕 지역 사람이다. 품성이 과감하고 용맹하였다. 建國 1년 五威將 王駿을 따라 匈奴에 사신으로 가서 선우의 印章을 교체하였다. 單于가 故印을 회수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부수어 버렸다. 귀환한 뒤, 王莽은 陳饒를 大將軍으로 임명하고, 威德子로 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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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丁業 : 王莽대의 관리로 建國 1년(9)과 天鳳 2년(15) 두 차례에 걸쳐 匈奴에 出使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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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新”이란 王莽이 자신의 國號를 붙인 것이다. 栗原朋信은 漢代 天下가 內臣, 外臣, 外客臣, 絶域의 朝貢國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南匈奴의 선우는 그 안에서 外客臣의 지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宣帝가 呼韓邪單于에게 사여한 인장에는 ‘匈奴單于璽’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앞에 ‘漢’자를 쓰지 않은 점, 單于라는 흉노 고유의 군장 호칭을 인정받은 점 등은 일반 外臣과 다른 外客臣의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 外臣에게 사여하는 印章에는 ‘漢’․‘新’ 등 중국왕조의 이름이 앞에 나오고 끝에 ‘印’․‘章’ 등의 문자를 넣는다. 이 점에서 王莽이 ‘新匈奴單于章’이라 적힌 印章을 사여한 것은 흉노의 지위를 外客臣에서 外臣으로 조정하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客臣에는 內客臣과 外客臣의 구분이 있는데, 新朝가 건립된 후 漢 최후의 군주 孺子嬰을 定安侯로 책봉하고 新室의 ‘賓臣’으로 삼은 것은 ‘內客臣’의 예이다. 이 때 定安侯는 新室의 禮로부터 독립하여 漢禮를 지킬 수 있도록 허용받았으나, 新法으로부터 독립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면 外客臣인 匈奴의 경우에는 匈奴 내부에서 독자의 禮․法을 유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 점에서 ‘外客臣’과 ‘內客臣’의 차이가 있다(栗原朋信, 1970 : 475∼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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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禮記』 曲禮上에 “父召無諾, 先生召無諾, 唯而起”란 구절이 있다. 이에 대하여 鄭玄은 “응대하는 말로 唯가 諾보다 공손하다”고 주석하였다. 또한 孔穎達은 부모와 선생이 부르면 반드시 ‘唯’라고 해야지 ‘諾’이라 대답해서는 안 되는데, ‘唯’란 급하게 대답하는 것이고, ‘諾’이란 천천히 대답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래서 원문의 “諾”을 마지못해 허락하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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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앞에서 五威將 한 사람에게 左․右․前․後․中帥 등 5명의 장수[率]가 따른다고 하였다. 右率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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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右骨都侯 : 匈奴에서 정치 보좌의 역할을 담당하는 관직이다. 그 지위는 左右大當戶의 아래이다. 官位는 세습되고, 左骨都侯와 상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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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반 外臣에게 사여하는 印章의 경우에는 먼저 ‘漢’․‘新’ 등 중국왕조의 이름이 나오고 끝에 ‘印’․‘章’ 등의 문자를 넣는다(栗原朋信, 1970 : 475∼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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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왕망, 왕준, 견부, 왕립(王颯), 진요(陳饒), 백창, 정업(丁業), 왕망, 소(蘇), 왕준, , 진요, , 진요, 당(當), , 여(輿)
지명
, , 연(燕),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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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 왕조가 흉노의 인문(印文)을 새로 만들고 옛 인문(印文)을 없애자 선우가 다시 인장을 회복해 달라고 요구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4_1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