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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좌대도위의 거사가 발각된 후 선우가 조파노(趙破奴) 를 공격함

  • 국가
    흉노(匈奴)
그 이듬해주 001
각주 001)
漢 武帝 太初 2년(전103)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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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에서는 착야후 [조]파노에게 2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삭방[군]에서 서북으로 2천여 리를 나아가주 002
각주 002)
左大都尉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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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계산(浚稽山) 주 003
각주 003)
“浚稽山”은 武威 북쪽에 있었다. 內蒙古의 居延海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몽골공화국 南部의 고비 알타이산맥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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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갔다가 돌아올 것을 기약했다. 착야후는 이미 [기약한] 날짜가 되었는데,주 004
각주 004)
『史記』에는 “浞野侯 旣至期而還”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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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대도위가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자 선우가 [그를] 죽이고 [좌익의]주 005
각주 005)
『史記』에는 “左方兵”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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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일으켜 착야후를 공격했다. 착야후는 [그 이전 행군 중에] 수급과 포로 수천을 잡았다. [그는] 돌아오다가 수항성에서 4백 리쯤 떨어져 있는 곳에서 흉노 [군대]주 006
각주 006)
저본에는 “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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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만 기에게 포위되었다. 착야후가 밤에 몸소 물을 구하러 나갔는데, [그를 숨어 있던] 흉노가 [그를] 사로잡고주 007
각주 007)
『史記』에는 “匈奴閒捕, 生得浞野侯”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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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군대를 공격했다. 병사와 관리들은 장군을 잃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서로 돌아갈 것을 권하지 못하여 병사들이 마침내 흉노에 투항했다.주 008
각주 008)
『史記』에는 “軍吏畏亡將而誅, 莫相勸而歸, 軍遂沒於匈奴.”가 『漢書』에서 “軍中郭縱爲護, 維王爲渠, 相與謀曰 : “及諸校尉畏亡將軍而誅之, 莫相勸歸. 軍遂沒於匈奴”로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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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선우 주 009
각주 009)
『史記』에는 “匈奴兒單于”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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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기습부대를 보내 수항성을 공격했다가 함락시키지 못하자 변경을 노략질하고 돌아갔다. 그 이듬해주 010
각주 010)
漢 武帝 太初 3년(전102)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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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가 몸소 수항성을 공격하려 나섰다가 [수항성에] 이르기 전에 병이 나서 죽었다.

  • 각주 001)
    漢 武帝 太初 2년(전103)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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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左大都尉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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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浚稽山”은 武威 북쪽에 있었다. 內蒙古의 居延海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몽골공화국 南部의 고비 알타이산맥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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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史記』에는 “浞野侯 旣至期而還”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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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史記』에는 “左方兵”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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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저본에는 “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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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史記』에는 “匈奴閒捕, 生得浞野侯”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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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史記』에는 “軍吏畏亡將而誅, 莫相勸而歸, 軍遂沒於匈奴.”가 『漢書』에서 “軍中郭縱爲護, 維王爲渠, 相與謀曰 : “及諸校尉畏亡將軍而誅之, 莫相勸歸. 軍遂沒於匈奴”로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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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史記』에는 “匈奴兒單于”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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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漢 武帝 太初 3년(전102)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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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조]파노, [아]선우
지명
한나라, 삭방[군], 준계산(浚稽山), 수항성, 수항성, 수항성, 수항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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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대도위의 거사가 발각된 후 선우가 조파노(趙破奴) 를 공격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