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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군의 명령으로 상관걸(上官桀)이 욱성(郁成)을 공격하였고 대완이 함락된 뒤 호송되던 욱성왕이 참수 됨

  • 국가
    대하(大夏)
처음에 이사장군은 돈황의 서쪽에서 출발했는데, 사람이 많아 연도에 위치한 나라들에서 식량을 공급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휘하의 군대를]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천산의] 남도와 북도를 따라가게 했다. 교위였던 왕신생(王申生) 주 001
각주 001)
‘王申生‘. 이 사건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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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전에 홍로(鴻臚)주 002
각주 002)
鴻臚 : 『周禮』에 나오는 官名. 秦漢初에는 典客으로 칭해지다가 景帝 6年에 大行令으로 개명했으며, 武帝 太初 元年(전104)에 大鴻臚로 改稱하였다. 賓客을 接待하는 사무를 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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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던 호충국(壺充國) 주 003
각주 003)
壺充國 : 『漢書』 卷19下 「百官公卿表」에는 太初 元年(전104)에 大鴻臚로 임명되었으나 그 다음해에 商丘成이라는 인물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기원전 131년에는 司馬相如를 수행하여 南越에 사신으로 다녀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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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천여 명이 [이들 본대와는] 별도로 욱성에 도착했는데, 욱성이 성문을 닫아걸고 그 군대에게 식량을 공급하려 하지 않았다. 왕신생은 본군에서 [불과] 200리 떨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믿고 [욱성을] 가벼이 여겨 욱성을 질책하였다. 욱성은 식량을 주려고 하지 않았고, 왕신생의 군대의 숫자가 날로 적어져 가는 것을 보고는 새벽에 3천 명을 동원하여 공격하고 왕신생 등을 살육하였다. 군대는 패배했고 몇 명이 도망쳐 나와 이사장군에게로 갔다. 이사장군은 수속도위(搜粟都尉)주 004
각주 004)
搜粟都尉 : 『漢書』 卷24上 「食貨志」에 “武帝가 末年에 [흉노를] 征伐했던 것을 후회하여 丞相을 富民侯로 봉하고, ‘바야흐로 지금 힘써야 할 일은 농사에 주력하는 것이다.’라고 下詔하면서 趙過를 搜粟都尉로 삼았다.”는 기록, 卷19下 「百官公卿表」에 天漢 4년(전97)에 大司農 桑弘羊을 搜粟都尉로 강등시켰다는 기록들은 搜粟都尉가 農務와 연관된 사무를 담당했음을 추측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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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걸(上官桀) 주 005
각주 005)
上官桀 : 隴西 上邽(현재의 甘肅 天水市)人. 字는 少叔. 젊은 나이에 羽林期門郞이 되었는데, 武帝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未央廐令으로 발탁되고 후에 侍中과 太僕을 역임했다. 무제 임종시 左將軍·安陽侯에 봉해졌고, 大將軍 霍光과 함께 幼主를 輔佐하도록 위탁받았다. 昭帝가 즉위한 뒤 자기 아들 安의 딸을 皇后로 세웠으며, 安은 驃騎將軍이 되고 桑樂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후일 上官桀 父子가 霍光과 대립하게 되었고, 霍光을 주살하고 昭帝를 폐위시키려는 모의가 발각되어 元風 원년(전80) 일족이 참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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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가서 욱성을 공파하라고 명령했다. 욱성의 왕이 강거로 도망쳤고 은 강거까지 추격했다. [이때] 한나라가 이미 대완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강거가 듣고 비로소 욱성의 왕을 내보내 에게 주었다. 은 4명의 기사(騎士)에게 그를 묶어서 대장군주 006
각주 006)
大將軍 : 『集解』는 如淳을 인용하여 “당시 다른 將軍들이 많았으므로 貳師를 大將軍이라 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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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호송해 가라고 명령했다. 이 네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욱성의 왕은 한나라에게 해독이 되는 인물인데 이제 살려서 데리고 가면 결국은 큰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죽이고자 하였지만 누구도 감히 먼저 나서서 치지 못했다. 상규(上邽) 주 007
각주 007)
上邽 : 漢代 隴西郡 上邽縣으로 현재의 甘肅 天水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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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사인 조제(趙弟)가 가장 어렸는데, 그가 검을 뽑아 그를 치니 욱성의 왕을 참수하고 그 머리를 가져왔다. 조제상관걸 등은 대장군이 있는 곳까지 따라잡았다.

  • 각주 001)
    ‘王申生‘. 이 사건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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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鴻臚 : 『周禮』에 나오는 官名. 秦漢初에는 典客으로 칭해지다가 景帝 6年에 大行令으로 개명했으며, 武帝 太初 元年(전104)에 大鴻臚로 改稱하였다. 賓客을 接待하는 사무를 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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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壺充國 : 『漢書』 卷19下 「百官公卿表」에는 太初 元年(전104)에 大鴻臚로 임명되었으나 그 다음해에 商丘成이라는 인물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기원전 131년에는 司馬相如를 수행하여 南越에 사신으로 다녀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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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搜粟都尉 : 『漢書』 卷24上 「食貨志」에 “武帝가 末年에 [흉노를] 征伐했던 것을 후회하여 丞相을 富民侯로 봉하고, ‘바야흐로 지금 힘써야 할 일은 농사에 주력하는 것이다.’라고 下詔하면서 趙過를 搜粟都尉로 삼았다.”는 기록, 卷19下 「百官公卿表」에 天漢 4년(전97)에 大司農 桑弘羊을 搜粟都尉로 강등시켰다는 기록들은 搜粟都尉가 農務와 연관된 사무를 담당했음을 추측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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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上官桀 : 隴西 上邽(현재의 甘肅 天水市)人. 字는 少叔. 젊은 나이에 羽林期門郞이 되었는데, 武帝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未央廐令으로 발탁되고 후에 侍中과 太僕을 역임했다. 무제 임종시 左將軍·安陽侯에 봉해졌고, 大將軍 霍光과 함께 幼主를 輔佐하도록 위탁받았다. 昭帝가 즉위한 뒤 자기 아들 安의 딸을 皇后로 세웠으며, 安은 驃騎將軍이 되고 桑樂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후일 上官桀 父子가 霍光과 대립하게 되었고, 霍光을 주살하고 昭帝를 폐위시키려는 모의가 발각되어 元風 원년(전80) 일족이 참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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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大將軍 : 『集解』는 如淳을 인용하여 “당시 다른 將軍들이 많았으므로 貳師를 大將軍이라 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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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上邽 : 漢代 隴西郡 上邽縣으로 현재의 甘肅 天水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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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왕신생(王申生), 호충국(壺充國), 왕신생, 왕신생, 왕신생, 상관걸(上官桀), , , , 조제(趙弟), 조제, 상관걸
지명
돈황, 욱성, 욱성, 욱성, 욱성, 욱성, 욱성, 욱성, 한나라, 대완, 욱성, 욱성, 한나라, 상규(上邽), 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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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군의 명령으로 상관걸(上官桀)이 욱성(郁成)을 공격하였고 대완이 함락된 뒤 호송되던 욱성왕이 참수 됨 자료번호 : jo.k_0001_0123_0080_0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