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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중합후의 군대가 천산에 이른 뒤 흉노가 물러났으며 개릉후는 거사(車師)의 왕과 백성을 잡고 돌아옴

  • 국가
    흉노(匈奴)
중합후 [마통]의 군대가 천산(天山)주 001
각주 001)
天山 :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주746) 참조), 당시 漢나라 군대의 행군로로 추정해 볼 때 몽골공화국 항가이산맥의 최고봉인 보그도 울라(Boghdo Ula)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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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자 흉노는 대장 안거(偃渠) 주 002
각주 002)
偃渠 : 匈奴의 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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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좌호지왕장(左呼知王將)·우호지왕장(右呼知王將)주 003
각주 003)
左․右呼知王將 : 匈奴의 관직명으로 24개 萬騎長의 하나였다(주2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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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2만여 기를 이끌고 한나라를 요격하도록 하였는데, 한나라 군대가 강한 것을 보고 물러가 버렸다. 중합후는 아무런 소득도 손실도 없었다. 이때 한나라는 거사[국](車師國)주 004
각주 004)
車師國 : 新疆維吾爾自治區 吐魯番縣 부근에 있었던 고대 오아시스 왕국으로 음은 ‘거사’이다. 이 도시국가의 주민들은 원래 新疆省 북부의 율두즈 계곡에서 바르 쿨 방면에 걸친 天山山脈 동부 지역에 거주했다. 그러다가 점차 분열적 경향을 보여 武帝가 이곳으로 진출할 때에는 이미 몇 개의 하위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중에서 중심 세력이 투르판 분지와 북쪽의 天山 산록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광범위한 지역의 주민을 포괄하는 이 명칭의 개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광의와 협의의 두 가지 의미로 後漢代까지 존속되었다. 과거에는 姑師로 불리기도 했는데, 전60년대에 漢나라가 이 지역을 정복한 이후에 이름을 車師라고 부르게 되었다. 宣帝시대에 車師前王과 車師後王, 그리고 山北의 6개 나라로 나뉘었다. 車師前王國은 지금의 新疆維吾爾自治區 투르판[吐魯番]에 있었고, 그 도읍은 交河城이었다. 車師後王國은 天山의 북쪽으로 지금의 짐사[濟木薩] 부근에 있었다. 이곳은 중국과 북방의 匈奴가 오아시스 지역의 패권을 다툴 때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宣帝시기에 西域都護府가 설치되고, 元帝시기에는 戊己校尉가 車師前王國의 高昌壁에 설치되었다. 前王國은 天山山脈의 남쪽을 가로지르는 北道의 기점이었지만, 後王國에는 匈奴의 세력이 강하게 미쳤다. 平帝 때에는 敦煌에서 前王國으로 직행하는 길이 열렸다. 이 길이 後王國에 미치자 後王은 匈奴로 도망하고, 王莽의 시대에는 車師가 완전히 匈奴의 손에 떨어져 西域은 중국에서 이탈되었다. 後漢이 西域에 진출하게 되자, 다시금 匈奴와 車師前國과 後國을 놓고 다투었다. 班勇은 前國의 柳中에 진주하여 일시 西域을 경영하였다. 曹魏와 晉朝에서도 戊己校尉를 車師前國에 설치하였다. 반면 車師後國은 西進한 蠕蠕에게 멸망당하여 晉代부터 史書에서 사라졌다. 그 후 車師國은 前國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후 五胡十六國時期에 漢人이 高昌에 유입되어 車師國과 대립하게 되었다. 北涼이 멸망했을 때, 그 잔당이 高昌城에 도주하였다가 車師國을 멸망시켰다. 이들은 투르판 분지에 且渠氏의 高昌國을 세웠다. 이때 車師國 왕은 北魏로 망명했다(『漢書』 권96下 「西域傳」 〈車師國〉 : 3921~3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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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군대가 중합후를 가로막을까 걱정하여 개릉후 주 005
각주 005)
闓陵侯 : 이름이 成娩으로 匈奴의 介和王이었다가 漢나라에 투항하였다. 車師를 공격한 공으로 闓陵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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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거사[의 군대]를 따로 포위하게 하여 그 왕과 백성들을 모두 잡아 돌아왔다.

  • 각주 001)
    天山 :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주746) 참조), 당시 漢나라 군대의 행군로로 추정해 볼 때 몽골공화국 항가이산맥의 최고봉인 보그도 울라(Boghdo Ula)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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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偃渠 : 匈奴의 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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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左․右呼知王將 : 匈奴의 관직명으로 24개 萬騎長의 하나였다(주2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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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車師國 : 新疆維吾爾自治區 吐魯番縣 부근에 있었던 고대 오아시스 왕국으로 음은 ‘거사’이다. 이 도시국가의 주민들은 원래 新疆省 북부의 율두즈 계곡에서 바르 쿨 방면에 걸친 天山山脈 동부 지역에 거주했다. 그러다가 점차 분열적 경향을 보여 武帝가 이곳으로 진출할 때에는 이미 몇 개의 하위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중에서 중심 세력이 투르판 분지와 북쪽의 天山 산록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광범위한 지역의 주민을 포괄하는 이 명칭의 개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광의와 협의의 두 가지 의미로 後漢代까지 존속되었다. 과거에는 姑師로 불리기도 했는데, 전60년대에 漢나라가 이 지역을 정복한 이후에 이름을 車師라고 부르게 되었다. 宣帝시대에 車師前王과 車師後王, 그리고 山北의 6개 나라로 나뉘었다. 車師前王國은 지금의 新疆維吾爾自治區 투르판[吐魯番]에 있었고, 그 도읍은 交河城이었다. 車師後王國은 天山의 북쪽으로 지금의 짐사[濟木薩] 부근에 있었다. 이곳은 중국과 북방의 匈奴가 오아시스 지역의 패권을 다툴 때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宣帝시기에 西域都護府가 설치되고, 元帝시기에는 戊己校尉가 車師前王國의 高昌壁에 설치되었다. 前王國은 天山山脈의 남쪽을 가로지르는 北道의 기점이었지만, 後王國에는 匈奴의 세력이 강하게 미쳤다. 平帝 때에는 敦煌에서 前王國으로 직행하는 길이 열렸다. 이 길이 後王國에 미치자 後王은 匈奴로 도망하고, 王莽의 시대에는 車師가 완전히 匈奴의 손에 떨어져 西域은 중국에서 이탈되었다. 後漢이 西域에 진출하게 되자, 다시금 匈奴와 車師前國과 後國을 놓고 다투었다. 班勇은 前國의 柳中에 진주하여 일시 西域을 경영하였다. 曹魏와 晉朝에서도 戊己校尉를 車師前國에 설치하였다. 반면 車師後國은 西進한 蠕蠕에게 멸망당하여 晉代부터 史書에서 사라졌다. 그 후 車師國은 前國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후 五胡十六國時期에 漢人이 高昌에 유입되어 車師國과 대립하게 되었다. 北涼이 멸망했을 때, 그 잔당이 高昌城에 도주하였다가 車師國을 멸망시켰다. 이들은 투르판 분지에 且渠氏의 高昌國을 세웠다. 이때 車師國 왕은 北魏로 망명했다(『漢書』 권96下 「西域傳」 〈車師國〉 : 3921~3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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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闓陵侯 : 이름이 成娩으로 匈奴의 介和王이었다가 漢나라에 투항하였다. 車師를 공격한 공으로 闓陵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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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중합후, 마통, 안거(偃渠), 개릉후
지명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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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합후의 군대가 천산에 이른 뒤 흉노가 물러났으며 개릉후는 거사(車師)의 왕과 백성을 잡고 돌아옴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