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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한나라 대장군 위청(衛靑)이 삭방군 고궐까지 나아가 흉노를 치니 흉노 역시 주영(朱英)을 죽이고 백성을 빼앗음

  • 국가
    흉노(匈奴)
그 이듬해주 001
각주 001)
漢 武帝 元朔 5년(전12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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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위청 주 002
각주 002)
『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23)에 따르면 이때 衛靑은 공을 세워 車騎將軍이었는데, 『史記』에는 大將軍이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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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여섯 명의 장군과 십여 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삭방[군] 고궐 주 003
각주 003)
高闕 : 朔方郡의 북방에 위치한 협곡이다(주1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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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나가도록 보냈다.주 004
각주 004)
『史記』에는 “出朔方․高關擊胡”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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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왕은 한나라의 군대가 [거기까지] 쳐들어 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무방비 상태로] 술을 마셔 취해 있었다. [그런데] 한나라 군대가 요새에서 육칠백 리나 나와 밤중에 우현왕을 포위했다. 우현왕은 크게 놀라 몸만 빠져 나와 도망갔고 정예기병이주 005
각주 005)
『史記』에 “諸精騎”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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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뒤를 따라갔다. 한나라 장군이 우현왕이 거느리던 남녀 만5천 명과 비소왕(裨小王)주 006
각주 006)
裨小王 : 漢나라의 裨將과 비슷한 下級 官吏이다(주23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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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명을 잡았다. 그 해 가을 흉노의 기병 만 명이 대군으로 들어와 대군도위 주영(朱央) 주 007
각주 007)
『史記』에는 “朱英”으로 되어 있다. 漢代에는 ‘英’과 ‘央’이 서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史記』에는 “匈奴萬騎入殺代郡都尉朱英”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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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죽이고 천여 명을 잡아갔다.

  • 각주 001)
    漢 武帝 元朔 5년(전12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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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23)에 따르면 이때 衛靑은 공을 세워 車騎將軍이었는데, 『史記』에는 大將軍이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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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高闕 : 朔方郡의 북방에 위치한 협곡이다(주1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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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史記』에는 “出朔方․高關擊胡”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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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史記』에 “諸精騎”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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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裨小王 : 漢나라의 裨將과 비슷한 下級 官吏이다(주23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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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史記』에는 “朱英”으로 되어 있다. 漢代에는 ‘英’과 ‘央’이 서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史記』에는 “匈奴萬騎入殺代郡都尉朱英”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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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위청, 주영(朱央)
지명
한나라, 삭방[군], 고궐,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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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대장군 위청(衛靑)이 삭방군 고궐까지 나아가 흉노를 치니 흉노 역시 주영(朱英)을 죽이고 백성을 빼앗음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