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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이 순수(巡狩)하면서 한나라의 부유함을 알렸으며 (이때) 씨름과 기이한 놀이가 늘어나면서 유행하게 됨

  • 국가
    대하(大夏)
이때 황상께서 마침 여러 차례 해변지역을 순수(巡狩)주 001
각주 001)
巡狩 : 天子가 天下를 순회하면서 民情을 시찰하는 행위를 일컬으며 ‘巡守’라고도 표기한다. 『書經』의 舜典에 의하면 舜은 5년에 1회 巡狩하되, 東南西北의 順으로 순회하며, 사방의 諸侯들을 집합시켜 朝見케 했다고 한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巡狩는 秦始皇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전220)한 다음해에 隴西·北地를 巡狩한 것을 필두로, 매년 각 지방을 돌아다녔고, 특히 東方을 순수할 때에는 각지의 名山에 올라가 山川에 제사를 지내고 刻石을 남겨서 秦의 德을 표방하였다. 이것은 새롭게 정복된 東方諸國의 백성들에게 秦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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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셨는데, 언제나 외국의 빈객들이 그를 따라갔다. 큰 도회와 많은 주민이 있는 곳을 지나갈 때면 재물과 비단을 상으로 하사해 주고, 후하게 대접하고 풍부하게 공급해 줌으로써, 한나라의 부유하고 넉넉함을 보여 주었다. 이에 큰 씨름주 002
각주 002)
觳抵 : ‘角抵’라고도 표기. 궁중에서 매년 씨름시합이 열렸는데, 기원전 44년에 폐지되었다. 『史記』 卷87 「李斯列傳」에서 『集解』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첨가하였다. “應劭가 말하기를 ‘戰國시대에 講武의 儀禮를 조금씩 진작시켰기 때문에, [觳抵를] 戲樂으로 삼아 상호 과시하는 데에 활용했는데, 秦은 그 이름을 角抵로 바꾸었다. ‘角’이란 角材를 말하고, ‘抵’란 서로 抵觸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文穎이 말하기를 ‘秦나라는 이 戲樂을 角抵라고 이름했는데, 서로 상대하면서 힘을 겨루고[角力] 伎蓺·射御를 겨루는 것이니, 이런 까닭에 角抵라고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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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합]이 열리고 진기한 놀이와 여러 기이한 물건들이 나왔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관람하였다. [천자께서는] 주지육림(酒池肉林)주 003
각주 003)
酒池肉林 : 殷의 末王인 紂가 극도로 無法 放蕩하고 奢侈하여 거대한 재화를 들여서 高 千尺, 廣 三里의 鹿台를 건설했을 뿐 아니라 화려한 宮室을 짓도록 하였다. 그리고 연못에 술을 가득 채우고 나무에는 고기를 걸어 놓아 그것을 먹고 마시며 즐겼고, 동시에 나체의 남녀가 서로 쫓으면서 유희를 벌이게 한 荒淫한 행동을 했다는 『史記』 「殷本紀」의 故事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 같은 구절을 사용한 것은 외국 사신에게 지나친 향응을 베푸는 것에 대한 司馬遷의 비판적인 입장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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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될 정도로 상을 내리시고, 외국의 빈객들로 하여금 이름높은 창고주 004
각주 004)
『史記』와 『漢書』의 판본에 따라 ‘名’ 혹은 ‘各’으로 표기되었지만, 여기서는 보다 오래 된 판본에 따라 ‘名’을 취했다. 일반적으로 창고를 가리킬 때는 邸閣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에, 여기서 ‘倉庫府藏’이란 땅을 깊이 파고 그 안에 각종 물자를 저장해 두던 곳이 아닐까 추정된다(Hulsewé 1979 : 224 ~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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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쌓인 물건들을 두루 살펴보고 한나라의 광대함을 보고 깜짝 놀라게 하였다. 또한 그 마술사들의 재주가 더 늘어나고, 씨름과 기이한 놀이도 해마다 늘어나고 변화하였으니, 그것이 점점 더 유행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 각주 001)
    巡狩 : 天子가 天下를 순회하면서 民情을 시찰하는 행위를 일컬으며 ‘巡守’라고도 표기한다. 『書經』의 舜典에 의하면 舜은 5년에 1회 巡狩하되, 東南西北의 順으로 순회하며, 사방의 諸侯들을 집합시켜 朝見케 했다고 한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巡狩는 秦始皇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전220)한 다음해에 隴西·北地를 巡狩한 것을 필두로, 매년 각 지방을 돌아다녔고, 특히 東方을 순수할 때에는 각지의 名山에 올라가 山川에 제사를 지내고 刻石을 남겨서 秦의 德을 표방하였다. 이것은 새롭게 정복된 東方諸國의 백성들에게 秦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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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觳抵 : ‘角抵’라고도 표기. 궁중에서 매년 씨름시합이 열렸는데, 기원전 44년에 폐지되었다. 『史記』 卷87 「李斯列傳」에서 『集解』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첨가하였다. “應劭가 말하기를 ‘戰國시대에 講武의 儀禮를 조금씩 진작시켰기 때문에, [觳抵를] 戲樂으로 삼아 상호 과시하는 데에 활용했는데, 秦은 그 이름을 角抵로 바꾸었다. ‘角’이란 角材를 말하고, ‘抵’란 서로 抵觸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文穎이 말하기를 ‘秦나라는 이 戲樂을 角抵라고 이름했는데, 서로 상대하면서 힘을 겨루고[角力] 伎蓺·射御를 겨루는 것이니, 이런 까닭에 角抵라고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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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酒池肉林 : 殷의 末王인 紂가 극도로 無法 放蕩하고 奢侈하여 거대한 재화를 들여서 高 千尺, 廣 三里의 鹿台를 건설했을 뿐 아니라 화려한 宮室을 짓도록 하였다. 그리고 연못에 술을 가득 채우고 나무에는 고기를 걸어 놓아 그것을 먹고 마시며 즐겼고, 동시에 나체의 남녀가 서로 쫓으면서 유희를 벌이게 한 荒淫한 행동을 했다는 『史記』 「殷本紀」의 故事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 같은 구절을 사용한 것은 외국 사신에게 지나친 향응을 베푸는 것에 대한 司馬遷의 비판적인 입장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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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史記』와 『漢書』의 판본에 따라 ‘名’ 혹은 ‘各’으로 표기되었지만, 여기서는 보다 오래 된 판본에 따라 ‘名’을 취했다. 일반적으로 창고를 가리킬 때는 邸閣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에, 여기서 ‘倉庫府藏’이란 땅을 깊이 파고 그 안에 각종 물자를 저장해 두던 곳이 아닐까 추정된다(Hulsewé 1979 : 224 ~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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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이 순수(巡狩)하면서 한나라의 부유함을 알렸으며 (이때) 씨름과 기이한 놀이가 늘어나면서 유행하게 됨 자료번호 : jo.k_0001_0123_0080_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