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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안식(安息)의 풍속, 위치, 문화 등을 설명함

  • 국가
    안식(安息)
안식 주 001
각주 001)
安息(an-siək) : 파르티아(Parthia, 전248 ~ 후224) 왕조를 가리키며, 이 왕조의 건설자의 이름인 Arsak을 음사한 것이 安息이다. 원래 파르티아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 속했던 省(satrapy)의 명칭으로서 카스피해 동남연안지역, 즉 현재 투르크메니스탄의 남부지방을 지칭하였다. 이 지역은 알렉산더 제국이 분열된 후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나, 파르니(Parni)라는 이란계 부족이 독립을 획득하며 파르티아 왕조를 건설하였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소위 ‘파르티아式 騎射法’(Parthian shooting)으로도 유명한 이 유목민들은 전 240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가 보낸 원정군을 격파하여 제국의 기초를 놓고, 헤카톰필로스(Hecatompylos)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 최초의 도읍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쉬하바드 서쪽 16km 되는 지점 新·舊 Nisa유적지에서 궁전과 신전 및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풍부한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어, 그곳이 헤카톰필로스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렇게 이란 동북지방에 기초를 놓은 파르티아 왕조는 기원전 2세기 중반경 Mithradates 1세와 2세의 시대에 동으로는 인도를 침공하고, 서로는 메디아를 병합했으며, 나아가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양하 유역을 정복하여, 수도를 Ecbatana에서 티그리스강 左岸에 있는 Ctesiphon으로 옮겼다. 파르티아의 명성은 기원전 53년 유프라테스 상류에서 벌어진 카르해(Carrhae)의 전투에서 로마를 격파함으로써 최고조에 이르렀다. 제1차 三頭政治의 주역인 크랏수스(Crassus)가 이끄는 로마의 重裝步兵은 파르티아의 새로운 방식으로 무장한 군대를 당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파르티아는 종래 활과 검으로 무장한 輕裝騎兵 이외에 重裝騎兵이라는 새로운 군대를 투입했는데, 이것은 小札을 이어붙인 馬鎧(말갑옷)으로 무장한 말에 과거와 같은 가죽제 鐙子가 아니라 금속제 鐙子를 달고 거기에 발을 단단하게 끼운 채 손에는 長槍을 들고 말의 달리는 힘을 이용하여 그대로 적진을 돌파함으로써 무서운 파괴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파르티아는 2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의 압력으로 서서히 약화되었고, 226년 이란 사산왕조의 아르다시르(Ardashir)가 크테시폰을 함락함으로써 파르티아는 멸망하고 말았다. 동서문명의 교류사에서 파르티아 왕조가 갖는 의미에 관해서는 護雅夫 1970 : 152 ~ 167 참조. 한편, 『正義』는 安息國에 관해서 다름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地理志』에 의하면 ‘安息國의 수도는 서쪽으로 11,200리 떨어져 있고, 西關에서 西行하여 3,400리 가면 阿蠻國에 이른다. 西行하여 3,600리 가면 斯賓國에 이르는데, 斯賓에서 南行하여 강을 건너서 다시 960리 西南行하면 于羅國에 이르니, 이곳이 安息의 가장 서쪽 경계이다.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배를 타고 가면 大秦國과 통한다.’고 한다. 『漢書』에는 ‘北으로는 康居, 東으로는 烏弋山離, 西로는 條枝에 접하며, 나라는 嬀水에 인접해 있다. 정착생활을 하며, 은으로 화폐를 만드는데, 그 王의 얼굴을 새긴다. 王이 죽으면 곧 화폐를 바꾸어 왕의 얼굴을 그려넣는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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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월지의 서쪽으로 대략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 풍속은 정착생활이고, 농사를 짓고 쌀과 보리를 심으며 포도주가 있습니다. 그 성읍은 대완과 같은데, 거기에 속한 크고 작은 수백 개의 성이 있습니다. 그 땅은 둘레가 수천 리이어서 가장 큰 나라입니다. [나라는] 규수에 임해 있고 시장이 있으며, 사람들이 장사를 할 때 수레와 배를 이용하여 이웃 나라로 가는데, 수천리를 가기도 합니다. 은으로 화폐를 만들며 화폐는 그 왕의 얼굴을 본따서 만듭니다.주 002
각주 002)
『索隱』 ; “『漢書』에는 ‘정면[文]에는 오로지 王의 얼굴을 새기고, 배면[幕]에는 夫人의 얼굴을 새긴다.’고 하였고, 荀悅은 ‘幕의 音은 漫이고, 문자가 없는 面(無文面)을 말한다.’고 하였다. 張晏은 ‘화폐의 정면에는 사람이 乘馬한 모습을 새기고, 화폐의 배면에는 사람의 얼굴 모습을 새긴다.’고 하였으며, 韋昭는 ‘幕은 화폐의 背面이고, 音은 漫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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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죽으면 곧 화폐를 바꾸는데, 왕의 얼굴을 본따서 [다시] 만듭니다. 가죽 위에 횡(橫)으로 글자를 써서 기록을 합니다. 그 서쪽은 곧 조지(條支)이고, 북쪽은 곧 엄채와 여헌(黎軒)입니다.”주 003
각주 003)
黎軒(liei-xian) : 『漢書』 「西域傳」에는 ‘犂軒’. Hulsewé(1979 : 117 ~ 118)에 의하면 이 명칭의 비정에 대해서 수많은 견해가 제출되었는데, 중요한 것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Hirth, Chavannes : 로마제국의 Petra를 지칭하는 Rekem을 옮긴 말로서 시리아와 로마제국의 동방령을 지칭. (2) Brosset, de Groot, Herrmann : Hyrcania(카스피해 남방)를 지칭. (3) Boodberg : 중앙아시아에 있던 Alexandria들 가운데 하나. (4) Tarn : Media. (5) Pelliot, Dubs :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 (6) Haloun : Seleucid를 지칭. (7) 藤田豊八 : Rai (Rhagae, Rhages)를 지칭. 한편, 黎軒에 대한 중국측의 주석은 傳聞에 의거한 것들이 많아서 때로는 황당무계한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고대 중국인들의 세계관의 一端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인용해 두기로 한다. 먼저 『索隱』에는 “『漢書』에 犂靳, 『續漢書』에 一名 大秦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생각컨대 [黎軒, 犂靳, 大秦] 三國은 모두 西海에 임해 있고 [동일한 나라를 가리킨다]. 『後漢書』는 ‘西海가 그 나라를 둘러싸고 있으며 오직 西北으로만 陸道와 통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漢使가 烏弋에서 돌아올 때 條枝에 도달했던 사람은 없었다.”라고 되어 있다. 한편, 『正義』는 黎軒에 관한 諸家의 견해를 망라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後漢書』는 ‘大秦은 一名 ‘犂鞬’이고, 西海의 西쪽에 있으며, 東西南北이 各 數千里이다. 四百餘所의 城이 있으며, 金銀奇寶가 많이 난다. 夜光璧·明月珠·駭雞犀·火浣布·珊瑚·琥珀·琉璃·瑯玕·朱丹·青碧 등이 있으며, 珍怪한 물건들은 모두 大秦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康氏外國傳』은 ‘그 나라의 城郭은 모두 青水精으로 기초를 삼았고, 五色水精으로 壁을 세웠다. 人民은 기술이 많아서, 능히 銀을 金으로 만든다. 나라 사람들은 시장에서 모두 金銀으로 만든 화폐로 물건을 산다.’고 하였다. 『萬震南州志』는 ‘큰 집의 屋舍는 珊瑚로 기둥을 삼고, 琉璃로 牆壁을 삼으며, 水精으로 주춧돌을 놓는다. 바다 가운데 섬에는 나무가 있는데, 겨울이면 그곳으로 가서 그 껍질을 벗겨내어 쌓아서 布로 만든다. 極細하여 手巾과 같은 것 여러 匹를 만들 수 있다. 麻焦布와 차이가 없고 色은 약간 青黑인데 만약 더러워져서 씻으려고 한다면 그것을 불 속에 넣으면 곧 精潔해지니, 세상에서는 그것을 火浣布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括地志』는 ‘火山國은 扶風의 南東쪽 大湖海中에 있다. 그 나라 안의 산들에서는 모두 불길이 치솟는데, 그렇지만 그 불 속에 白鼠皮와 樹皮가 있고, 그것이 쌓여서 火浣布가 된다. 『魏略』에서 말하기를 大秦은 安息·條支의 西쪽에 있는 大海의 서쪽에 있다고 했는데, 그런 연유로 세상에서는 그곳을 海西라고도 부른다. 安息의 경계에서 배를 타면 곧바로 海西로 가는데, 좋은 바람을 만나면 석 달 만에 도착하고, 바람이 늦어지면 1 ~ 2년이 걸리기도 한다. 큰 건물을 세워 公私의 宮室로 삼고, 郵驛을 위해 亭과 置를 둔 것은 中國과 같다. 安息에서 바다를 끼고 육지로도 그 나라에 도착하는데, 주민들은 서로 연접해 있고, 十里에 一亭, 三十里에 一置를 둔다. 盜賊이 없다. 그 풍속에 의하면 사람들은 長大平正하고, 中國人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胡服을 입고 있다.’고 하였다. 『宋膺異物志』는 ‘秦의 북쪽에 附庸하는 小邑이 있다. 羊새끼가 땅 속에서 자연적으로 출생하는데, 그것이 막 움터서 나오려고 할 때는 판막이로 둘러싸서 짐승들이 그것을 잡아먹지 못하도록 한다. 그 배꼽은 땅에 맞닿아 있어서 잘라 내면 죽어 버린다. 물건을 두드려 그것을 놀래게 하면 곧 놀라서 울다가 배꼽이 마침내 잘라진다. 수초를 따라서 무리를 이루며 산다. 또한 大秦에는 金 二枚가 있는데, 그 크기가 모두 오이만하여 그것을 심으면 번식하는 것이 끝이 없고, 사용한 즉 眞金과 같다.’고 하였다. 『括地志』는 ‘小人國이 大秦 南쪽에 있는데, 사람들은 겨우 三尺에 불과하다. 그들이 농사를 지을 때 鶴이 잡아먹을까 우려해, 大秦이 그들을 보호하고 돕는다. 그곳은 곧 焦僥國이니 그 주민들은 穴居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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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安息(an-siək) : 파르티아(Parthia, 전248 ~ 후224) 왕조를 가리키며, 이 왕조의 건설자의 이름인 Arsak을 음사한 것이 安息이다. 원래 파르티아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 속했던 省(satrapy)의 명칭으로서 카스피해 동남연안지역, 즉 현재 투르크메니스탄의 남부지방을 지칭하였다. 이 지역은 알렉산더 제국이 분열된 후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나, 파르니(Parni)라는 이란계 부족이 독립을 획득하며 파르티아 왕조를 건설하였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소위 ‘파르티아式 騎射法’(Parthian shooting)으로도 유명한 이 유목민들은 전 240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가 보낸 원정군을 격파하여 제국의 기초를 놓고, 헤카톰필로스(Hecatompylos)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 최초의 도읍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쉬하바드 서쪽 16km 되는 지점 新·舊 Nisa유적지에서 궁전과 신전 및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풍부한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어, 그곳이 헤카톰필로스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렇게 이란 동북지방에 기초를 놓은 파르티아 왕조는 기원전 2세기 중반경 Mithradates 1세와 2세의 시대에 동으로는 인도를 침공하고, 서로는 메디아를 병합했으며, 나아가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양하 유역을 정복하여, 수도를 Ecbatana에서 티그리스강 左岸에 있는 Ctesiphon으로 옮겼다. 파르티아의 명성은 기원전 53년 유프라테스 상류에서 벌어진 카르해(Carrhae)의 전투에서 로마를 격파함으로써 최고조에 이르렀다. 제1차 三頭政治의 주역인 크랏수스(Crassus)가 이끄는 로마의 重裝步兵은 파르티아의 새로운 방식으로 무장한 군대를 당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파르티아는 종래 활과 검으로 무장한 輕裝騎兵 이외에 重裝騎兵이라는 새로운 군대를 투입했는데, 이것은 小札을 이어붙인 馬鎧(말갑옷)으로 무장한 말에 과거와 같은 가죽제 鐙子가 아니라 금속제 鐙子를 달고 거기에 발을 단단하게 끼운 채 손에는 長槍을 들고 말의 달리는 힘을 이용하여 그대로 적진을 돌파함으로써 무서운 파괴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파르티아는 2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의 압력으로 서서히 약화되었고, 226년 이란 사산왕조의 아르다시르(Ardashir)가 크테시폰을 함락함으로써 파르티아는 멸망하고 말았다. 동서문명의 교류사에서 파르티아 왕조가 갖는 의미에 관해서는 護雅夫 1970 : 152 ~ 167 참조. 한편, 『正義』는 安息國에 관해서 다름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地理志』에 의하면 ‘安息國의 수도는 서쪽으로 11,200리 떨어져 있고, 西關에서 西行하여 3,400리 가면 阿蠻國에 이른다. 西行하여 3,600리 가면 斯賓國에 이르는데, 斯賓에서 南行하여 강을 건너서 다시 960리 西南行하면 于羅國에 이르니, 이곳이 安息의 가장 서쪽 경계이다.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배를 타고 가면 大秦國과 통한다.’고 한다. 『漢書』에는 ‘北으로는 康居, 東으로는 烏弋山離, 西로는 條枝에 접하며, 나라는 嬀水에 인접해 있다. 정착생활을 하며, 은으로 화폐를 만드는데, 그 王의 얼굴을 새긴다. 王이 죽으면 곧 화폐를 바꾸어 왕의 얼굴을 그려넣는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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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索隱』 ; “『漢書』에는 ‘정면[文]에는 오로지 王의 얼굴을 새기고, 배면[幕]에는 夫人의 얼굴을 새긴다.’고 하였고, 荀悅은 ‘幕의 音은 漫이고, 문자가 없는 面(無文面)을 말한다.’고 하였다. 張晏은 ‘화폐의 정면에는 사람이 乘馬한 모습을 새기고, 화폐의 배면에는 사람의 얼굴 모습을 새긴다.’고 하였으며, 韋昭는 ‘幕은 화폐의 背面이고, 音은 漫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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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黎軒(liei-xian) : 『漢書』 「西域傳」에는 ‘犂軒’. Hulsewé(1979 : 117 ~ 118)에 의하면 이 명칭의 비정에 대해서 수많은 견해가 제출되었는데, 중요한 것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Hirth, Chavannes : 로마제국의 Petra를 지칭하는 Rekem을 옮긴 말로서 시리아와 로마제국의 동방령을 지칭. (2) Brosset, de Groot, Herrmann : Hyrcania(카스피해 남방)를 지칭. (3) Boodberg : 중앙아시아에 있던 Alexandria들 가운데 하나. (4) Tarn : Media. (5) Pelliot, Dubs :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 (6) Haloun : Seleucid를 지칭. (7) 藤田豊八 : Rai (Rhagae, Rhages)를 지칭. 한편, 黎軒에 대한 중국측의 주석은 傳聞에 의거한 것들이 많아서 때로는 황당무계한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고대 중국인들의 세계관의 一端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인용해 두기로 한다. 먼저 『索隱』에는 “『漢書』에 犂靳, 『續漢書』에 一名 大秦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생각컨대 [黎軒, 犂靳, 大秦] 三國은 모두 西海에 임해 있고 [동일한 나라를 가리킨다]. 『後漢書』는 ‘西海가 그 나라를 둘러싸고 있으며 오직 西北으로만 陸道와 통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漢使가 烏弋에서 돌아올 때 條枝에 도달했던 사람은 없었다.”라고 되어 있다. 한편, 『正義』는 黎軒에 관한 諸家의 견해를 망라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後漢書』는 ‘大秦은 一名 ‘犂鞬’이고, 西海의 西쪽에 있으며, 東西南北이 各 數千里이다. 四百餘所의 城이 있으며, 金銀奇寶가 많이 난다. 夜光璧·明月珠·駭雞犀·火浣布·珊瑚·琥珀·琉璃·瑯玕·朱丹·青碧 등이 있으며, 珍怪한 물건들은 모두 大秦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康氏外國傳』은 ‘그 나라의 城郭은 모두 青水精으로 기초를 삼았고, 五色水精으로 壁을 세웠다. 人民은 기술이 많아서, 능히 銀을 金으로 만든다. 나라 사람들은 시장에서 모두 金銀으로 만든 화폐로 물건을 산다.’고 하였다. 『萬震南州志』는 ‘큰 집의 屋舍는 珊瑚로 기둥을 삼고, 琉璃로 牆壁을 삼으며, 水精으로 주춧돌을 놓는다. 바다 가운데 섬에는 나무가 있는데, 겨울이면 그곳으로 가서 그 껍질을 벗겨내어 쌓아서 布로 만든다. 極細하여 手巾과 같은 것 여러 匹를 만들 수 있다. 麻焦布와 차이가 없고 色은 약간 青黑인데 만약 더러워져서 씻으려고 한다면 그것을 불 속에 넣으면 곧 精潔해지니, 세상에서는 그것을 火浣布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括地志』는 ‘火山國은 扶風의 南東쪽 大湖海中에 있다. 그 나라 안의 산들에서는 모두 불길이 치솟는데, 그렇지만 그 불 속에 白鼠皮와 樹皮가 있고, 그것이 쌓여서 火浣布가 된다. 『魏略』에서 말하기를 大秦은 安息·條支의 西쪽에 있는 大海의 서쪽에 있다고 했는데, 그런 연유로 세상에서는 그곳을 海西라고도 부른다. 安息의 경계에서 배를 타면 곧바로 海西로 가는데, 좋은 바람을 만나면 석 달 만에 도착하고, 바람이 늦어지면 1 ~ 2년이 걸리기도 한다. 큰 건물을 세워 公私의 宮室로 삼고, 郵驛을 위해 亭과 置를 둔 것은 中國과 같다. 安息에서 바다를 끼고 육지로도 그 나라에 도착하는데, 주민들은 서로 연접해 있고, 十里에 一亭, 三十里에 一置를 둔다. 盜賊이 없다. 그 풍속에 의하면 사람들은 長大平正하고, 中國人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胡服을 입고 있다.’고 하였다. 『宋膺異物志』는 ‘秦의 북쪽에 附庸하는 小邑이 있다. 羊새끼가 땅 속에서 자연적으로 출생하는데, 그것이 막 움터서 나오려고 할 때는 판막이로 둘러싸서 짐승들이 그것을 잡아먹지 못하도록 한다. 그 배꼽은 땅에 맞닿아 있어서 잘라 내면 죽어 버린다. 물건을 두드려 그것을 놀래게 하면 곧 놀라서 울다가 배꼽이 마침내 잘라진다. 수초를 따라서 무리를 이루며 산다. 또한 大秦에는 金 二枚가 있는데, 그 크기가 모두 오이만하여 그것을 심으면 번식하는 것이 끝이 없고, 사용한 즉 眞金과 같다.’고 하였다. 『括地志』는 ‘小人國이 大秦 南쪽에 있는데, 사람들은 겨우 三尺에 불과하다. 그들이 농사를 지을 때 鶴이 잡아먹을까 우려해, 大秦이 그들을 보호하고 돕는다. 그곳은 곧 焦僥國이니 그 주민들은 穴居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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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安息)의 풍속, 위치, 문화 등을 설명함 자료번호 : jo.k_0001_0123_006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