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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묵특선우(冒頓單于)가 화친을 구하는 편지를 한나라에 보내자 한나라 황제가 허락함

  • 국가
    흉노(匈奴)
그 이듬해주 001
각주 001)
濟北王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文帝 前元 3년(전177) 오월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明年”이라고 한 것은 文帝 前元4년(전176)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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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가 한나라에 편지를 보내왔다. “하늘이 세워준 흉노대선우(天所立匈奴大單于)주 002
각주 002)
“天所立匈奴大單于”라는 칭호는 匈奴의 군주 칭호를 한자로 번역이 ‘天子’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던 “撑犂孤塗”라고도 추정된다(주2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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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삼가 중국의 황제에게 무고하신가 안부를 묻소. 전날 황제가 화친의 일을 말했고 편지의 뜻도 이와 같아서 크게 기뻐할주 003
각주 003)
『史記』에는 “合歡”으로 되어 있는데, 보내온 편지의 뜻이 서로 맞아 기뻐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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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였소. [그런데도] 한나라 변방의 관리가 [우리] 우현왕을 침범해 모욕했으며 우현왕이 [선우인 나한테도] 주청하지 않고 [자기 부하인] 후의로후(後義盧侯)주 004
각주 004)
後義盧侯 : 難氏와 연결하여 그의 관칭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匈奴의 인명으로 後義盧侯 또는 後義와 盧侯로 나누어 인명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모두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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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難氏) 주 005
각주 005)
難支 : 匈奴의 인명으로 『史記』에는 “難氏”로 되어 있는데, 支와 氏는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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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계획을 듣고 한나라 관리들과 서로 원망하며 두 나라 임금 사이에 맺었던 약속을 깨뜨려 버림으로써 형제(昆弟)주 006
각주 006)
『史記』에는 “兄弟”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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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 친밀함을 이간질했소. 황제로부터 질책하는 편지가주 007
각주 007)
“讓書”는 질책을 한다는 의미로, 匈奴가 다시 漢나라에서 온 편지를 받고 사신을 통해 편지를 漢나라에 보냈는데, 漢나라가 그 사신을 잡아 가두고 흉노에 다시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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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왔으므로 [이쪽에서도] 사자를 보내 편지로 회답했는데, [그 사신은] 돌아오지 않았고 한나라의 사신 [역시] 오지 않으니 한나라도 그런 이유로 화합하지 않아 이웃 나라가 친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오. 지금 낮은 관리가주 008
각주 008)
少吏는 小吏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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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친의] 약속을 깨뜨렸기 때문에 그 벌로써 우현왕에게 서방으로 가서주 009
각주 009)
『史記』에는 “至”가 “之”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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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지를 치게 했소.주 010
각주 010)
冒頓單于가 처벌로 右賢王으로 하여금 月氏를 공격하게 한 것은 文帝 前元 6년(전174)보다 1~2년 정도 앞선 시기로 추정된다(대략 전177~전176년 정도) 이로 인해 月氏가 점차 서남방으로 향하여 이 무렵에 준가르 분지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月氏는 전174~전161년 사이에 烏孫과 연합한 匈奴의 공격을 받아 일리강 유역으로부터 축출되어 아무다리아로 갔다. 이후에 이들은 이곳에서 세력화하여 大月氏를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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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축복을 받았고 [우리] 병사가 우수하고 말의 힘이 강하였기주 011
각주 011)
『史記』에는 “馬彊力”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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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월지를 섬멸함으로써 모두 죽이고 항복시켰소. 누란(樓蘭)주 012
각주 012)
樓蘭 : 지금의 新疆維吾爾自治區 롭 노르(Lop Nor, 羅布泊) 서북쪽 일대에 위치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이다. 왕은 扜泥城(지금의 婼羌縣)에 살았는데, 동서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어서 크게 번영하였다. 中國이 이곳에 진출하기 이전에 匈奴의 복속을 받았다가 이후에 漢나라와 匈奴 모두와 관계를 유지했다. 漢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鄯善國이라고 고쳐 불렀다. 1세기 말부터 서쪽의 쿠샨 왕조의 진출로 인해 2세기 말에는 이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中國의 분열을 틈타 동서 무역로를 차지하고 크게 번성하였다. 이 왕국은 20세기 초 이 지역을 탐사한 영국의 A. 스타인과 스웨덴의 S. 헤딘 등의 발굴조사에 의해 그 실체가 밝혀졌다. 특히 왕국의 남부에 있었던 니야 유적에서 대량으로 출토된 카로슈티 문서(쿠샨 왕조의 영내에서 사용된 카로슈티 문자로 기록)의 기록에 통해 그 실체가 밝혀졌다. 이후 대규모의 조사발굴로 東西交通路에서 차지하는 樓蘭의 중요성이 한층 부각되기도 했다. 4, 5세기에 河西지방이나 중원에 성립된 여러 왕조에 계속 入貢使를 보내어 冊封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439년 北魏가 河西지방의 凉州에 있던 北凉을 토벌하자 北涼의 잔당이 樓蘭을 공격하였다. 그 뒤 3년 후에 北魏의 군대가 樓蘭을 점령한 이후 그 명맥이 겨우 유지되었지만 왕국의 질서는 붕괴되었다. 그리고 6세기경 인근 세력의 공격과 함께 롭 노르의 이동과 같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수원이 고갈되어 이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漢書』 권96상 「鄯善國傳」 : 3875~3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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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손(烏孫)주 013
각주 013)
烏孫 : 고대 종족의 명칭이다. 漢代로부터 南北朝時代 초기에 걸쳐 天山山麓의 일리 계곡, 이식 쿨 근처, 시르다리아 상류 등지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 그 인종에 대해서는 사카, 투르크 등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이들의 혼혈종족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원래 河西走廊에서 月氏 등과 함께 거주하면서 그의 지배를 받다가 匈奴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이주하여 일리 계곡과 이식 쿨 주변 등으로 이주하였다. 이로 인해 세력화하게 되면서 동쪽으로는 匈奴, 西北으로는 康居라는 유목민, 서쪽으로는 安息 등과 접하였다. 君長이 거주하는 곳을 ‘赤穀城’이라고 하였는데, 이식 쿨 근처에 있었다. 이들은 張騫의 여행 이후에 漢나라에 알려져 그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匈奴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존재했다(王明哲․王炳華, 1983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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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걸(呼揭)주 014
각주 014)
呼揭 : 음은 ‘호걸’이다. 고대 종족의 명칭으로 몽골의 북서부에 살던 투르크계 부족으로 오구즈(Oghuz)로 비정된다. 기원전 2세기 冒頓單于에게 정복되어 匈奴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呼揭王은 匈奴에 포함된 呼揭 부족의 장이라고 추정된다. 그 뒤 呼漢邪單于와 郅支單于가 匈奴를 동서 양분한 뒤, 呼揭은 전49년에 郅支單于에게 정벌되었다. 그 뒤 堅昆과 丁零 등의 정벌에 동원되었다. 南北朝․隋朝 시기 사료에 遠紇, 烏護, 韋紇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唐代 回鶻 즉 위구르는 이들의 後身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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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그 인근의 26개 나라를 평정해 모두 흉노[와 한 나라]가 되었소. 여러 유목민[引弓之民]들이 모두 한 집안 식구가 되니 북쪽 지방[北州]주 015
각주 015)
北州 : 원래 좁게 匈奴의 북방에 위치한 渾庾, 屈射, 丁零, 鬲昆, 薪䔣 등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주265) 참조). 문맥의 흐름상 보다 넓은 범위로 해석하여 月氏를 포함한 西域의 정복이 완성되었음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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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미 안정되게 되었소. 원컨대, [이제는] 전쟁을 중지시켜 사졸을 쉬게 하고 말을 먹여 앞서 있었던 [국경분쟁] 문제를 불문에 붙이여 이전의 [화친] 약속을 회복시킴으로써 변경지대 백성들을 편하게 하고, 처음의 관계로주 016
각주 016)
『史記』에는 “始古”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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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추어 어린아이들이 탈 없이 자라게 하고 늙은이들이 그 땅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어주 017
각주 017)
『史記』에는 “得”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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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로 태평함을 즐기도록 해 주고 싶소이다. [그러나] 아직은 [중국] 황제의 의중을 알 수가 없으니 낭중(郎中)주 018
각주 018)
郎中 : 관직 명칭으로 관청의 車, 騎, 門, 戶를 관리하였다. 안으로는 護衛를, 밖으로는 작전을 맡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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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호천(係虖淺) 주 019
각주 019)
係雩淺 : 匈奴의 사람 이름으로 음은 “혜호천”이다. 『史記』에서는 “虖”를 “雩”로 표기했다. 그는 匈奴에 투항하였던 秦나라 사람의 후예로 추정된다. 그의 선조가 郎中이었기 때문에 그에 따라 郎中이라는 관칭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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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사신으로 삼아 이 편지를 받들어 올리게 함과 동시에 낙타(橐佗)주 020
각주 020)
『史記』에는 “橐他”로 되어 있다(주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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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필], 전투용 말[騎馬] 두 [필], 수레 끄는 말[駕] 두 짝[駟]을주 021
각주 021)
“騎馬”는 탈 수 있는 말이고, “駕”는 수레를 끌 수 있는 말이며, “二駟”는 말 여덟 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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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겠소. 황제께서는 흉노[의 군대]가 한나라 변경에 접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귀국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조칙을 내려 멀리 떨어져서 살도록 명령해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오. 사자가 도착하면 돌려보내 주시기 바라오.” 유월 중에 [흉노의 사신이] 신망(新望) 주 022
각주 022)
新望 : 漢나라 경계 위쪽 長城 아래의 땅이다. 『史記』에는 “薪望”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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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땅에 도착하였다. [흉노의] 편지가 [한나라 조정에] 오자 한나라에서는 공격과 화친 중에 어떤 것이 좋은지를 논의하였다. 공경(公卿)들이 모두 말하였다. “선우가 새로 월지를 격파해 승세를 타고 있으니 공격할 수 없습니다. 또한 흉노의 영토를 얻는다고 해도 늪 아니면 소금기 많은 황무지뿐이니 살 만한 곳도 못됩니다. [결국] 화친이 더 낫습니다.” 한나라[의 황제가 화친을] 허락했다.

  • 각주 001)
    濟北王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文帝 前元 3년(전177) 오월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明年”이라고 한 것은 文帝 前元4년(전176)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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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天所立匈奴大單于”라는 칭호는 匈奴의 군주 칭호를 한자로 번역이 ‘天子’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던 “撑犂孤塗”라고도 추정된다(주2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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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史記』에는 “合歡”으로 되어 있는데, 보내온 편지의 뜻이 서로 맞아 기뻐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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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後義盧侯 : 難氏와 연결하여 그의 관칭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匈奴의 인명으로 後義盧侯 또는 後義와 盧侯로 나누어 인명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모두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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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難支 : 匈奴의 인명으로 『史記』에는 “難氏”로 되어 있는데, 支와 氏는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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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史記』에는 “兄弟”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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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讓書”는 질책을 한다는 의미로, 匈奴가 다시 漢나라에서 온 편지를 받고 사신을 통해 편지를 漢나라에 보냈는데, 漢나라가 그 사신을 잡아 가두고 흉노에 다시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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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少吏는 小吏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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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史記』에는 “至”가 “之”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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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冒頓單于가 처벌로 右賢王으로 하여금 月氏를 공격하게 한 것은 文帝 前元 6년(전174)보다 1~2년 정도 앞선 시기로 추정된다(대략 전177~전176년 정도) 이로 인해 月氏가 점차 서남방으로 향하여 이 무렵에 준가르 분지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月氏는 전174~전161년 사이에 烏孫과 연합한 匈奴의 공격을 받아 일리강 유역으로부터 축출되어 아무다리아로 갔다. 이후에 이들은 이곳에서 세력화하여 大月氏를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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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史記』에는 “馬彊力”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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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樓蘭 : 지금의 新疆維吾爾自治區 롭 노르(Lop Nor, 羅布泊) 서북쪽 일대에 위치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이다. 왕은 扜泥城(지금의 婼羌縣)에 살았는데, 동서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어서 크게 번영하였다. 中國이 이곳에 진출하기 이전에 匈奴의 복속을 받았다가 이후에 漢나라와 匈奴 모두와 관계를 유지했다. 漢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鄯善國이라고 고쳐 불렀다. 1세기 말부터 서쪽의 쿠샨 왕조의 진출로 인해 2세기 말에는 이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中國의 분열을 틈타 동서 무역로를 차지하고 크게 번성하였다. 이 왕국은 20세기 초 이 지역을 탐사한 영국의 A. 스타인과 스웨덴의 S. 헤딘 등의 발굴조사에 의해 그 실체가 밝혀졌다. 특히 왕국의 남부에 있었던 니야 유적에서 대량으로 출토된 카로슈티 문서(쿠샨 왕조의 영내에서 사용된 카로슈티 문자로 기록)의 기록에 통해 그 실체가 밝혀졌다. 이후 대규모의 조사발굴로 東西交通路에서 차지하는 樓蘭의 중요성이 한층 부각되기도 했다. 4, 5세기에 河西지방이나 중원에 성립된 여러 왕조에 계속 入貢使를 보내어 冊封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439년 北魏가 河西지방의 凉州에 있던 北凉을 토벌하자 北涼의 잔당이 樓蘭을 공격하였다. 그 뒤 3년 후에 北魏의 군대가 樓蘭을 점령한 이후 그 명맥이 겨우 유지되었지만 왕국의 질서는 붕괴되었다. 그리고 6세기경 인근 세력의 공격과 함께 롭 노르의 이동과 같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수원이 고갈되어 이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漢書』 권96상 「鄯善國傳」 : 3875~3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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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烏孫 : 고대 종족의 명칭이다. 漢代로부터 南北朝時代 초기에 걸쳐 天山山麓의 일리 계곡, 이식 쿨 근처, 시르다리아 상류 등지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 그 인종에 대해서는 사카, 투르크 등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이들의 혼혈종족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원래 河西走廊에서 月氏 등과 함께 거주하면서 그의 지배를 받다가 匈奴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이주하여 일리 계곡과 이식 쿨 주변 등으로 이주하였다. 이로 인해 세력화하게 되면서 동쪽으로는 匈奴, 西北으로는 康居라는 유목민, 서쪽으로는 安息 등과 접하였다. 君長이 거주하는 곳을 ‘赤穀城’이라고 하였는데, 이식 쿨 근처에 있었다. 이들은 張騫의 여행 이후에 漢나라에 알려져 그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匈奴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존재했다(王明哲․王炳華, 1983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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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呼揭 : 음은 ‘호걸’이다. 고대 종족의 명칭으로 몽골의 북서부에 살던 투르크계 부족으로 오구즈(Oghuz)로 비정된다. 기원전 2세기 冒頓單于에게 정복되어 匈奴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呼揭王은 匈奴에 포함된 呼揭 부족의 장이라고 추정된다. 그 뒤 呼漢邪單于와 郅支單于가 匈奴를 동서 양분한 뒤, 呼揭은 전49년에 郅支單于에게 정벌되었다. 그 뒤 堅昆과 丁零 등의 정벌에 동원되었다. 南北朝․隋朝 시기 사료에 遠紇, 烏護, 韋紇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唐代 回鶻 즉 위구르는 이들의 後身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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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北州 : 원래 좁게 匈奴의 북방에 위치한 渾庾, 屈射, 丁零, 鬲昆, 薪䔣 등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주265) 참조). 문맥의 흐름상 보다 넓은 범위로 해석하여 月氏를 포함한 西域의 정복이 완성되었음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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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史記』에는 “始古”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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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史記』에는 “得”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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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郎中 : 관직 명칭으로 관청의 車, 騎, 門, 戶를 관리하였다. 안으로는 護衛를, 밖으로는 작전을 맡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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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係雩淺 : 匈奴의 사람 이름으로 음은 “혜호천”이다. 『史記』에서는 “虖”를 “雩”로 표기했다. 그는 匈奴에 투항하였던 秦나라 사람의 후예로 추정된다. 그의 선조가 郎中이었기 때문에 그에 따라 郎中이라는 관칭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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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史記』에는 “橐他”로 되어 있다(주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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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騎馬”는 탈 수 있는 말이고, “駕”는 수레를 끌 수 있는 말이며, “二駟”는 말 여덟 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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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新望 : 漢나라 경계 위쪽 長城 아래의 땅이다. 『史記』에는 “薪望”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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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난지(難氏), 혜호천(係虖淺)
지명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신망(新望),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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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묵특선우(冒頓單于)가 화친을 구하는 편지를 한나라에 보내자 한나라 황제가 허락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