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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려권거선우(虛閭權渠單于)의 아들 계후산(稽侯狦)이 호한야선우 (呼韓邪單于)로 즉위함

 
  • 국가흉노(匈奴)
이듬해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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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宣帝 神爵 3년(전59)이다.

[악연구제]선우가 또 선현탄의 두 동생을 죽였다. 오선막이 [두 사람의 구명을] 청하였으나 [선우가 이를] 듣지 않자 마음속으로 몹시 화가 났다. 그 이후에 좌오건왕이 죽자 선우가 스스로 그의 막내아들을 세워 오건왕으로 삼고 [선우]정에 머무르게 했다. 오건의 귀인들이 모두 죽은 오건왕의 아들을 [다시] 왕으로 세우고 모두 동쪽으로 옮겨가 버렸다. 선우가 우승상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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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丞相 : 이것은 匈奴에도 丞相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左右의 구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 中國과 마찬가지 역할을 담당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單于 이하 독자적인 힘을 갖고 있었던 24長과 그들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없다(주221) 참조).

에게 만 기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수천 명을 잃고 이기지 못하였다. 이때는 [이미] 선우가 즉위한 지 2년이 지나고 있었는데, [그가 백성들을] 험하게 학대하고 죽이니 그 나라 [백성들]이 그에게 복속하려 하지 않았다. 태자 좌현왕이 여러 차례 왼쪽 땅의 귀인들을 무고하니 왼쪽 땅의 귀인들이 모두 [그를] 원망하였다. 그 이듬해 오환이 흉노의 동쪽 변경에 있는 고석왕(姑夕王)을 공격하여 백성을 잡아가니 선우가 화를 냈다. [이에] 고석왕이 무서워하면서 바로 오선막과 왼쪽 땅의 귀인들과 함께 계후산(稽侯㹪)을 세워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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呼韓邪單于(재위 전58~전31) : 匈奴의 제14대 單于로 이름은 稽侯狦이다. 제12대 單于 虛閭權渠單于의 아들이다. 匈奴는 기원전 2세기 후반에 漢에 의하여 漠北으로 추방되고, 기원전 1세기에는 내란과 天災의 발생으로 그 세력이 쇠퇴하였다. 부친 單于가 사망한 뒤, 閼氏의 모책으로 握衍朐鞮單于가 섰지만 그에 불만을 품은 貴人들의 추대를 받아 전58년에 呼韓邪單于로 자립하였다. 그리고 握衍朐鞮單于가 사망한 뒤 전54년에 형인 郅支單于와 함께 匈奴를 동서로 양분하였다. 그 후 전51년에 長安으로 와서 宣帝를 알현하고 漢나라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얼마 후 서쪽의 郅支單于를 한나라의 원정군이 멸망시킨 뒤 元帝 竟寧 元年(전33)에 다시 漢朝에 朝謁하였고, 元帝는 後宮 王昭君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이후 匈奴는 前漢이 멸망할 때까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呼韓邪單于의 漢에 대한 來朝는 漢과 匈奴의 관계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형성과정에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來朝 이후 匈奴와 漢은 和親의 約을 맺음으로써 상호간의 독립적인 영토와 주권을 존중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匈奴가 漢에 대하여 入質과 稱臣하게 되었다. 이것은 漢初 복수의 독립적 권력들이 무질서하게 산재된 상황에서 체결된 和親의 약속과는 성격을 달랐다. 또한 武帝시기 중국 이외의 外國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고 郡縣 지배를 천하로 확장하는 단계와도 달랐다. 이것은 宣帝 이후 중국과 외국들이 主客의 관계로서 상대방의 독립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정연한 질서를 갖추고 공존하는 ‘天下 질서’를 출현시킨 계기로 그 역사적 의의가 주목된다(김한규, 1988 : 72∼73).

로 삼고 왼쪽 땅의 군대 4, 5만을 일으켜 서쪽으로 악연구제선우를 공격하기 위해 고저수의 북쪽에 도착했다. 아직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악연구제선우의 군대가 패배하여 도망가며 사람을 시켜 그의 동생 우현왕에게 [이런 소식을] 알리면서 말하였다. “흉노가 모두 나를 공격하니 네가 군대를 일으켜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우현왕이 말하였다. “너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형제와 여러 귀인들을 죽였다. 네가 있는 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여기] 와서 나까지 더럽히지 말아라.” 악연구제선우가 화를 내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좌대저거 도융기가 우현왕의 처소에 망명해 있다가 그 백성들을 [이끌고] 모두 호한야선우에게 항복했다. 이 해가 신작 4년(전58)이었다. 악연구제선우는 즉위한 지 3년 만에 패했다.

 

주 001
漢 宣帝 神爵 3년(전59)이다.
주 002
右丞相 : 이것은 匈奴에도 丞相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左右의 구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 中國과 마찬가지 역할을 담당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單于 이하 독자적인 힘을 갖고 있었던 24長과 그들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없다(주221) 참조).
주 003
呼韓邪單于(재위 전58~전31) : 匈奴의 제14대 單于로 이름은 稽侯狦이다. 제12대 單于 虛閭權渠單于의 아들이다. 匈奴는 기원전 2세기 후반에 漢에 의하여 漠北으로 추방되고, 기원전 1세기에는 내란과 天災의 발생으로 그 세력이 쇠퇴하였다. 부친 單于가 사망한 뒤, 閼氏의 모책으로 握衍朐鞮單于가 섰지만 그에 불만을 품은 貴人들의 추대를 받아 전58년에 呼韓邪單于로 자립하였다. 그리고 握衍朐鞮單于가 사망한 뒤 전54년에 형인 郅支單于와 함께 匈奴를 동서로 양분하였다. 그 후 전51년에 長安으로 와서 宣帝를 알현하고 漢나라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얼마 후 서쪽의 郅支單于를 한나라의 원정군이 멸망시킨 뒤 元帝 竟寧 元年(전33)에 다시 漢朝에 朝謁하였고, 元帝는 後宮 王昭君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이후 匈奴는 前漢이 멸망할 때까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呼韓邪單于의 漢에 대한 來朝는 漢과 匈奴의 관계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형성과정에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來朝 이후 匈奴와 漢은 和親의 約을 맺음으로써 상호간의 독립적인 영토와 주권을 존중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匈奴가 漢에 대하여 入質과 稱臣하게 되었다. 이것은 漢初 복수의 독립적 권력들이 무질서하게 산재된 상황에서 체결된 和親의 약속과는 성격을 달랐다. 또한 武帝시기 중국 이외의 外國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고 郡縣 지배를 천하로 확장하는 단계와도 달랐다. 이것은 宣帝 이후 중국과 외국들이 主客의 관계로서 상대방의 독립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정연한 질서를 갖추고 공존하는 ‘天下 질서’를 출현시킨 계기로 그 역사적 의의가 주목된다(김한규, 1988 : 72∼73).
 
이름
[악연구제]선우 , 선현탄 , 오선막 , 오선막 , 계후산(稽侯㹪) ,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 , 악연구제선우 , 악연구제선우 , 악연구제선우 , 도융기 , 호한야선우 , 악연구제선우
지명
고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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