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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가 오환을 공격하고 있는 틈을 타 범명우(范明友)를 보내니 흉노는 이미 가버리고 오환의 왕을 잡았으며 6천여 급을 베어버림

  • 국가
    흉노(匈奴)
그 이듬해주 001
각주 001)
漢 昭帝 元鳳 3년(전78)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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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3천여 기병이 오원으로 들어와 수천 명을 잡아가고 죽였고, 이후 수만 기병이 남쪽으로 내려와 요새 부근에서 사냥을 하면서 요새 밖에 있는 정장(亭障)을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잡아갔다. 이때 한나라의 변군(邊郡)의 봉화[대]와 관측소가 정밀하고 정확하여 흉노가 변경을 공격해도 이익이 적어 다시 장성을 넘어 공격하는 것이 드물게 되었다. 한나라는 다시 흉노에서 항복한 사람을 잡았는데,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환(烏桓)주 002
각주 002)
烏桓 : ‘烏丸’으로도 불리는 이들은 기원전 4~3세기경에 內蒙古自治區 동부의 老哈河의 상류 지대에서 동남으로는 遼寧省 大陵河와 小陵河 유역까지, 즉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赤峰市, 遼寧省 朝陽市 그리고 錦州市와 그 주변 지대를 포함한 일대에서 번성하였던 東胡의 한 支派이다. 東胡가 전206년에 흉노 冒頓單于의 기습을 받고 괴멸된 이후 남은 일부 部衆이 ‘烏桓山’(지금 內蒙古自治區 阿魯科爾沁旗 북부의 大興安嶺山脈 南端)으로 달아났는데, 그곳의 이름을 따서 烏桓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몽골계통의 종족으로 추정되며 생활은 주로 유목과 사냥으로 살아갔다. 내적으로 手工業과 農業도 일부 존재했다고 한다. 匈奴의 통치를 받으면서 정기적으로 소, 말, 양 그리고 동물의 가죽을 공물로 바쳤다. 武帝시기에 霍去病이 이들의 일부를 병합하고 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 등의 塞外로 徙民시킨 다음 護烏桓校尉를 두어 다스렸다. 昭帝 이후에 세력을 확대하면서 匈奴와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後漢 초기에 폐지되었던 護烏桓校尉를 다시 上谷郡 寧城에 설치하여 이들을 통제하였다(『後漢書』 권90 「烏桓鮮卑傳」 : 2979~2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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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아가신 선우의 무덤을 파헤쳐서 흉노가 [이에] 화를 내 바로 2만 기를 일으켜 오환을 공격했다. 대장군 곽광(霍光) 주 003
각주 003)
霍光 : 字가 子孟이고 河東 平陽(지금의 山西省 臨汾縣) 출생이다. 驃騎將軍 霍去病의 이복동생으로, 10여 세 때부터 武帝를 측근에서 섬기다가 武帝가 죽을 무렵에는 大司馬大將軍 博陸侯가 되었다. 그 이후 金日磾․上官桀․桑弘羊 등과 함께 後事를 위탁받았다. 武帝가 죽자 8세에 즉위한 昭帝를 보필하여 政事를 집행하였다. 전80년 昭帝의 형인 燕王 旦의 반란을 기회삼아 병사한 金日磾를 제외하고 여타 顧命大臣인 上官桀․桑弘羊 등의 政敵을 타도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昭帝가 죽은 후에는 그를 계승한 昌邑王의 제위를 박탈하고 앞서 巫蠱의 난 때 죽은 戾太子의 손자를 옹립했다. 이로써 宣帝가 즉위하게 되자 그 공으로 增封되었다. 또한 황후 許氏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을 皇后로 만들어 권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宣帝가 霍光이 죽은 후 그의 일족을 반역죄로 몰아 모두 죽여 버림으로써 몰락했다(『漢書』 권68 「霍光金日磾傳」 : 2931~2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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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맞아 공격하고자 하여 [그것을] 호군도위(護軍都尉) 조충국(趙充國) 주 004
각주 004)
趙充國(전137~전52) : 隴西 上邽(지금의 甘肅省 天水) 사람으로 字가 翁孫이었다. 金城令居(지금의 甘肅省 令登 서북에 위치)로 이사해 살았다. 武帝시기에 騎士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용맹하고 지략이 많은 무장으로 匈奴와 羌에 대한 전문가로서 활약하였다. 貳師將軍 李廣利를 따라 假司馬로 종군하여 공을 세워서 中郞이 되었다가 돌아와 水衡都尉가 되었다. 그 이후 匈奴를 격파하여 西祁王을 잡아 後將軍이 되었다. 霍光이 宣帝를 옹립한 이후에 營平侯가 되었다. 군대를 이끌고 변경을 수비하여 匈奴의 도발을 막았다. 新爵 元年(전61)에 先零羌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진압에 공을 세웠다(『漢書』 권69 「趙充國辛慶忌傳」 : 2971~2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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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물었다. [조]충국이 대답하였다. “오환은 요사이도 종종 요새를 침범했는데, 지금 흉노가 [그들을] 공격하니 [이런 상황의 전개는] 한나라에게 유리합니다. 또한 흉노의 도발이 줄어드니 북변은 다행히 무사합니다. 오랑캐[蠻夷]끼리 서로 공격하는데 [우리가] 군대를 일으켜 요격한다면 [오히려 그들의] 침범을 야기하기 때문에 [좋은] 계획이 아닙니다.” [곽]광이 다시 중랑장(中郞將) 범명우(范明友) 주 005
각주 005)
范明友(?~전66) : 前漢 昭帝時代 中郞將이 되었다. 元鳳 3년(전78) 度遼將軍으로 2만을 이끌고 烏桓을 진압했다. 이듬해에는 平陵侯가 되었다. 그 이후 霍光의 사위가 되어 未央衛尉가 되었다. 宣帝時代에는 光祿勳이 되었다가 地節 4년(전66)에 霍氏의 모반에 연루되어 죽었다(『漢書』 권68 「霍光金日磾傳」 : 2950~2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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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물으니, [범]명우는 공격을 해도 좋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범]명우를 도료장군(度遼將軍)주 006
각주 006)
度遼將軍 : 遼西地域에 있는 烏桓을 정벌하는 목적을 위해 설치한 將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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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아 2만 기를 이끌고 요동으로 출정하도록 했다. 흉노에서는 한나라의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물려 [돌아]갔다. 이전에 [곽]광[범]명우에게 훈령을 내려 말하였다. “군대를 함부로 내지 말라, [군대를 늦게 일으켜] 흉노를 [공격하는 것이] 늦어지면주 007
각주 007)
“後匈奴”는 군대를 늦게 동원하여 匈奴를 공격하지 못하였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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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을 공격해라.” 오환은 이때 새로 흉노 군대에게 [피해를] 입었고 [범]명우는 이미 흉노가 물러나자 오환이 약해진 틈을 타 [그들을] 공격하여 6천여 급을 벴고 세 명의 왕을 잡아 돌아와 평릉후(平陵侯)로 봉해졌다.주 008
각주 008)
漢 昭帝 元鳳 4년(전77)의 일이다. 이상과 같은 霍光시대 烏桓과 匈奴의 대결과 漢나라의 정벌에 대해서는 『三國志』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匈奴의 壹衍鞮單于의 치세에 이르러, 烏桓은 점차 강하게 되어, 匈奴 單于의 무덤을 파내면서 장차 [이전에] 冒頓[單于]에게 격파된 치욕을 갚으려고 하였다. 壹衍鞮單于가 크게 노하여 2만 명의 騎兵을 발동하여 烏桓을 공격하였다. 大將軍 霍光이 그 소식을 듣고 度遼將軍 范明友를 파견하니, 范明友는 3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遼東으로 나가서 匈奴를 추격하였다. [그러나] 范明友의 군대가 도착했을 무렵에 匈奴는 이미 [군대를] 이끌고 가버렸다. 烏桓이 새로이 匈奴 군대에게 공격을 당하자, 그들이 쇠퇴하고 피폐된 틈을 타서 [范明友는] 마침내 전진하여 烏桓을 격파하고 6천여 명을 참수하고, [烏桓의] 3명의 왕의 머리를 얻어서 귀환하였다. 그 후에 [烏桓은] 자주 [漢의] 변경 요새를 침범했으나, 范明友는 그때마다 그들을 정벌하여 격파하였다”(『三國志』 「魏志 東夷傳」 : 833 “至匈奴壹衍鞮單于時, 烏丸轉彊, 發掘匈奴單于冢, 將以報冒頓所破之恥. 壹衍鞮單于大怒, 發二萬騎以擊烏丸. 大將軍霍光聞之, 遣度遼將軍 范明友將三萬騎出遼東追擊匈奴. 比明友兵至, 匈奴已引去. 烏丸新被匈奴兵, 乘其衰弊, 遂進擊烏丸, 斬首六千餘級, 獲三王首還. 後數復犯塞, 明友輒征破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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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漢 昭帝 元鳳 3년(전78)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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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烏桓 : ‘烏丸’으로도 불리는 이들은 기원전 4~3세기경에 內蒙古自治區 동부의 老哈河의 상류 지대에서 동남으로는 遼寧省 大陵河와 小陵河 유역까지, 즉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赤峰市, 遼寧省 朝陽市 그리고 錦州市와 그 주변 지대를 포함한 일대에서 번성하였던 東胡의 한 支派이다. 東胡가 전206년에 흉노 冒頓單于의 기습을 받고 괴멸된 이후 남은 일부 部衆이 ‘烏桓山’(지금 內蒙古自治區 阿魯科爾沁旗 북부의 大興安嶺山脈 南端)으로 달아났는데, 그곳의 이름을 따서 烏桓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몽골계통의 종족으로 추정되며 생활은 주로 유목과 사냥으로 살아갔다. 내적으로 手工業과 農業도 일부 존재했다고 한다. 匈奴의 통치를 받으면서 정기적으로 소, 말, 양 그리고 동물의 가죽을 공물로 바쳤다. 武帝시기에 霍去病이 이들의 일부를 병합하고 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 등의 塞外로 徙民시킨 다음 護烏桓校尉를 두어 다스렸다. 昭帝 이후에 세력을 확대하면서 匈奴와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後漢 초기에 폐지되었던 護烏桓校尉를 다시 上谷郡 寧城에 설치하여 이들을 통제하였다(『後漢書』 권90 「烏桓鮮卑傳」 : 2979~2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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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霍光 : 字가 子孟이고 河東 平陽(지금의 山西省 臨汾縣) 출생이다. 驃騎將軍 霍去病의 이복동생으로, 10여 세 때부터 武帝를 측근에서 섬기다가 武帝가 죽을 무렵에는 大司馬大將軍 博陸侯가 되었다. 그 이후 金日磾․上官桀․桑弘羊 등과 함께 後事를 위탁받았다. 武帝가 죽자 8세에 즉위한 昭帝를 보필하여 政事를 집행하였다. 전80년 昭帝의 형인 燕王 旦의 반란을 기회삼아 병사한 金日磾를 제외하고 여타 顧命大臣인 上官桀․桑弘羊 등의 政敵을 타도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昭帝가 죽은 후에는 그를 계승한 昌邑王의 제위를 박탈하고 앞서 巫蠱의 난 때 죽은 戾太子의 손자를 옹립했다. 이로써 宣帝가 즉위하게 되자 그 공으로 增封되었다. 또한 황후 許氏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을 皇后로 만들어 권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宣帝가 霍光이 죽은 후 그의 일족을 반역죄로 몰아 모두 죽여 버림으로써 몰락했다(『漢書』 권68 「霍光金日磾傳」 : 2931~2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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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趙充國(전137~전52) : 隴西 上邽(지금의 甘肅省 天水) 사람으로 字가 翁孫이었다. 金城令居(지금의 甘肅省 令登 서북에 위치)로 이사해 살았다. 武帝시기에 騎士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용맹하고 지략이 많은 무장으로 匈奴와 羌에 대한 전문가로서 활약하였다. 貳師將軍 李廣利를 따라 假司馬로 종군하여 공을 세워서 中郞이 되었다가 돌아와 水衡都尉가 되었다. 그 이후 匈奴를 격파하여 西祁王을 잡아 後將軍이 되었다. 霍光이 宣帝를 옹립한 이후에 營平侯가 되었다. 군대를 이끌고 변경을 수비하여 匈奴의 도발을 막았다. 新爵 元年(전61)에 先零羌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진압에 공을 세웠다(『漢書』 권69 「趙充國辛慶忌傳」 : 2971~2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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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范明友(?~전66) : 前漢 昭帝時代 中郞將이 되었다. 元鳳 3년(전78) 度遼將軍으로 2만을 이끌고 烏桓을 진압했다. 이듬해에는 平陵侯가 되었다. 그 이후 霍光의 사위가 되어 未央衛尉가 되었다. 宣帝時代에는 光祿勳이 되었다가 地節 4년(전66)에 霍氏의 모반에 연루되어 죽었다(『漢書』 권68 「霍光金日磾傳」 : 2950~2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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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度遼將軍 : 遼西地域에 있는 烏桓을 정벌하는 목적을 위해 설치한 將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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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後匈奴”는 군대를 늦게 동원하여 匈奴를 공격하지 못하였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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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漢 昭帝 元鳳 4년(전77)의 일이다. 이상과 같은 霍光시대 烏桓과 匈奴의 대결과 漢나라의 정벌에 대해서는 『三國志』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匈奴의 壹衍鞮單于의 치세에 이르러, 烏桓은 점차 강하게 되어, 匈奴 單于의 무덤을 파내면서 장차 [이전에] 冒頓[單于]에게 격파된 치욕을 갚으려고 하였다. 壹衍鞮單于가 크게 노하여 2만 명의 騎兵을 발동하여 烏桓을 공격하였다. 大將軍 霍光이 그 소식을 듣고 度遼將軍 范明友를 파견하니, 范明友는 3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遼東으로 나가서 匈奴를 추격하였다. [그러나] 范明友의 군대가 도착했을 무렵에 匈奴는 이미 [군대를] 이끌고 가버렸다. 烏桓이 새로이 匈奴 군대에게 공격을 당하자, 그들이 쇠퇴하고 피폐된 틈을 타서 [范明友는] 마침내 전진하여 烏桓을 격파하고 6천여 명을 참수하고, [烏桓의] 3명의 왕의 머리를 얻어서 귀환하였다. 그 후에 [烏桓은] 자주 [漢의] 변경 요새를 침범했으나, 范明友는 그때마다 그들을 정벌하여 격파하였다”(『三國志』 「魏志 東夷傳」 : 833 “至匈奴壹衍鞮單于時, 烏丸轉彊, 發掘匈奴單于冢, 將以報冒頓所破之恥. 壹衍鞮單于大怒, 發二萬騎以擊烏丸. 大將軍霍光聞之, 遣度遼將軍 范明友將三萬騎出遼東追擊匈奴. 比明友兵至, 匈奴已引去. 烏丸新被匈奴兵, 乘其衰弊, 遂進擊烏丸, 斬首六千餘級, 獲三王首還. 後數復犯塞, 明友輒征破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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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곽광(霍光), 조충국(趙充國), [조]충국, [곽]광, 범명우(范明友), [범]명우, [범]명우, [곽]광, [범]명우, [범]명우, 평릉후(平陵侯)
지명
오원,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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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가 오환을 공격하고 있는 틈을 타 범명우(范明友)를 보내니 흉노는 이미 가버리고 오환의 왕을 잡았으며 6천여 급을 베어버림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