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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효문제가 관영(灌嬰)에게 우현왕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으나 제북왕(濟北王)의 모반으로 군대를 후퇴시킴

  • 국가
    흉노(匈奴)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자 다시 화친을 했다. [하지만] 그의 3년(전 여름에주 001
각주 001)
『史記』에는 “五月”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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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우현왕이 하남 땅으로 쳐들어와 자리를 잡고 노략질을 하자 이에 문제가 조를 내렸다. “한나라와 흉노는 형제가 되어 변경을 침해하지 않아 흉노에게 [물자를] 보내주는 것이 아주 많다. 지금 우현왕이 그 나라를 벗어나 백성들을 거느리고 하남 땅에 사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이상한 일이다. 오가면서 [변방의] 장성에 들어와 관리와 병사들을 잡아 죽이거나, 말을 몰아주 002
각주 002)
‘敺’는 ‘驅’와 같은 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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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군의 장성을 지키고 있던 오랑캐[蠻夷]주 003
각주 003)
保塞蠻夷 : 漢나라 초기에 포로로 잡힌 주변 종족들로, 漢나라에 소속되어 변방 요새 인근에 거주하면서 변경방비를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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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고향에 살 수 없게 했다. 변경의 관리를 모욕하고 들어와 도둑질을 하여 그 오만주 004
각주 004)
驁는 傲와 같은 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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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무도함이 심한데, [이것은] 약속이 아니다. 변경의 관리와 거기(車騎) 8만을주 005
각주 005)
『史記』에는 8만 5천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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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발해 고노(高奴) 주 006
각주 006)
高奴 : 縣의 명칭으로 지금 陝西省 延安의 동북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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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가게 하고, 승상(丞相)주 007
각주 007)
丞相 : 天子를 보좌하고 정부 전체를 총괄하는 최고의 관직으로서 秩이 萬石이었다. 高祖시기에 한 명의 丞相을 두었다가 11년에는 명칭을 相國으로 바꾸었다. 孝惠帝와 呂后시기에 左右 2명의 丞相을 두었다가 文帝 2년에 다시 한 명의 丞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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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영(灌嬰) 주 008
각주 008)
灌嬰(?~전176) : 睢陽(지금의 河南省 商丘市 남쪽) 사람으로 원래 비단 상인이었다. 그는 劉邦이 沛公이 되었을 때부터 그를 도왔다. 楚나라와 漢나라의 승패를 결정하는 榮陽 전투에서 中大夫로 楚나라를 격파하여 糧道를 끊는 큰 공을 세웠다. 御史大夫가 되어 齊와 淮北을 평정하였다. 高祖 즉위 이후 車騎將軍으로 燕王을 격파하고 漢王 信을 토벌하여 穎陰侯로 봉해졌다. 匈奴 토벌 중에 平城에서 고생하였다. 돌아와 陳豨를 토벌하고 黥布의 반란 역시 진압하였다. 高祖 사후에 列侯로 惠帝와 呂后를 모셨다. 하지만 呂后가 죽은 뒤 ‘周勃, 陳平 등과 함께 呂氏를 몰아내고 代王을 맞아들여 文帝로 추대하였다. 周勃을 이어 승상이 되었는데, 匈奴의 공격을 방어하다가 죽었다(『漢書』 권41 「樊酈滕灌傅靳周傳」 : 2080~2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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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 [그들을] 이끌고 우현왕을 공격하게 해라.” [결국] 우현왕은 장성 밖으로 달아났다. 문제가 태원에 행행하였다. 이 때 제북왕(濟北王)주 009
각주 009)
濟北王 : 東牟侯 劉興居로 高祖의 長庶 齊悼王 劉肥의 아들이었다. 그는 呂氏 세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文帝 前元 2년(전178) 삼월에 濟北王이 되었다. 文帝 前元 3년(전177) 오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해 팔월에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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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 틈을 타] 모반하자 [급히] 문제가 [장안으로] 귀환하면서 승상이 흉노[胡]를 공격하려고 했던 군대를 물렸다.주 010
각주 010)
『史記』에서는 이 문단에서 정리하고 있는 文帝 前元 3년 양국의 대결에 대한 내용을 “匈奴右賢王入居河南地, 侵盜上郡葆塞蠻夷, 殺略人民. 於是孝文帝詔丞相灌嬰發車騎八萬五千, 詣高奴, 擊右賢王. 右賢王走出塞. 文帝幸太原. 是時濟北王反, 文帝歸, 罷丞相擊胡之兵.”으로 정리하였는데, 『漢書』에서는 文帝의 詔勅 등을 보충하여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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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史記』에는 “五月”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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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敺’는 ‘驅’와 같은 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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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保塞蠻夷 : 漢나라 초기에 포로로 잡힌 주변 종족들로, 漢나라에 소속되어 변방 요새 인근에 거주하면서 변경방비를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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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驁는 傲와 같은 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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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史記』에는 8만 5천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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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高奴 : 縣의 명칭으로 지금 陝西省 延安의 동북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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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丞相 : 天子를 보좌하고 정부 전체를 총괄하는 최고의 관직으로서 秩이 萬石이었다. 高祖시기에 한 명의 丞相을 두었다가 11년에는 명칭을 相國으로 바꾸었다. 孝惠帝와 呂后시기에 左右 2명의 丞相을 두었다가 文帝 2년에 다시 한 명의 丞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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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灌嬰(?~전176) : 睢陽(지금의 河南省 商丘市 남쪽) 사람으로 원래 비단 상인이었다. 그는 劉邦이 沛公이 되었을 때부터 그를 도왔다. 楚나라와 漢나라의 승패를 결정하는 榮陽 전투에서 中大夫로 楚나라를 격파하여 糧道를 끊는 큰 공을 세웠다. 御史大夫가 되어 齊와 淮北을 평정하였다. 高祖 즉위 이후 車騎將軍으로 燕王을 격파하고 漢王 信을 토벌하여 穎陰侯로 봉해졌다. 匈奴 토벌 중에 平城에서 고생하였다. 돌아와 陳豨를 토벌하고 黥布의 반란 역시 진압하였다. 高祖 사후에 列侯로 惠帝와 呂后를 모셨다. 하지만 呂后가 죽은 뒤 ‘周勃, 陳平 등과 함께 呂氏를 몰아내고 代王을 맞아들여 文帝로 추대하였다. 周勃을 이어 승상이 되었는데, 匈奴의 공격을 방어하다가 죽었다(『漢書』 권41 「樊酈滕灌傅靳周傳」 : 2080~2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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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濟北王 : 東牟侯 劉興居로 高祖의 長庶 齊悼王 劉肥의 아들이었다. 그는 呂氏 세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文帝 前元 2년(전178) 삼월에 濟北王이 되었다. 文帝 前元 3년(전177) 오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해 팔월에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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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史記』에서는 이 문단에서 정리하고 있는 文帝 前元 3년 양국의 대결에 대한 내용을 “匈奴右賢王入居河南地, 侵盜上郡葆塞蠻夷, 殺略人民. 於是孝文帝詔丞相灌嬰發車騎八萬五千, 詣高奴, 擊右賢王. 右賢王走出塞. 文帝幸太原. 是時濟北王反, 文帝歸, 罷丞相擊胡之兵.”으로 정리하였는데, 『漢書』에서는 文帝의 詔勅 등을 보충하여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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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효문[제](孝文帝), 문제, 관영(灌嬰), 문제, 문제
지명
하남, 한나라, 하남, 상군, 고노(高奴), 장안
오류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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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제가 관영(灌嬰)에게 우현왕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으나 제북왕(濟北王)의 모반으로 군대를 후퇴시킴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