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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호한야선우가 한나라에 입조하고 칭신하기로 결정한 뒤 아들 수루거당(銖婁渠堂)을 보내자 질지선우 또한 아들을 보내 입조함

  • 국가
    흉노(匈奴)
호한야가 패하자 좌이질자왕(左伊秩訾王)주 001
각주 001)
左伊秩訾 : 匈奴의 官號이다. 이에 상응하는 것이 右伊秩訾이다. 左右의 직은 각각 서로 다른 地區를 맡았는데, 일반적으로 左職은 동쪽, 右職은 서쪽 지역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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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한야를 위해 계책을 세웠는데, 신하를 칭하고 입조(入朝)하여 한(漢)을 섬기고 따르며 도움을 구하라고 권하였다. 이와 같이 하면 흉노가 안정될 것이라 하였다. 호한야는 여러 대신들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모두가 말했다. “안 됩니다. 흉노의 습속은 본래 기백과 힘을 우러러보고, 복종하며 부림받는 것을 멸시합니다. 말 위에서 전투하면서 나라를 세웠고 그래서 뭇 오랑캐주 002
각주 002)
원문은 “威名於百蠻”이다. 周壽昌은 外夷들은 서로 ‘蠻’이라 칭하기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南方의 토착 종족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 하였다(『漢書補注』 : 1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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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게 위명(威名)을 떨쳤습니다. 전장에서의 죽음은 장사(壯士)에게 모두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주 003
각주 003)
원문 “戰死, 壯士所有也.”에 대하여 顔師古는 사람들에게 모두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풀었다. 번역문에서 직역을 했지만 일역본에서는 “戰死는 勇士의 항상적인 本分이다”(內田吟風, 1971 : 102), 현대 한어본에서는 “사막에서 戰死하는 것은 壯士의 豪擧이다”(安平秋, 2004 : 1891) 등으로 의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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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질지호한야] 형제가 나라를 다투고 있는데 [승리의 운이] 형에게 있지 않다면 동생에게 있을 것입니다.주 004
각주 004)
郅支單于가 형이고 呼韓邪單于가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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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죽는다 해도 여전히 위명은 남을 것이며 자손들은 변함없이 여러 나라들(諸國)을 이끌 것입니다. 은 비록 강해졌어도 여전히 흉노를 겸병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선고(先古)의 제도를 무너뜨리고 에 신사(臣事)하여 선대의 선우들을 천시하고 욕보이며주 005
각주 005)
漢初에 한과 匈奴의 관계는 匈奴가 우위에 서고 중국이 열등한 지위에 있음을 상호 인정하는 위에서 전개되었다(디코스모, 2005 : 256). 그러했던 匈奴가 漢에 대하여 稱臣하는 것은 선대 單于들을 모욕하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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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들의 웃음거리가 되려 합니까. 설령 이와 같이 하여 안정되어도 어떻게 다시 뭇 오랑캐들을 이끌 수 있겠습니까?”
좌이질자(左伊秩訾)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강함과 약함에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한조는 바야흐로 강성하며 오손주 006
각주 006)
烏孫 :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 무렵까지 天山산맥의 북쪽 일리강 유역과 이식쿨의 호반 등지에 분포했던 투르크계 유목 부족이다. 원주지는 천산의 북쪽 산록인 준가르 지방이며, 처음에는 匈奴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기원전 2세기 후반 月氏를 쫓아내고 일리 지방으로 이동하였다고 본다. 부족의 都城은 赤谷城이며 그 위치는 이식쿨호수의 남안으로 추정된다. 漢代 중국과 烏孫의 관계가 친밀해지자 匈奴는 車師와 결탁하여 烏孫을 공격했다. 이때 漢이 匈奴와 車師를 격파하였고 이후 烏孫은 한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기원후 2세기 후반 鮮卑의 압박을 받았고 5세기 후반에는 柔然의 침략을 받아 서방의 파미르 고원지대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점차 그 이름이 잊혀졌다. 烏孫은 漢과 匈奴의 항쟁 과정과 東西交通史上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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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성곽 제국(諸國)주 007
각주 007)
원문의 “城郭諸國”은 서역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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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모두 [의] 신첩(臣妾)주 008
각주 008)
원문의 “臣妾”은 국가 권력에 종속된 인민과 藩屬을 통칭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漢書』 권24(「食貨志」 : 1143)에서 “匈奴가 藩을 칭하고, 百蠻이 賓服하여, 배와 수레가 닿는 곳은 모두 臣妾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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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었습니다. 저제후선우(且鞮侯單于) 주 009
각주 009)
且鞮侯의 음은 ‘저제후’이다(『史記』 권110 「匈奴傳」 : 2917, 『索隱』 : 上音子餘反, 下音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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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흉노는 날로 줄어들었고주 010
각주 010)
漢의 匈奴 정벌은 衞靑과 霍去病의 지휘 아래 대략 元光 6년(전129)부터 元狩4년(전119)까지 10여 년 동안에 집중되었다. 그 후에는 李廣利의 匈奴 정벌(전90)을 제외하고는 대규모 정벌이 없었다. 따라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且鞮侯單于(재위 전101∼전96) 치세에 匈奴의 쇠퇴가 시작된 것은 전쟁의 후유증 탓으로 볼 수 있다. 武帝代 漢軍의 공격으로 匈奴는 물과 풀이 풍부한 陰山과 祁連山, 焉支山 등을 잃고, 수백만 마리의 양과 가축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김한규, 2005 :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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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것을] 되찾아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여기에서 굳센 척해도주 011
각주 011)
원문 “雖屈强於此”에 대하여 일역본에서는 “현재보다 강력하였다고 말할지라도”(內田吟風, 1971 : 102)라고 해석했고, 현대 한어본에서는 “지금처럼 억지로 강한 척해도”(安平秋, 2004 : 1891)라고 해석했다. 문맥상 현대 한어본이 더 무난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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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편안도 맛볼 수 없습니다. 지금 을 섬기면 편안하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섬기지 않으면 위험하거나 멸망할 것입니다. 무엇이 이 계책보다 나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 대인(大人)주 012
각주 012)
원문에 “諸大人”이라고 나오는데, 周壽昌은 匈奴貴人이 서로 大人이라고 칭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하였다(『漢書補注』 : 1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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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서로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호한야는 그 계책에 따르기로 하여 무리를 이끌고 [한조의] 변새 부근으로 남하하였다. 아들 우현왕 수루거당(銖婁渠堂)을 보내 입조하고 시봉하게 하였다. 질지선우 또한 아들 우대장(右大將) 구우리수(駒于利受)를 보내 입조하고 시봉하게 하였다. 이해는 감로(甘露) 원년(전53)이다.주 013
각주 013)
이때의 “遣子入侍”가 甘露元年 正月의 일임은 『漢書』 「本紀」에서 확인된다(권8, 「宣帝紀』 : 268). 그런데 이보다 1년 전 五鳳 4년에도 單于가 인질을 보내 入侍한 일이 있다(“單于稱臣 遣弟谷蠡王入侍.” 『漢書』권8, 「宣帝紀』 : 268). 이것은 閏振單于 때의 일이다(內田吟風, 1971 :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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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左伊秩訾 : 匈奴의 官號이다. 이에 상응하는 것이 右伊秩訾이다. 左右의 직은 각각 서로 다른 地區를 맡았는데, 일반적으로 左職은 동쪽, 右職은 서쪽 지역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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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원문은 “威名於百蠻”이다. 周壽昌은 外夷들은 서로 ‘蠻’이라 칭하기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南方의 토착 종족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 하였다(『漢書補注』 : 1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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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원문 “戰死, 壯士所有也.”에 대하여 顔師古는 사람들에게 모두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풀었다. 번역문에서 직역을 했지만 일역본에서는 “戰死는 勇士의 항상적인 本分이다”(內田吟風, 1971 : 102), 현대 한어본에서는 “사막에서 戰死하는 것은 壯士의 豪擧이다”(安平秋, 2004 : 1891) 등으로 의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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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郅支單于가 형이고 呼韓邪單于가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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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漢初에 한과 匈奴의 관계는 匈奴가 우위에 서고 중국이 열등한 지위에 있음을 상호 인정하는 위에서 전개되었다(디코스모, 2005 : 256). 그러했던 匈奴가 漢에 대하여 稱臣하는 것은 선대 單于들을 모욕하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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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烏孫 :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 무렵까지 天山산맥의 북쪽 일리강 유역과 이식쿨의 호반 등지에 분포했던 투르크계 유목 부족이다. 원주지는 천산의 북쪽 산록인 준가르 지방이며, 처음에는 匈奴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기원전 2세기 후반 月氏를 쫓아내고 일리 지방으로 이동하였다고 본다. 부족의 都城은 赤谷城이며 그 위치는 이식쿨호수의 남안으로 추정된다. 漢代 중국과 烏孫의 관계가 친밀해지자 匈奴는 車師와 결탁하여 烏孫을 공격했다. 이때 漢이 匈奴와 車師를 격파하였고 이후 烏孫은 한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기원후 2세기 후반 鮮卑의 압박을 받았고 5세기 후반에는 柔然의 침략을 받아 서방의 파미르 고원지대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점차 그 이름이 잊혀졌다. 烏孫은 漢과 匈奴의 항쟁 과정과 東西交通史上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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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원문의 “城郭諸國”은 서역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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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원문의 “臣妾”은 국가 권력에 종속된 인민과 藩屬을 통칭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漢書』 권24(「食貨志」 : 1143)에서 “匈奴가 藩을 칭하고, 百蠻이 賓服하여, 배와 수레가 닿는 곳은 모두 臣妾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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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且鞮侯의 음은 ‘저제후’이다(『史記』 권110 「匈奴傳」 : 2917, 『索隱』 : 上音子餘反, 下音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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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漢의 匈奴 정벌은 衞靑과 霍去病의 지휘 아래 대략 元光 6년(전129)부터 元狩4년(전119)까지 10여 년 동안에 집중되었다. 그 후에는 李廣利의 匈奴 정벌(전90)을 제외하고는 대규모 정벌이 없었다. 따라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且鞮侯單于(재위 전101∼전96) 치세에 匈奴의 쇠퇴가 시작된 것은 전쟁의 후유증 탓으로 볼 수 있다. 武帝代 漢軍의 공격으로 匈奴는 물과 풀이 풍부한 陰山과 祁連山, 焉支山 등을 잃고, 수백만 마리의 양과 가축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김한규, 2005 :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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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원문 “雖屈强於此”에 대하여 일역본에서는 “현재보다 강력하였다고 말할지라도”(內田吟風, 1971 : 102)라고 해석했고, 현대 한어본에서는 “지금처럼 억지로 강한 척해도”(安平秋, 2004 : 1891)라고 해석했다. 문맥상 현대 한어본이 더 무난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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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원문에 “諸大人”이라고 나오는데, 周壽昌은 匈奴貴人이 서로 大人이라고 칭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하였다(『漢書補注』 : 1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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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이때의 “遣子入侍”가 甘露元年 正月의 일임은 『漢書』 「本紀」에서 확인된다(권8, 「宣帝紀』 : 268). 그런데 이보다 1년 전 五鳳 4년에도 單于가 인질을 보내 入侍한 일이 있다(“單于稱臣 遣弟谷蠡王入侍.” 『漢書』권8, 「宣帝紀』 : 268). 이것은 閏振單于 때의 일이다(內田吟風, 1971 :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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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호한야, 호한야, 호한야, 질지, 호한야, 저제후선우(且鞮侯單于), 호한야, 수루거당(銖婁渠堂), 질지선우, 구우리수(駒于利受)
지명
한(漢),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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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한야선우가 한나라에 입조하고 칭신하기로 결정한 뒤 아들 수루거당(銖婁渠堂)을 보내자 질지선우 또한 아들을 보내 입조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