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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장건이 오손과 형제맹약(연맹)을 맺으면 대하(大夏) 등도 신(臣)으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하자 천자가 옳게 여기며 장건을 중낭장에 배수함

  • 국가
    대하(大夏)
그 이후로 천자께서는 여러 차례 장건에게 대하와 같은 나라에 대해서 물으셨다. 장건은 이미 후작[侯]을 상실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주 001
각주 001)
騫既失侯, 因言曰 : 이 두 구절의 인과관계는 사실상 모호하다. 그가 博望侯의 지위를 상실한 것과 위의 내용을 황제께 아뢴 것은 무관해 보이며, ‘騫既失侯’ 다음에 누락된 부분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Hulsewé 1979 :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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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臣)이 흉노 가운데 머물 때 곤막(昆莫)주 002
각주 002)
昆莫(kuɘn-muo) : 『漢書』 「西域傳」에는 “昆莫은 王號이고, 이름은 獵驕靡이다. 後書에는 ‘昆靡’라고 되어 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昆靡의 古音은 kuɘn-mjie. 昆莫·昆靡 모두 烏孫國의 王號였다. 토하라어에서 ‘태양’을 뜻하는 kün과 연관지어서 이해하려는 주장(王明哲·王炳華 1983 : 76 ~ 77)이 있으나 설득력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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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불리우는 오손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곤막의 부친은 흉노의 서쪽 변경에서 소국(小國)[의 군장]이었습니다. 흉노가 그 부친을 공격하여 죽였는데,주 003
각주 003)
匈奴攻殺其父 : 『漢書』에는 昆莫의 아버지의 이름이 難兜靡(nân-təu-mjie)이고, 烏孫의 原住地가 敦煌과 祁連 사이, 즉 河西回廊이었으며, 오손을 공격한 세력도 흉노가 아니라 大月氏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難兜靡를 살해한 장본인이 누구냐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도 갈라져 있는 상황이다. 이 문제는 『史記』 「大宛列傳」과 『漢書』 「張騫·李廣利傳』의 상호관계와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섣불리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Hulsewé 1979 : 214 ~ 215 ; 孟凡人 1985 : 1 ~ 18 ; 王炳華 1993 : 255 ~ 26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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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곤막이 태어나 들에 버려졌습니다. 까마귀가 고기를 물고 그 위를 날아다녔고주 004
각주 004)
烏嗛肉 : 『索隱』은 “嗛의 音은 ‘銜’이다. 蜚도 역시 飛字와 같다.”고 설명했다. ‘烏孫’이라는 명칭은 물론 현지인의 명칭을 한자로 옮긴 것이겠지만, 위의 설화와 연관시켜 “까마귀의 자손”이라는 의미가 전달되도록 音寫한 것으로 추정된다. Daffinà(1982 : 327 ~ 328)는 이것이 상당히 개연성이 있는 설명이라고 보면서, 그럴 경우 ‘烏孫’이라는 이름은 匈奴人들에 의해 지어진 것일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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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가 가서 그에게 젖을 먹였습니다. 선우가 기이하게 생각하고 신령스럽다고 여겨서 그를 거두어서 키웠습니다. 그가 장성하자 군대를 지휘케 하였고 여러 차례 공을 세우자, 선우는 그 부친의 백성을 다시 곤막에게 주고 서역에서 오랫동안 수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곤막은 그 백성을 거두어 길러서 주변의 소읍들을 공격했고, 활을 당길 만한 사람 수만 명에게 전투하는 법을 익히도록 했습니다.주 005
각주 005)
『漢書』 「張騫·李廣利傳」에는 “그때 月氏는 이미 匈奴에게 격파되었고 서쪽으로 塞王을 공격하였다. 塞王이 南走하여 멀리 이주하니 月氏가 그 땅에 거주하였다. 昆莫이 장성한 뒤 單于에게 父怨을 갚게 해 달라고 청하였고, 마침내 서쪽으로 大月氏를 공파하였다. 大月氏는 다시 西走하여 大夏의 땅으로 이주하였고, 昆莫은 그 무리를 빼앗고 그곳에 머물렀다. 군대가 점차 강해져서 單于가 사망하게 되자 다시 匈奴에 入朝하지 않으려 하였다.”라고 되어 있어 『史記』 「大宛列傳」과는 내용을 달리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지적했듯이 『漢書』을 믿는다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것이다. 즉, 처음에 月氏가 烏孫을 격파하여 昆莫, 즉 어린 太子가 흉노에 망명하였고, 후일 月氏가 匈奴의 공격을 받아 西遷하여 塞(Saka)을 공격하자 塞은 南走했고 月氏가 그 땅을 차지했다. 그런데 昆莫이 장성하여 匈奴의 지원을 받아 大月氏를 공격했고, 이에 大月氏는 西走하여 大夏의 땅으로 이주하고 烏孫이 대신 그 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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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가 죽자 곤막은 이에 그 무리를 이끌고 멀리 옮겨 가서, 중립(中立)을 유지한 채 흉노에 조회(朝會)하러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흉노가 기습병[奇兵]을 보내어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곤막을] 신령스럽게 여기고 멀리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흉노는] 그를 신속(羈屬)시키기만 할 뿐 크게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선우가 한나라로 인하여 새로이 곤경에 처하게 되고, 예전 혼야왕의 땅도 텅 비어 아무도 없습니다. 만이(蠻夷)의 풍속은 한나라의 재물을 탐하는 것이니, 지금이야말로 [이를 활용할] 시기입니다.주 006
각주 006)
『漢書』에는 “지금 單于가 새롭게 漢에게 곤란을 당하여 昆莫의 땅이 비게 되었다. 蠻夷가 故地를 戀慕하여……”라는 내용이 보인다. 즉, 烏孫의 原住地가 河西回廊이었고, 흉노 渾邪王의 투항으로 그 곳에서 흉노의 세력이 一掃되었기 때문에 “昆莫의 땅이 비게 되었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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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에게 많은 물자를 주어서 동쪽으로 초치하여 옛 혼야왕의 땅에 거주케 하고 한나라와 형제맹약을 맺자고 한다면, 이 같은 상황으로 보아 [오손은] 마땅히 청종할 것이고, 그가 청종한다면 이는 흉노의 오른팔[右臂]을 끊는 셈이 됩니다. 이렇게 오손과 연맹한다면 그 서쪽에 있는 대하 등의 무리도 모두 초치하여 외신(外臣)으로 삼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천자께서는 이를 옳다고 하면서 장건을 중랑장(中郞將)주 007
각주 007)
中郞將 : 秦代에 두어졌고 漢이 沿置한 관직명으로, 宮禁宿衛를 관장하고 御駕를 隨行하며, 郞中令(光祿勳)을 보좌하여 郞官을 선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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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배수하였다. 그에게 300명을 지휘케 하고 그 각각에게 말 2필을 주었으며, 또한 우양(牛羊) 약 만 마리, 막대한 값어치의 금과 비단을 주었다. 절(節)을 지참한 부사(副使)들 여러 명을 도로 사정이 허락하는 한 다른 이웃 나라로 파견토록 하였다.

  • 각주 001)
    騫既失侯, 因言曰 : 이 두 구절의 인과관계는 사실상 모호하다. 그가 博望侯의 지위를 상실한 것과 위의 내용을 황제께 아뢴 것은 무관해 보이며, ‘騫既失侯’ 다음에 누락된 부분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Hulsewé 1979 :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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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昆莫(kuɘn-muo) : 『漢書』 「西域傳」에는 “昆莫은 王號이고, 이름은 獵驕靡이다. 後書에는 ‘昆靡’라고 되어 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昆靡의 古音은 kuɘn-mjie. 昆莫·昆靡 모두 烏孫國의 王號였다. 토하라어에서 ‘태양’을 뜻하는 kün과 연관지어서 이해하려는 주장(王明哲·王炳華 1983 : 76 ~ 77)이 있으나 설득력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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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匈奴攻殺其父 : 『漢書』에는 昆莫의 아버지의 이름이 難兜靡(nân-təu-mjie)이고, 烏孫의 原住地가 敦煌과 祁連 사이, 즉 河西回廊이었으며, 오손을 공격한 세력도 흉노가 아니라 大月氏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難兜靡를 살해한 장본인이 누구냐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도 갈라져 있는 상황이다. 이 문제는 『史記』 「大宛列傳」과 『漢書』 「張騫·李廣利傳』의 상호관계와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섣불리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Hulsewé 1979 : 214 ~ 215 ; 孟凡人 1985 : 1 ~ 18 ; 王炳華 1993 : 255 ~ 26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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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烏嗛肉 : 『索隱』은 “嗛의 音은 ‘銜’이다. 蜚도 역시 飛字와 같다.”고 설명했다. ‘烏孫’이라는 명칭은 물론 현지인의 명칭을 한자로 옮긴 것이겠지만, 위의 설화와 연관시켜 “까마귀의 자손”이라는 의미가 전달되도록 音寫한 것으로 추정된다. Daffinà(1982 : 327 ~ 328)는 이것이 상당히 개연성이 있는 설명이라고 보면서, 그럴 경우 ‘烏孫’이라는 이름은 匈奴人들에 의해 지어진 것일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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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漢書』 「張騫·李廣利傳」에는 “그때 月氏는 이미 匈奴에게 격파되었고 서쪽으로 塞王을 공격하였다. 塞王이 南走하여 멀리 이주하니 月氏가 그 땅에 거주하였다. 昆莫이 장성한 뒤 單于에게 父怨을 갚게 해 달라고 청하였고, 마침내 서쪽으로 大月氏를 공파하였다. 大月氏는 다시 西走하여 大夏의 땅으로 이주하였고, 昆莫은 그 무리를 빼앗고 그곳에 머물렀다. 군대가 점차 강해져서 單于가 사망하게 되자 다시 匈奴에 入朝하지 않으려 하였다.”라고 되어 있어 『史記』 「大宛列傳」과는 내용을 달리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지적했듯이 『漢書』을 믿는다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것이다. 즉, 처음에 月氏가 烏孫을 격파하여 昆莫, 즉 어린 太子가 흉노에 망명하였고, 후일 月氏가 匈奴의 공격을 받아 西遷하여 塞(Saka)을 공격하자 塞은 南走했고 月氏가 그 땅을 차지했다. 그런데 昆莫이 장성하여 匈奴의 지원을 받아 大月氏를 공격했고, 이에 大月氏는 西走하여 大夏의 땅으로 이주하고 烏孫이 대신 그 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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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漢書』에는 “지금 單于가 새롭게 漢에게 곤란을 당하여 昆莫의 땅이 비게 되었다. 蠻夷가 故地를 戀慕하여……”라는 내용이 보인다. 즉, 烏孫의 原住地가 河西回廊이었고, 흉노 渾邪王의 투항으로 그 곳에서 흉노의 세력이 一掃되었기 때문에 “昆莫의 땅이 비게 되었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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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中郞將 : 秦代에 두어졌고 漢이 沿置한 관직명으로, 宮禁宿衛를 관장하고 御駕를 隨行하며, 郞中令(光祿勳)을 보좌하여 郞官을 선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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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장건, 장건, 장건
지명
대하,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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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이 오손과 형제맹약(연맹)을 맺으면 대하(大夏) 등도 신(臣)으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하자 천자가 옳게 여기며 장건을 중낭장에 배수함 자료번호 : jo.k_0001_0123_008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