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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선우가 국에 도착한 뒤에도 여러 차례 한에 시자(侍子)를 보냄

  • 국가
    흉노(匈奴)
일찍이 천자는 [에 시자(侍子)로 와 있던 오주류선우의 아들] 계류곤에게 선우를 수행하여 [돌아] 가도록 하였다. [선우는] 국에 도착한 뒤 다시 계류곤의 동모형(同母兄)인 우대저(右大且) 방(方)과 부인을 보내 입시하게 하였다. [이번에] 돌아간 뒤에도 다시 [우대]저 의 동모형(同母兄)인 좌일축왕(左日逐王) 도(都)와 부인을 보내 입시하도록 하였다. 이 당시 평제(平帝) 주 001
각주 001)
平帝(전9∼5 ; 재위 전1∼5) : 前漢 14대 황제. 이름은 劉衎이다. 조부는 元帝이고 부친은 中山孝王이며 母親은 衞氏이다. 哀帝가 사망한 뒤, 太皇太后 王氏가 권력을 장악하여 9살 나이의 평제를 즉위시켰다. 이 때 王莽이 大司馬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딸을 皇后로 옹립하였다. 平帝의 외척 衞氏는 中山에 머물게 하여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다가 결국 族滅시켰다. 이 사실을 平帝가 알게 되자, 王莽은 平帝를 독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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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나이가 어려, 태황태후(太皇太后)가 칭제(稱制)주 002
각주 002)
“稱制”란 皇帝의 직권을 대리 행사하였음을 말한다. 일찍이 惠帝가 사망한 뒤, 少帝恭이 즉위하자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太后 呂氏가 “臨朝稱制”하였다(『漢書』 권3 : 95). 顔師古에 따르면 천자의 명령은 制書와 詔書의 형식을 취하는데, 制書란 制度에 관련된 명령을 의미한다. 본래 황태후가 이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으나 呂太后가 臨朝하여 天子의 일을 대신 수행하였기에 “稱制”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번역문에서 “太皇太后”는 元帝의 皇后였던 王皇后(元后라고도 말한다)였다. 王皇后는 이름이 政君으로 魏郡 元城縣 사람이다. 宣帝 五鳳 4년(전54)에 18세의 나이로 掖庭에 들어왔다. 이때 황태자(후일의 元帝)의 총애를 받아 皇太子 孫(후일의 成帝)을 출산하였다. 成帝가 즉위한 뒤, 皇太后가 되어 동생인 王鳳을 大司馬 大將軍 領尙書事로 임명함으로써 외척 王氏가 國政을 장악하였다. 전한시대 외척 세력의 효시로서는 宣帝代 祖母 史良娣의 史氏와 모친 王夫人의 王氏, 그리고 宣帝의 첫 황후였던 許皇后의 許氏 등을 꼽는다(西嶋定生, 2002 :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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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신도후(新都侯) 왕망(王莽) 주 003
각주 003)
王莽(전45∼후23) : 전한말의 외척이고 이후 新朝의 황제이다. 字는 巨君이다. 父親은 王曼으로 원제대 황후 王氏의 여러 동생 가운데 하나였다. 王皇后의 동생들은 외척으로 封侯되고 元帝와 成帝 시기 輔政의 권한을 승계하면서 큰 세도를 누렸다. 하지만 王曼은 일찍 죽었고, 그의 아들 王莽도 상대적으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이 시기 王莽은 검약과 성실함 그리고 효행으로 그 德行이 널리 알려졌다. 大將軍 王鳳은 죽기 전 王莽을 추천하였고, 그 결과 黃門郞으로 관직의 제수받는다. 그 후 騎都尉, 光祿大夫 등을 역임하면서 王莽은 賓客, 名士 등과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成帝가 죽기 전 大司馬로 제수받지만, 哀帝시기에는 董賢 등의 견제로 일단 정계에서 물러난다. 哀帝가 죽고 어린 平帝가 즉위하자 太皇太后 王氏는 다시 王莽을 불러들여 國政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그 후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平帝가 사망한 뒤에는 2살의 孺子嬰을 황제로 옹립한 뒤, 자신은 攝政의 명의로 천자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기원후 8년 정식으로 皇位에 오르고 國號를 ‘新’으로 하였다. 王莽은 『周禮』에 의거하여 托古改制의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무엇보다 사회경제분야의 개혁이 두드러졌다. 천하의 토지를 ‘王田’, 奴婢는 ‘私屬’이라고 칭하며 이들의 매매를 금지시켰으며 한 가구의 남자가 8人 이상이 되지 못하는데 1井 즉 9百畝 이상의 토지를 소유할 경우에는 親族과 鄕黨에 분배하도록 강제하였다. 또한 ‘六筦’․‘五均’의 제도를 시행하여 鹽鐵酒 등 주요 상품을 전매하여 가격을 통제함으로써 商工業을 장악하려 하였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화폐를 새롭게 발행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대토지 소유의 확산으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진행되었으나,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 등의 이유로 커다란 혼란만을 남긴 채 실패한다. 뿐만 아니라 대외정책은 王莽 정권의 몰락을 크게 앞당겼다. 匈奴의 烏桓 침공 등으로 王莽 정권과 匈奴의 갈등이 커가는 상황에서, 王莽은 單于에게 격식을 낮춘 인장을 사여하고 주변 지역 통치자들의 封號도 ‘王’에서 ‘侯’로 격하하여 원망을 샀다. 뿐만 아니라 3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匈奴 정벌을 시도하고, 병력 차출에 응하지 않은 고구려도 공격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민중들이 봉기하여 赤眉軍과 綠林軍 등이 장안을 함락시켰다. 王莽은 피살되었으며, 新王朝는 불과 15년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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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왕망은] 태후의 위덕(威德)이 지극히 펼쳐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다는 말로 태후를 즐겁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선우에게 넌지시 말하여 왕소군의 딸 수복거차(須卜居次) 운(云) 주 004
각주 004)
앞에서 復株絫單于가 王昭君을 다시 처로 삼아 낳은 두 딸 가운데 큰 딸이 운(云)으로 수복거차(須卜居次)가 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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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태후에게 보내 입시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태후가] 상으로 하사한 것들이 매우 많았다.

  • 각주 001)
    平帝(전9∼5 ; 재위 전1∼5) : 前漢 14대 황제. 이름은 劉衎이다. 조부는 元帝이고 부친은 中山孝王이며 母親은 衞氏이다. 哀帝가 사망한 뒤, 太皇太后 王氏가 권력을 장악하여 9살 나이의 평제를 즉위시켰다. 이 때 王莽이 大司馬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딸을 皇后로 옹립하였다. 平帝의 외척 衞氏는 中山에 머물게 하여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다가 결국 族滅시켰다. 이 사실을 平帝가 알게 되자, 王莽은 平帝를 독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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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稱制”란 皇帝의 직권을 대리 행사하였음을 말한다. 일찍이 惠帝가 사망한 뒤, 少帝恭이 즉위하자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太后 呂氏가 “臨朝稱制”하였다(『漢書』 권3 : 95). 顔師古에 따르면 천자의 명령은 制書와 詔書의 형식을 취하는데, 制書란 制度에 관련된 명령을 의미한다. 본래 황태후가 이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으나 呂太后가 臨朝하여 天子의 일을 대신 수행하였기에 “稱制”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번역문에서 “太皇太后”는 元帝의 皇后였던 王皇后(元后라고도 말한다)였다. 王皇后는 이름이 政君으로 魏郡 元城縣 사람이다. 宣帝 五鳳 4년(전54)에 18세의 나이로 掖庭에 들어왔다. 이때 황태자(후일의 元帝)의 총애를 받아 皇太子 孫(후일의 成帝)을 출산하였다. 成帝가 즉위한 뒤, 皇太后가 되어 동생인 王鳳을 大司馬 大將軍 領尙書事로 임명함으로써 외척 王氏가 國政을 장악하였다. 전한시대 외척 세력의 효시로서는 宣帝代 祖母 史良娣의 史氏와 모친 王夫人의 王氏, 그리고 宣帝의 첫 황후였던 許皇后의 許氏 등을 꼽는다(西嶋定生, 2002 :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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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王莽(전45∼후23) : 전한말의 외척이고 이후 新朝의 황제이다. 字는 巨君이다. 父親은 王曼으로 원제대 황후 王氏의 여러 동생 가운데 하나였다. 王皇后의 동생들은 외척으로 封侯되고 元帝와 成帝 시기 輔政의 권한을 승계하면서 큰 세도를 누렸다. 하지만 王曼은 일찍 죽었고, 그의 아들 王莽도 상대적으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이 시기 王莽은 검약과 성실함 그리고 효행으로 그 德行이 널리 알려졌다. 大將軍 王鳳은 죽기 전 王莽을 추천하였고, 그 결과 黃門郞으로 관직의 제수받는다. 그 후 騎都尉, 光祿大夫 등을 역임하면서 王莽은 賓客, 名士 등과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成帝가 죽기 전 大司馬로 제수받지만, 哀帝시기에는 董賢 등의 견제로 일단 정계에서 물러난다. 哀帝가 죽고 어린 平帝가 즉위하자 太皇太后 王氏는 다시 王莽을 불러들여 國政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그 후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平帝가 사망한 뒤에는 2살의 孺子嬰을 황제로 옹립한 뒤, 자신은 攝政의 명의로 천자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기원후 8년 정식으로 皇位에 오르고 國號를 ‘新’으로 하였다. 王莽은 『周禮』에 의거하여 托古改制의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무엇보다 사회경제분야의 개혁이 두드러졌다. 천하의 토지를 ‘王田’, 奴婢는 ‘私屬’이라고 칭하며 이들의 매매를 금지시켰으며 한 가구의 남자가 8人 이상이 되지 못하는데 1井 즉 9百畝 이상의 토지를 소유할 경우에는 親族과 鄕黨에 분배하도록 강제하였다. 또한 ‘六筦’․‘五均’의 제도를 시행하여 鹽鐵酒 등 주요 상품을 전매하여 가격을 통제함으로써 商工業을 장악하려 하였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화폐를 새롭게 발행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대토지 소유의 확산으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진행되었으나,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 등의 이유로 커다란 혼란만을 남긴 채 실패한다. 뿐만 아니라 대외정책은 王莽 정권의 몰락을 크게 앞당겼다. 匈奴의 烏桓 침공 등으로 王莽 정권과 匈奴의 갈등이 커가는 상황에서, 王莽은 單于에게 격식을 낮춘 인장을 사여하고 주변 지역 통치자들의 封號도 ‘王’에서 ‘侯’로 격하하여 원망을 샀다. 뿐만 아니라 3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匈奴 정벌을 시도하고, 병력 차출에 응하지 않은 고구려도 공격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민중들이 봉기하여 赤眉軍과 綠林軍 등이 장안을 함락시켰다. 王莽은 피살되었으며, 新王朝는 불과 15년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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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앞에서 復株絫單于가 王昭君을 다시 처로 삼아 낳은 두 딸 가운데 큰 딸이 운(云)으로 수복거차(須卜居次)가 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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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오주류선우, 계류곤, 계류곤, 방(方), , 도(都), 평제(平帝), 왕망(王莽), 왕망, 왕소군, 운(云)
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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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가 국에 도착한 뒤에도 여러 차례 한에 시자(侍子)를 보냄 자료번호 : jo.k_0002_0094_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