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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기장군(곽거병)이 흉노 서역의 군대를 격파하고 혼야왕이 한나라에 투항하면서 이후 한나라가 흉노를 사막의 북쪽까지 쫒아냄

  • 국가
    대하(大夏)
장건은 교위(校尉)주 001
각주 001)
校尉 : 秦漢代에 군대를 통솔하는 武官으로, 將軍보다 낮고 都尉보다 높은 직책으로 秩二千石이었다. 출정시에 임시로 임명되며, 一 校(營)兵을 지휘하고, 司馬·候 등의 屬官을 거느렸다. 輕騎校尉·戊己校尉 등의 예와 같이 앞에 다른 명칭이 붙여졌는데, 그 구체적인 직무에 따라 선행하는 名稱이 붙여졌다. 烏桓校尉·護羌校尉처럼 이민족을 통어하는 校尉도 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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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신분으로 대장군(大將軍)주 002
각주 002)
大將軍 : 여기서는 衛靑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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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라 흉노를 공격했는데, 수초(水草)가 있는 곳을 알아서 군대가 그 부족함이 없게 되었으므로, 이에 장건을 봉하여 박망후(博望侯) 주 003
각주 003)
博望侯 : ‘넓고 멀리 바라보다.’는 뜻에서 붙여진 封號. 그러나 南陽에 博望縣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索隱』은 “張騫의 封號일 뿐 地名이 아니다. 또한 小顏도 ‘그가 능히 넓고 멀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武帝도 博望苑을 두었으니 이 역시 그 뜻에서 취한 이름이다.”라고 했으며, 『正義』는 “地理志에 南陽 博望縣이 있다.”는 기록을 첨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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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삼았으니 그 해는 원삭(元朔) 6년(전123)이었다. 그 다음해주 004
각주 004)
其明年 : 기원전 122년. 『漢書』 「張騫·李廣利傳」에는 ‘後二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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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은 위위(衛尉)주 005
각주 005)
衛尉 : 戰國·秦代에 설치된 官名으로 宮廷의 警備를 담당하였다. 漢代에 沿置되었으며 秩中二千石이고 九卿의 반열에 들었다. 景帝 때 中大夫令으로 改名했으나 後元 元年(전143)에 복원되었다. 황제의 거처인 未央宮의 禁衛를 담당하며 宮門에 屯駐하는 衛士들을 관할하고, 晝夜로 순찰하면서 출입하는 자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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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어 이장군(李將軍)주 006
각주 006)
李將軍 : 李廣(? ~ 전119).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에 立傳된 인물이다. 隴西 成紀(현재의 甘肅 安北)人. 文帝 때 匈奴戰에 종군하여 郞이 되었고, 활을 잘 쏘아 文帝를 따라 사냥에 자주 나갔다. 景帝가 즉위하자 騎郞將이 되고, 吳·楚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軍功을 세워, 후일 上谷·上郡·隴西·北地·雁門·雲中 등 北邊의 郡太守를 역임하며 여러 차례 흉노와 전투를 벌였다. 武帝 때에 未央衛尉가 되었고, 元光 6년(전129)에는 驍騎將軍이 되어 雁門을 나서서 匈奴를 공격했으나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胡馬를 탈취하여 귀환하여, 斬刑은 면하고 庶人으로 강등되었다. 후일 右北平 太守가 되었고, 元朔 6년(전123)에는 郞中令의 지위로서 將軍이 되었다. 元狩 4년(전119) 大將軍 衛靑을 따라 匈奴원정에 나섰으나 길을 잃고 기약한 날짜를 어기자 自殺하고 말았다. 평소 원정할 때에는 部曲이 없이 行陣했으며, 夜營할 때에도 刁斗를 두드리지 않아 병사들을 편히 쉬게 하였고, 賞賜가 있으면 부하들에게 곧바로 나누어 주어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고 한다. 흉노와도 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그 명성이 매우 높았으나 끝내 封侯를 받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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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함께 우북평(右北平) 주 007
각주 007)
右北平 : 현재의 天津 薊縣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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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나서 흉노를 공격하였다. 흉노가 이장군을 포위하여 군인들 가운데 망실(亡失)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장건은 기일에 늦어 마땅히 참형을 받아야 했으나 속전(贖錢)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그 해에 한나라는 표기장군(驃騎將軍)주 008
각주 008)
驃騎將軍 : 霍去病(? ~ 전117).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 『漢書』 卷55 「衛靑·霍去病傳」에 立傳된 인물이다. 河東 平陽(현재의 山西 臨汾 西南)人. 어려서 말이 적었으나 과감하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한다. 처음에 侍中이 되었다가 驃騎校尉의 신분으로 大將軍 衛靑을 따라 흉노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고 冠軍侯에 봉해졌다. 그 후 여러 차례 出塞하여 많은 적군을 斬獲하였다. 元狩 2년(전121) 驃騎將軍이 되어 隴西를 나서서 焉支山을 지나 匈奴休屠王의 祭天金人을 획득하고, 같은 해에 北地를 나서서 居延을 지나자 渾邪王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4년(전119)에 霍去病은 代郡을 나서고 衛靑은 定襄을 나서서 兩軍이 漠北을 원정했는데, 翰海(바이칼 호수)까지 갔다가 귀환했다. 大司馬로 加封되었고, 秩祿은 大將軍 衛靑에 견줄 정도였다. 현재의 陝西省 興平에 있는 漢武帝의 茂陵 옆에 霍去病의 墓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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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서 흉노 서역주 009
각주 009)
匈奴西域 : 『漢書』 「張騫·李廣利傳」에는 ‘匈奴西邊’. 흉노의 渾邪王은 ‘匈奴西域王’이라 칭해지기도 했다. ‘西域’이라는 개념이 중앙아시아를 지칭하는 정치·지리적 용어로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서쪽 지역’을 뜻하던 단계의 용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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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군대 수만 명을 격파하고 기련산(祁連山)에 이르렀다.주 010
각주 010)
祁連山 : 『史記』 卷110 「匈奴列傳」에는 다음과 같은 『正義』의 주석이 첨가되어 있다. “焉의 音은 ‘烟’이다. 『括地志』에 ‘焉支山은 일명 刪丹山이며 甘州 刪丹縣 東南 50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西河故事』에는 ‘匈奴가 祁連·﹑焉支 두 산을 잃고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亡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 失我焉支山, 使我婦女無顏色(나의 祁連山을 잃었으니 나의 가축들이 번식하지 못하게 되었구나! 나의 焉支山을 잃었으니 나의 婦女들이 顏色을 잃게 되었구나!)」. 그들의 섭섭함이 이와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焉支山은 ‘燕支山’이라고 표기되기도 하며, 『穆天子傳』의 ‘焉居’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흉노인들이 祁連과 焉支를 구별한 것으로 보아 이것은 두 개의 다른 산줄기로 추정된다. 焉支山은 현재 甘肅 永昌의 서쪽, 즉 山丹 동남쪽에 있는 산이 아니라, 新疆의 바르쿨(巴里坤) 동쪽, 즉 천산산맥 東端의 高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哈爾里克(Qaraliq)山이라고 불리우며 이 명칭은 투르크어로 ‘黑山’을 뜻한다. 그런데 토하라어에서도 黑色은 arkent(A방언) 혹은 erkent(B방언)이라고 불리우는데, 焉支·焉居는 이것을 音寫한 말이다(林梅村 1998 : 74 참조). 그렇다면 焉耆라는 도시도 토하라어에서 ‘黑色’을 뜻하는 arkent/erkent에서 기원한 명칭임이 분명하며, 후일 투르크인들이 그곳을 점유한 뒤 Qarashahr(‘黑城’이라는 뜻)로 불리우게 된 것도 그 의미가 습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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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해주 011
각주 011)
其明年 : 『漢書』 「張騫·李廣利傳」에는 ‘其秋’. 元狩 2년(전121)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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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혼야왕(渾邪王)주 012
각주 012)
渾邪((γuən-ia)王 : 渾耶王·昆邪王 등으로도 표기되었으며, 休屠王과 함께 감숙 河西回廊지역에 유목하던 흉노인들의 수령이었다. 元狩 2년(전121) 休屠王이 한나라 군대에 누차 패배한 것에 대해 單于가 격노하여 誅殺하려고 하자, 渾邪·休屠 二王은 한에 투항하기로 공모했다. 그러나 휴도왕이 이를 후회하자 혼야왕이 그를 살해하고 4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투항을 결행했다. 한나라는 그를 漯陰侯로 봉하고, 그 땅에 張掖郡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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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 백성들을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니, 금성(金城) 주 013
각주 013)
金城 : 현재의 감숙성 蘭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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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河西)의 서쪽, 그리고 남산(南山) 주 014
각주 014)
南山 : 祁連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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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염택에 이르기까지 흉노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때로 흉노가 척후를 보내어 오기도 했지만 그것도 드물었다. 그 후 2년 뒤주 015
각주 015)
元狩 4년, 즉 기원전 1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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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는 선우를 공격하여 사막의 북쪽[幕北]으로 쫓아 버렸다.

  • 각주 001)
    校尉 : 秦漢代에 군대를 통솔하는 武官으로, 將軍보다 낮고 都尉보다 높은 직책으로 秩二千石이었다. 출정시에 임시로 임명되며, 一 校(營)兵을 지휘하고, 司馬·候 등의 屬官을 거느렸다. 輕騎校尉·戊己校尉 등의 예와 같이 앞에 다른 명칭이 붙여졌는데, 그 구체적인 직무에 따라 선행하는 名稱이 붙여졌다. 烏桓校尉·護羌校尉처럼 이민족을 통어하는 校尉도 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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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大將軍 : 여기서는 衛靑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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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博望侯 : ‘넓고 멀리 바라보다.’는 뜻에서 붙여진 封號. 그러나 南陽에 博望縣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索隱』은 “張騫의 封號일 뿐 地名이 아니다. 또한 小顏도 ‘그가 능히 넓고 멀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武帝도 博望苑을 두었으니 이 역시 그 뜻에서 취한 이름이다.”라고 했으며, 『正義』는 “地理志에 南陽 博望縣이 있다.”는 기록을 첨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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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其明年 : 기원전 122년. 『漢書』 「張騫·李廣利傳」에는 ‘後二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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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衛尉 : 戰國·秦代에 설치된 官名으로 宮廷의 警備를 담당하였다. 漢代에 沿置되었으며 秩中二千石이고 九卿의 반열에 들었다. 景帝 때 中大夫令으로 改名했으나 後元 元年(전143)에 복원되었다. 황제의 거처인 未央宮의 禁衛를 담당하며 宮門에 屯駐하는 衛士들을 관할하고, 晝夜로 순찰하면서 출입하는 자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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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李將軍 : 李廣(? ~ 전119).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에 立傳된 인물이다. 隴西 成紀(현재의 甘肅 安北)人. 文帝 때 匈奴戰에 종군하여 郞이 되었고, 활을 잘 쏘아 文帝를 따라 사냥에 자주 나갔다. 景帝가 즉위하자 騎郞將이 되고, 吳·楚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軍功을 세워, 후일 上谷·上郡·隴西·北地·雁門·雲中 등 北邊의 郡太守를 역임하며 여러 차례 흉노와 전투를 벌였다. 武帝 때에 未央衛尉가 되었고, 元光 6년(전129)에는 驍騎將軍이 되어 雁門을 나서서 匈奴를 공격했으나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胡馬를 탈취하여 귀환하여, 斬刑은 면하고 庶人으로 강등되었다. 후일 右北平 太守가 되었고, 元朔 6년(전123)에는 郞中令의 지위로서 將軍이 되었다. 元狩 4년(전119) 大將軍 衛靑을 따라 匈奴원정에 나섰으나 길을 잃고 기약한 날짜를 어기자 自殺하고 말았다. 평소 원정할 때에는 部曲이 없이 行陣했으며, 夜營할 때에도 刁斗를 두드리지 않아 병사들을 편히 쉬게 하였고, 賞賜가 있으면 부하들에게 곧바로 나누어 주어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고 한다. 흉노와도 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그 명성이 매우 높았으나 끝내 封侯를 받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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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右北平 : 현재의 天津 薊縣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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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驃騎將軍 : 霍去病(? ~ 전117).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 『漢書』 卷55 「衛靑·霍去病傳」에 立傳된 인물이다. 河東 平陽(현재의 山西 臨汾 西南)人. 어려서 말이 적었으나 과감하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한다. 처음에 侍中이 되었다가 驃騎校尉의 신분으로 大將軍 衛靑을 따라 흉노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고 冠軍侯에 봉해졌다. 그 후 여러 차례 出塞하여 많은 적군을 斬獲하였다. 元狩 2년(전121) 驃騎將軍이 되어 隴西를 나서서 焉支山을 지나 匈奴休屠王의 祭天金人을 획득하고, 같은 해에 北地를 나서서 居延을 지나자 渾邪王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4년(전119)에 霍去病은 代郡을 나서고 衛靑은 定襄을 나서서 兩軍이 漠北을 원정했는데, 翰海(바이칼 호수)까지 갔다가 귀환했다. 大司馬로 加封되었고, 秩祿은 大將軍 衛靑에 견줄 정도였다. 현재의 陝西省 興平에 있는 漢武帝의 茂陵 옆에 霍去病의 墓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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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匈奴西域 : 『漢書』 「張騫·李廣利傳」에는 ‘匈奴西邊’. 흉노의 渾邪王은 ‘匈奴西域王’이라 칭해지기도 했다. ‘西域’이라는 개념이 중앙아시아를 지칭하는 정치·지리적 용어로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서쪽 지역’을 뜻하던 단계의 용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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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祁連山 : 『史記』 卷110 「匈奴列傳」에는 다음과 같은 『正義』의 주석이 첨가되어 있다. “焉의 音은 ‘烟’이다. 『括地志』에 ‘焉支山은 일명 刪丹山이며 甘州 刪丹縣 東南 50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西河故事』에는 ‘匈奴가 祁連·﹑焉支 두 산을 잃고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亡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 失我焉支山, 使我婦女無顏色(나의 祁連山을 잃었으니 나의 가축들이 번식하지 못하게 되었구나! 나의 焉支山을 잃었으니 나의 婦女들이 顏色을 잃게 되었구나!)」. 그들의 섭섭함이 이와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焉支山은 ‘燕支山’이라고 표기되기도 하며, 『穆天子傳』의 ‘焉居’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흉노인들이 祁連과 焉支를 구별한 것으로 보아 이것은 두 개의 다른 산줄기로 추정된다. 焉支山은 현재 甘肅 永昌의 서쪽, 즉 山丹 동남쪽에 있는 산이 아니라, 新疆의 바르쿨(巴里坤) 동쪽, 즉 천산산맥 東端의 高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哈爾里克(Qaraliq)山이라고 불리우며 이 명칭은 투르크어로 ‘黑山’을 뜻한다. 그런데 토하라어에서도 黑色은 arkent(A방언) 혹은 erkent(B방언)이라고 불리우는데, 焉支·焉居는 이것을 音寫한 말이다(林梅村 1998 : 74 참조). 그렇다면 焉耆라는 도시도 토하라어에서 ‘黑色’을 뜻하는 arkent/erkent에서 기원한 명칭임이 분명하며, 후일 투르크인들이 그곳을 점유한 뒤 Qarashahr(‘黑城’이라는 뜻)로 불리우게 된 것도 그 의미가 습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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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其明年 : 『漢書』 「張騫·李廣利傳」에는 ‘其秋’. 元狩 2년(전121)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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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渾邪((γuən-ia)王 : 渾耶王·昆邪王 등으로도 표기되었으며, 休屠王과 함께 감숙 河西回廊지역에 유목하던 흉노인들의 수령이었다. 元狩 2년(전121) 休屠王이 한나라 군대에 누차 패배한 것에 대해 單于가 격노하여 誅殺하려고 하자, 渾邪·休屠 二王은 한에 투항하기로 공모했다. 그러나 휴도왕이 이를 후회하자 혼야왕이 그를 살해하고 4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투항을 결행했다. 한나라는 그를 漯陰侯로 봉하고, 그 땅에 張掖郡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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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金城 : 현재의 감숙성 蘭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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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南山 : 祁連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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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元狩 4년, 즉 기원전 1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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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장건, 장건, 박망후(博望侯), 장건, 장건
지명
우북평(右北平), 한나라, 기련산(祁連山), 한나라, 금성(金城), 하서(河西), 남산(南山), 염택,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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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기장군(곽거병)이 흉노 서역의 군대를 격파하고 혼야왕이 한나라에 투항하면서 이후 한나라가 흉노를 사막의 북쪽까지 쫒아냄 자료번호 : jo.k_0001_0123_008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