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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야왕이 한나라에 투항한 뒤 흉노의 침입이 줄어들었으나 이듬해 흉노가 우북평(右北平)과 정양(定襄)에 다시 쳐들어옴

 
  • 국가흉노(匈奴)
그 가을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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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武帝 元狩 2년(전123) 가을의 일이다.

선우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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匈奴 伊稚斜單于이다.

가 혼야왕(昆邪王)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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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는 “渾邪王”으로 되어 있다.

과 휴도왕 [주004]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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昆邪王이 休屠王을 살해하자 休屠王의 아들인 金日磾가 漢나라에 투항하여 光祿大夫가 되었다(『漢書』 권68 「霍光金日磾傳」 : 2959~2960).

이 서쪽에서 한나라에게 수만 명이나 죽고 사로잡힌 것에 화가 나서 그들을 불러 죽이려 했다. 혼야왕과 휴도왕은 [이를] 걱정하여 한나라에게 항복할 것을 모의하니 [주005]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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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武帝 元狩 2년의 일이다.

한나라에서 표기장군(票騎將軍) [주006]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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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는 “驃騎將軍”으로 되어 있다.

을 보내 그들을 맞이하게 했다. [주007]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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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 「食貨志」의 기록에 따르면 투항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된 物資의 車輛이 3萬乘이 넘었다고 한다(『漢書』 권24下 「食貨志」 : 1161).

[그런데]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그의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하니 대체로 4만여 명 정도였으나 10만이라고 칭했다. 이에 한나라가 혼야왕을 얻게 되자 농서, 북지, 하서(河西) [주008]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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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西 : 지명으로 지금의 甘肅省과 靑海省의 黃河 서쪽 지역을 통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에 대한 흉노 침공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한나라에서는] 함곡관 동쪽의 빈민들을 흉노에게서 빼앗은 하남 [주009]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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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는 “河南”으로 되어 있다.

신진중(新秦中) [주010]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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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始皇이 蒙恬을 보내 匈奴를 몰아내고 河南의 造陽 북방에 있는 천여 리의 좋은 땅을 얻어 이곳에 성곽을 쌓아 백성들을 옮겨 살도록 하고 新秦이라고 했다.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와서 섞여 빈부가 같지 않아 지금 속칭 새롭게 부자가 된 사람을 ‘新秦’이라고 한 것은 이것에서 연유한 것이다. 武帝는 元狩 3년(전120)에 匈奴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마침 이때 華山 동쪽에서 黃河가 범람하자 백성들을 변경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즉, 關東의 주민들을 다시 찾은 新秦中으로 이주시켰다(주175) 참조).

으로 옮겨 살게 해 [이 지역을] 채웠으므로 북지[군] 서쪽의 수비병을 절반으로 줄일 수가 있었다. [주011]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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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武帝 元狩 3년(전122) 가을에 내린 詔에서 隴西, 北地, 上郡 등 3개 군의 戍卒을 반으로 줄여서 백성들의 요역 부담을 줄이도록 하였다(『漢書』 권6 「武帝紀」 : 177).

그 이듬해 봄에 [주012]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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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는 “봄”이 없다.

흉노가 우북평[군]정양[군]으로 각각 수만 기로 [쳐들어와]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갔다.

 

주 001
漢 武帝 元狩 2년(전123) 가을의 일이다.
주 002
匈奴 伊稚斜單于이다.
주 003
『史記』에는 “渾邪王”으로 되어 있다.
주 004
昆邪王이 休屠王을 살해하자 休屠王의 아들인 金日磾가 漢나라에 투항하여 光祿大夫가 되었다(『漢書』 권68 「霍光金日磾傳」 : 2959~2960).
주 005
漢 武帝 元狩 2년의 일이다.
주 006
『史記』에는 “驃騎將軍”으로 되어 있다.
주 007
『漢書』 「食貨志」의 기록에 따르면 투항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된 物資의 車輛이 3萬乘이 넘었다고 한다(『漢書』 권24下 「食貨志」 : 1161).
주 008
河西 : 지명으로 지금의 甘肅省과 靑海省의 黃河 서쪽 지역을 통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주 009
『史記』에는 “河南”으로 되어 있다.
주 010
秦始皇이 蒙恬을 보내 匈奴를 몰아내고 河南의 造陽 북방에 있는 천여 리의 좋은 땅을 얻어 이곳에 성곽을 쌓아 백성들을 옮겨 살도록 하고 新秦이라고 했다.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와서 섞여 빈부가 같지 않아 지금 속칭 새롭게 부자가 된 사람을 ‘新秦’이라고 한 것은 이것에서 연유한 것이다. 武帝는 元狩 3년(전120)에 匈奴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마침 이때 華山 동쪽에서 黃河가 범람하자 백성들을 변경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즉, 關東의 주민들을 다시 찾은 新秦中으로 이주시켰다(주175) 참조).
주 011
漢 武帝 元狩 3년(전122) 가을에 내린 詔에서 隴西, 北地, 上郡 등 3개 군의 戍卒을 반으로 줄여서 백성들의 요역 부담을 줄이도록 하였다(『漢書』 권6 「武帝紀」 : 177).
주 012
『史記』에는 “봄”이 없다.
 
지명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농서 , 북지 , 하서(河西) , 한나라 , 하남 , 신진중(新秦中) , 북지[군] , 우북평[군] , 정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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