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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한나라가 이광리(李廣利), 공손오(公孫敖), 이릉(李陵)을 보내 흉노와 전투를 벌임

  • 국가
    흉노(匈奴)
그 이듬해주 001
각주 001)
漢 武帝 天漢 2년(전99)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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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에서는 이사장군주 002
각주 002)
『史記』에는 “廣利”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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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시켜 삼만 기를 거느리고 주천에서 나가 천산(天山)주 003
각주 003)
天山 : 산 명칭인데, 다양한 위치 비정 가능하다. 여기에서는 張掖縣에 있는 祁連山이 아니라 지금의 新疆維吾爾自治區 하미(哈蜜 : 伊州) 이북의 巴里坤 哈薩克自治縣 부근에 있는 蒲類海 근처에 위치한 天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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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우현왕을 공격해 [흉노의] 수급과 포로 만여 인을 얻어 돌아왔다. 흉노가 이사[장군의 부대]를 크게 포위하니 거의 빠져나갈 수 없었다.주 004
각주 004)
『史記』에는 “幾不脫”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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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군대는 열에 여섯 일곱을 잃었다. 한나라에서는 또한주 005
각주 005)
『史記』에는 “復”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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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우장군 [공손오]를 시켜 서하(西河) 주 006
각주 006)
西河 :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山西省, 陝西省 변경지대로 陝西 東部 黃河 西岸을 통칭한다(주1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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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나가 강노도위(彊弩都尉)주 007
각주 007)
“彊弩都尉”는 路博德을 말한다. 그는 驃騎將軍을 따라 공을 세워 符離侯가 되었다. 그는 이후 죄를 지어 侯를 잃었다가 彊弩都尉가 되어 居延에 주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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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박덕]과 탁야산(涿邪山) 주 008
각주 008)
涿邪山 : 음은 탁야산이다. 산 명칭으로 內蒙古의 居延海의 서북에서 떨어진 지금 몽골공화국의 西部에 있는 만달 고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史記』에는 “涿涂山”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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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만났으나 얻은 바가 없었다. 또 기도위(騎都尉) 이릉(李陵) 주 009
각주 009)
李陵(?~전74) : 자는 小卿으로 隴西 成紀(지금의 甘肅城 秦安縣) 사람이다. 명장 李廣의 손자로 병사 8백 기를 이끌고 匈奴로 쳐들어가 2천 리를 들어가 지형을 살피고 돌아와 騎都尉가 되었다. 하지만 5천 명의 보병으로 匈奴를 공격하다가 잡혔다. 그 이후 가족이 배신자로 낙인찍혀 죽임을 당하자 匈奴에 투항하였다(『漢書』 卷54 「李廣蘇建傳」 〈李陵〉 : 2450~2458). 司馬遷은 그를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가 이후 蘇武에게 보낸 편지가 『文選』에 남아 있다(도미야 이타루, 2003 :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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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시켜 보병과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거연에서 북쪽으로 천여 리 나아가 선우와 만나 전투를 벌여 [이]릉이 [흉노병] 만여 명을 죽이거나 상하게 하였으나 병력[과] 식량이 다 떨어져 [포위를 풀고] 돌아오려고 하자주 010
각주 010)
『史記』에는 “兵及食盡, 欲解歸”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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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가주 011
각주 011)
『史記』에는 “匈奴”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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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릉을 포위하니 [이]릉이 흉노에 투항하고 그의 병사[중에서] 벗어나 한나라로 돌아온 자가 [겨우] 4백 명이었다.주 012
각주 012)
『史記』에는 “其兵遂沒, 得還者四百人”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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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는 이에 [이]릉을 귀하게 여겨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 각주 001)
    漢 武帝 天漢 2년(전99)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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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史記』에는 “廣利”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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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天山 : 산 명칭인데, 다양한 위치 비정 가능하다. 여기에서는 張掖縣에 있는 祁連山이 아니라 지금의 新疆維吾爾自治區 하미(哈蜜 : 伊州) 이북의 巴里坤 哈薩克自治縣 부근에 있는 蒲類海 근처에 위치한 天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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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史記』에는 “幾不脫”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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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史記』에는 “復”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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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西河 :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山西省, 陝西省 변경지대로 陝西 東部 黃河 西岸을 통칭한다(주1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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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彊弩都尉”는 路博德을 말한다. 그는 驃騎將軍을 따라 공을 세워 符離侯가 되었다. 그는 이후 죄를 지어 侯를 잃었다가 彊弩都尉가 되어 居延에 주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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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涿邪山 : 음은 탁야산이다. 산 명칭으로 內蒙古의 居延海의 서북에서 떨어진 지금 몽골공화국의 西部에 있는 만달 고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史記』에는 “涿涂山”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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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李陵(?~전74) : 자는 小卿으로 隴西 成紀(지금의 甘肅城 秦安縣) 사람이다. 명장 李廣의 손자로 병사 8백 기를 이끌고 匈奴로 쳐들어가 2천 리를 들어가 지형을 살피고 돌아와 騎都尉가 되었다. 하지만 5천 명의 보병으로 匈奴를 공격하다가 잡혔다. 그 이후 가족이 배신자로 낙인찍혀 죽임을 당하자 匈奴에 투항하였다(『漢書』 卷54 「李廣蘇建傳」 〈李陵〉 : 2450~2458). 司馬遷은 그를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가 이후 蘇武에게 보낸 편지가 『文選』에 남아 있다(도미야 이타루, 2003 :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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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史記』에는 “兵及食盡, 欲解歸”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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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史記』에는 “匈奴”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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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史記』에는 “其兵遂沒, 得還者四百人”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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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공손오, 노박덕, 이릉(李陵), [이]릉, [이]릉, [이]릉, [이]릉
지명
한나라, 주천, 한나라, 한나라, 서하(西河), 탁야산(涿邪山), 거연,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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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이광리(李廣利), 공손오(公孫敖), 이릉(李陵)을 보내 흉노와 전투를 벌임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