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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흉노가 한나라와 화친을 꾀한 뒤 이오왕(犁汙王) 등에게 장액군에 쳐들어갈 것을 건의하였으나 실패함

  • 국가
    흉노(匈奴)
이듬해주 001
각주 001)
漢 昭帝 元鳳 元年(전80)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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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는 좌·우부 2만 기를 일으켜 네 개의 부대를 만들고 변경으로 들어와 노략질을 했다. 한나라 군대가 [그들을] 추격하여 목을 베거나 포로로 잡은 것이 9천 명이었고 구탈왕(甌脫王)주 002
각주 002)
甌脫 : 국경에서 척후를 위해 땅을 파서 만든 시설을 말하는데, 甌脫王은 그것을 담당했던 책임자를 의미한다(주20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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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사로잡았는데 한나라는 잃은 것이 없었다. 흉노는 한나라에 구탈왕이 [잡혀] 있는 것을 알고 [그가 군대를] 이끌고 공격할까 걱정하여 바로 서북쪽으로 멀리 가서 감히 남쪽으로 [가축을] 몰고 와 풀과 물을 먹이지 못하고 백성들을 동원하여 구탈에 주둔시켰을 뿐이었다. 이듬해주 003
각주 003)
漢 昭帝 元鳳 2년(전79)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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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9천 기를 보내 수항성에 주둔시키고 한나라 [공격]에 대비하였으며 [또한] 북쪽으로 여오[수] 주 004
각주 004)
주76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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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다리를 놓아 건너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도망갈 때를 대비하였다.주 005
각주 005)
만약 급박한 일이 발생하면 漢나라의 공격을 피해 북쪽으로 도망갈 때 이 다리를 건넌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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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이미] 위율이 죽고 없었는데, 위율이 살아 있을 때 늘 [그가] 화친의 이익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도 흉노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그가] 죽자 군대가 자주 곤궁한 상황에 빠져 나라가 더욱 가난하게 되었다. 선우의 아우 좌록리왕이 위율의 말을 생각하고 화친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나라가 [이를] 듣지 않을까 걱정하여 선뜻 말을 하지 못해 늘 좌우의 측근을 시켜 둘러서 한나라 사신에게 이야기하게 했다. 그러면서 [흉노의] 공격과 노략질 역시 점차 줄어들게 하고 한나라 사신에 대한 대우 역시 더욱 후하게 함으로써 점차 화친에 이르고자 하였다. 한나라 역시 [이를 이용해 흉노를] 기미(羈縻)주 006
각주 006)
羈縻 : 말의 고삐와 소의 코뚜레를 합성하여 만든 말이다. 견제하면서 관계를 단절하지 않되 그 이상의 적극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는다는 뜻을 함축한다. 그런데 이 용어는 漢武帝 때 처음 출현하여 昭帝․宣帝 시기에 일반화된 역사적 개념으로 外夷에 대한 중국의 독특한 대응양식을 지칭하는데, 西漢後期에 구축된 새로운 천하질서의 성격을 잘 표현하는 말이다. 원문에서는 羈縻함으로써 專制하지 않았다는 소극적인 면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羈縻不絶而已’라는 관용구가 있듯이 外夷와의 관계를 ‘不絶’한다는 적극적인 면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中外의 관계는 형식적으로 外夷가 中國을 향해 臣服하되, 실제적으로는 상호 독립적인 관계에 있는 국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羈縻”의 내용인 것이다. 이처럼 인근의 종족과 국가를 中國化하지도 않지만 동시에 敵國化하지도 않는 국제관계의 원리는 왕조시대 중국인들이 발견한 최선의 외교 방침이었다고 하겠다(김한규,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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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자 하였다. 그 이후 좌록리왕이 죽었다.
이듬해주 007
각주 007)
漢 昭帝 元鳳 3년(전78)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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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는 이오왕(犁汙王)주 008
각주 008)
犁汙 : 匈奴의 지명인데, 右谷蠡王에게 소속된 지역이다. 다른 기록에 “犁汙都尉” 또는 “到左犁汙王成所居地”라는 용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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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시켜 한나라[의 사정을] 엿보면서 [그에게] 주천[군]장액[군]의 군대가 약해지면 군대를 출정시켜 공격해 보면 그 땅을 다시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한나라에는 앞서 항복한 자들이 있어 그 계획을 먼저 듣고 천자가 변경에 미리 준비하도록 조칙을 내렸다. 이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현왕과 이오왕이 4천 명의 기병을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일륵[현](日勒縣) 주 009
각주 009)
日勒縣 : 縣의 이름으로 지금의 甘肅省 永昌縣 西北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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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란[현](屋蘭縣) 주 010
각주 010)
屋蘭縣 : 縣의 이름으로 지금의 甘肅省 山丹縣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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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화[현](番和縣) 주 011
각주 011)
番和縣 : 縣의 이름으로 지금의 甘肅省 永昌縣에 위치하고 있다. 이상의 세 곳은 漢代 張掖郡에 속해 있는 縣이었다(주7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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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쳐들어왔는데, 장액태수와 속국도위가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공격해 크게 격파해 도망갈 수 있었던 자가 [겨우] 수백 명이었다. 속국(屬國)의 천장(千長)주 012
각주 012)
千長 : 천 명으로 구성된 단위의 장을 의미한다(주2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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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왕(義渠王)의 [부하인 어떤] 기병이 이오왕을 활로 쏴 죽여 황금 2백 근, 말 2백 필을 상으로 받고 이오왕으로 책봉되었다. 속국도위 곽충(郭忠)성안후(成安侯)로 책봉되었다.주 013
각주 013)
漢 昭帝 元鳳 3년(전78) 이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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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 흉노가 감히 장액[군]으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 각주 001)
    漢 昭帝 元鳳 元年(전80)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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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甌脫 : 국경에서 척후를 위해 땅을 파서 만든 시설을 말하는데, 甌脫王은 그것을 담당했던 책임자를 의미한다(주20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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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漢 昭帝 元鳳 2년(전79)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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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주76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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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만약 급박한 일이 발생하면 漢나라의 공격을 피해 북쪽으로 도망갈 때 이 다리를 건넌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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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羈縻 : 말의 고삐와 소의 코뚜레를 합성하여 만든 말이다. 견제하면서 관계를 단절하지 않되 그 이상의 적극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는다는 뜻을 함축한다. 그런데 이 용어는 漢武帝 때 처음 출현하여 昭帝․宣帝 시기에 일반화된 역사적 개념으로 外夷에 대한 중국의 독특한 대응양식을 지칭하는데, 西漢後期에 구축된 새로운 천하질서의 성격을 잘 표현하는 말이다. 원문에서는 羈縻함으로써 專制하지 않았다는 소극적인 면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羈縻不絶而已’라는 관용구가 있듯이 外夷와의 관계를 ‘不絶’한다는 적극적인 면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中外의 관계는 형식적으로 外夷가 中國을 향해 臣服하되, 실제적으로는 상호 독립적인 관계에 있는 국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羈縻”의 내용인 것이다. 이처럼 인근의 종족과 국가를 中國化하지도 않지만 동시에 敵國化하지도 않는 국제관계의 원리는 왕조시대 중국인들이 발견한 최선의 외교 방침이었다고 하겠다(김한규,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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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漢 昭帝 元鳳 3년(전78)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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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犁汙 : 匈奴의 지명인데, 右谷蠡王에게 소속된 지역이다. 다른 기록에 “犁汙都尉” 또는 “到左犁汙王成所居地”라는 용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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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日勒縣 : 縣의 이름으로 지금의 甘肅省 永昌縣 西北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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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屋蘭縣 : 縣의 이름으로 지금의 甘肅省 山丹縣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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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番和縣 : 縣의 이름으로 지금의 甘肅省 永昌縣에 위치하고 있다. 이상의 세 곳은 漢代 張掖郡에 속해 있는 縣이었다(주7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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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千長 : 천 명으로 구성된 단위의 장을 의미한다(주2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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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漢 昭帝 元鳳 3년(전78) 이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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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위율, 위율, 위율, 곽충(郭忠), 성안후(成安侯)
지명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수항성, 한나라, 여오[수],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주천[군], 장액[군], 한나라, 일륵[현](日勒縣), 옥란[현](屋蘭縣), 반화[현](番和縣), 장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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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가 한나라와 화친을 꾀한 뒤 이오왕(犁汙王) 등에게 장액군에 쳐들어갈 것을 건의하였으나 실패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