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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이 대완, 대월지, 대하, 강거 및 주변 나라에 대한 풍속, 지리 등을 천자에게 아룀

  • 국가
    대완(大宛)
장건이 몸소 방문했던 곳은 대완·대월지·대하·강거 등이었고, 또한 그 주변 5~6개의 큰 나라에 관해서도 전해 들었는데, 이를 모두 천자에게 아뢰었다. “대완은 흉노의 서남쪽에 있고 한나라의 정서(正西)에 있는데, 한나라에서 대략 만리는 됩니다.주 001
각주 001)
萬里 : 1里=0.4km로 계산하면 4,000km가 되는 셈이며, 당시 한제국의 수도 長安에서 하서회랑·타림분지를 거쳐 대완까지의 거리에 해당될 것이다. 余太山 2005 : 10은 장건이 흉노에 포로로 끌려갔었기 때문에 그 거리를 다 합친 것이라고 보았으나, 그럴 경우 4,000km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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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풍속은 정착생활[土著]이고 농사를 짓고, 쌀과 보리를 심으며 포도주(蒲陶酒)가 있습니다.주 002
각주 002)
蒲陶 : ‘葡桃’로도 표기되나 桃와는 무관하다. 포도는 장건이 그 씨를 처음으로 입수해 와 장안 주변에 심었다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중국에서 포도재배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蒲陶/葡桃라는 말 자체도 장건에 의해 처음 소개된 셈이 되는데, 이 말은 이란어 *buda(wa)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포도가 본격적으로 중국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전반 高昌(투르판)이 붕괴된 뒤 그곳의 포도재배 기술이 唐으로 전래된 이후부터였다. Laufer 1919 : 220ff;Schafer 1963 : 141 ~ 14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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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이 많은데,주 003
각주 003)
『索隱』에는 “『外國傳』에 의하면 天下에 세 가지가 많은데, 中國은 사람이 많고[人衆], 大秦은 보물이 많고[寶衆], 月氏는 말이 많다[馬衆].”라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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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땀[汗血]을 흘리며 그 조상은 천마(天馬)의 자식이라고 합니다.주 004
각주 004)
天馬 : 『集解』에는 “『漢書音義』에 의하면 大宛國에는 高山이 있고 그 위에 말이 있는데, 손에 넣을 수 없어서, 五色의 암말을 그 아래에 갖다 놓았더니 교미하여 汗血하는 망아지를 낳았고, 그래서 그것을 天馬의 자식이라 부른다고 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뒤의 本文에 의하면 처음에는 烏孫馬를 天馬라고 불렀는데, 大宛의 汗血馬를 구한 뒤에 烏孫馬를 西極馬라고 부르고 大宛馬를 天馬라고 불렀다. 武帝가 天馬에 특별한 집착을 보였던 이유에 대해서 匈奴와의 전쟁을 위한 駿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설명도 있고, 혹은 「天馬歌」에서 드러나듯이 崑崙山 정상에 사는 西王母를 만나 不老長生의 靈藥을 얻기 위해서라는 설명도 있다. 또, 한 가지 덧붙일 수 있는 것은 黃河의 治水와 관련된 설명인데, 예를 들어 『漢書』 卷6 「武帝紀」에 元狩 2년(전121) “馬生余吾水中”이라는 기사, 元鼎 4년(전113) “馬生渥洼水中”하여 “作天馬之歌”했다는 기사 등이 그러하다. 封禪과 黃河治水 그리고 西域遠征과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李成珪 20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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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과 가옥이 있고, 그 속읍(屬邑)으로는 크고 작은 70여 개의 성(城)이 있으며, 백성의 숫자는 대략 수십만 명이 됩니다. 그 군대는 활과 창으로 무장했으며 기사(騎射)를 합니다. 그 북쪽에는 강거가, 서쪽에는 대월지가, 서남쪽에는 대하가, 동북쪽에는 오손(烏孫)이, 동쪽에는 우미(扜冞) 주 005
각주 005)
扜冞(uo-mjie). 『集解』 : “徐廣이 말하기를 『漢紀』에 拘彌國은 于窴에서 三百里 떨어져 있다고 한다.” 『索隱』 : “扜冞는 國名이다.” 『後漢書』 卷78 「西域傳」 : “玉門을 나서서 鄯善·且末·精絕를 거쳐 三千餘里 가면 拘彌에 도달한다.” 同 : “拘彌國. 거처는 寧彌城이고 長史의 거처인 柳中에서 4,900리 떨어져 있다. 낙양에서 12,800리 떨어져 있고, 관할하는 호수는 2,173, 인구는 7,251, 병사는 1,760명이다.” 등의 기록 참조. 이로 미루어 볼 때 扜冞(우미) 혹은 拘彌(구미;g’iu-mjie)는 于窴(우전;즉 현재의 호탄) 부근의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Chavannes와 같은 학자들은 捍, 捍麽, 汗彌(한미) 등이 더 정확한 음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黃文弼은 이곳을 현재 호탄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흘러가는 케리야강 중상류 지역에 위치한 Kara Dong과 동일지점으로 보았다. Hulsewé 1979 : 94 ~ 95. 자세한 내용은 『漢書』 「西域傳」 扜彌國條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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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전(于窴) 주 006
각주 006)
于窴’(jiu-d’ien). 타림분지 南邊의 주요한 오아시스 도시인 Khotan(현재 和田). 고대 중국 史書에는 于窴 이외에 于闐, 烏纏, 于循, 于殿, 屈丹, 喚那 등의 字面으로도 표기되었으며, 몽골제국시대에는 斡端, 忽炭 등으로도 표기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이곳을 Lih-yul(Lih國의 뜻) 혹은 U-then이라고 불렀고, 인도식 호칭은 Kustana인데, 프라크리트 방언으로는 Kustanaka이다. 고대문헌의 于窴·于闐 등은 U-then을 옮긴 것이고, 『大唐西域記』의 瞿薩旦那(‘大地의 젖’이라는 뜻)는 Kustana를 음사한 것이다. 호탄은 곤륜산맥에서 北流하는 두 개의 강, 즉 유룽카시(Yurungqash, 白玉河)와 카라카시(Qaraqash, 黑玉河)에 의해서 형성된 큰 오아시스로, 동서 35km 남북 20km의 규모이다. 주민들은 농경과 과수재배를 통해서 생활을 해 왔으며, 河床에서 채취되는 軟玉(nephrite)은 고대 이래로 매우 유명하다. 호탄의 고대 주민은 印歐語에 속하는 호탄語(Khotanese)를 사용했으며, 중국측 기록에 尉遲(伏闍), 즉 Vijaya라는 姓을 가진 王家의 지배 아래에서, 동쪽으로는 Niya(精絶)에서 서쪽으로는 Guma(皮山)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대 于闐國의 都城은 호탄시 서쪽에 있는 Khalche 부근의 요트칸(Yotkan) 유적지에 폐허로 남아 있다. 현재 중국에서 于田이라고 부르는 도시는 케리야(Keriya)에 해당된다. 『歷史事典』 8 : 308 ~ 309;蘇北海 1988 : 46 ~ 64; Whitfield 2004 : 134ff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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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습니다. 우전의 서쪽에서 강물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서해(西海)주 007
각주 007)
西海 : 여기서는 아랄海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西海’라는 명칭은 문맥에 따라 카스피海나 地中海 혹은 페르시아만을 지칭할 가능성도 있어, 하나의 확정된 지리적 명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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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주입되며, 그 동쪽에서 강물은 모두 동쪽으로 흘러 염택(鹽澤) 주 008
각주 008)
鹽澤 : ‘鹽水’라고도 기록되었으며, 현재의 롭 노르(Lop Nor;羅布泊). 사막지역이어서 호수에 염분이 많이 남아 鹽澤이라 불리웠으며 蒲昌海 혹은 泑澤이라고도 불리웠다. 이에 관하여 『正義』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漢書』에 ‘鹽澤은 玉門·陽關에서 三百餘里 떨어져 있고, 넓이와 길이가 三四百里이며, 그 물은 모두 地下로 潛行하다가, 남쪽으로 가서 積石山에서 나와 中國의 黃河가 된다.’고 하였다. 『括地志』에 ‘蒲昌海는 泑澤, 鹽澤, 輔日海, 穿蘭, 臨海라고도 부르며, 沙州의 西南쪽에 있다. 玉門關은 沙州 壽昌縣의 서쪽 六里되는 지점에 있다.’고 되어 있다.” 타림河가 사막의 지하로 伏流했다가 湧出하여 형성된 이 호수에 관해서는 스벤 헤딘의 고전적인 업적이 있다(Hedin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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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주입됩니다. 염택의 [물은] 지하로 잠행하는데, 그것이 남쪽으로 [흘러와] 황하의 근원이 되어 [지상으로] 분출됩니다.주 009
각주 009)
『索隱』;“『漢書』 「西域傳」에 의하면 ‘黃河는 두 개의 원천이 있는데 하나는 蔥嶺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于窴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다. 『山海經』에 의하면 ‘黃河는 崑崙의 東北쪽 구석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다. 郭璞은 ‘黃河는 崑崙에서 나와서 地下로 潛行하다가, 蔥嶺山 于窴國에 이르면 다시 갈래가 나뉘어 지상으로 나왔다가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泑澤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積石으로 흘러가서 中國의 黃河가 된다.’고 기록했다. 泑澤은 곧 鹽澤이며 一名 蒲昌海라고도 한다. 「西域傳」은 ‘하나의 원천은 于闐 南山 아래에서 나온다.’고 하여 郭璞이 『山海經』에 주석을 단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廣志』에는 ‘蒲昌海는 蒲類海 동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 인용문에서도 드러나듯이 19세기 말 중앙아시아에 대한 과학적인 지리탐사에 의해 황하의 원류가 정확하게 파악되기 이전 중국인들은 崑崙山에서 發源한 黃河가 地下로 潛行하여 東流하다가 于窴에 이르러 여러 갈래로 나뉘어 奔出하고, 그것이 다시 합하여 鹽澤으로 들어간 뒤 거기서 다시 伏流하여 흐르다가 積石山에서 다시 湧出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소위 ‘黃河伏流重源說’인데,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武田雅哉 19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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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석(玉石)이 많이 나며 황하는 중국으로 흘러듭니다. 또한 누란(樓蘭) 주 010
각주 010)
樓蘭(ləu-lân) : 카로슈티(Kharoshti) 문헌에 보이는 Krora’imna 혹은 Krorayina와 동일. 소그드인들에 의해서 씌어진 소위 ‘古代書翰(Ancient Letters)’에서 樓蘭은 kr’wr’n으로 표기되었다(Henning 1948 : 611). S. Hedin과 A. Stein에 의해 타림분지 東邊의 롭 노르 부근에서 폐허가 발견·조사되었고, 현지에 남아 있는 佛塔, 카로슈티 문자가 씌어진 木簡, 헬레니즘 양식의 木彫 등을 통해 이 도시의 고대 주민이 印歐語族에 속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원전 2천 년기 초반에서 기원후 초기 수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古墓에서 수많은 미이라들이 발견되었고, 그 외형적 특징뿐만 아니라 遺傳因子 조사를 통해서 이들이 유라시아 서부의 코카서스계 인종과 동일 계통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소위 ‘樓蘭의 美人’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로는 Mair 1995;Mallory & Mair 2000 참조. 누란의 도읍인 扜泥城은 蒲昌海, 즉 롭 노르 북변에 있었고, 호수 남쪽에서 발견된 Miran유적지는 伊循城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누란이 언제부터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기원전 176년 흉노의 單于가 한나라에 보낸 서한, 그리고 기원전 126년 張騫의 귀환보고에서 樓蘭이 特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 전부터 동서교통의 要地로서 번영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漢이 기원전 115년 河西를 장악하고 타림분지의 도시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게 되면서 樓蘭에 대한 지배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기원전 77년에는 傅介子를 보내어 그 왕을 살해한 뒤 國名도 鄯善으로 바꾸고 屯田을 실시하여 이곳을 한제국의 전진기지로 만들었다. 鄯善이라는 명칭은 Cherchen/Charchan (현재의 且末)과 같은 어원을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곳에서 발견된 3세기 후반의 한문문서들은 西晋도 이곳을 경영했었음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前涼의 西域長史인 李栢이 쓴 서한의 草稿(소위 ‘李栢文書’라고 불리움)를 통해서 4세기 전반까지도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점차 타림河의 水量과 河道의 변화에 따라, 도시에 물을 공급하던 호수가 사라짐에 따라 도시 자체도 폐허화되고 사막 속에 묻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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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姑師) 주 011
각주 011)
姑師(kuo-ṣi) : 현재 투르판 부근의 도시국가. 기원전 60년대에 한제국이 투르판 지역을 정복한 뒤 ‘車師(kiwo-ṣi)’라고 불렀다(車師에 관해서는 『漢書』 「西域傳」의 譯註 참조). 이 명칭의 語源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岑仲勉은 qusi의 對音으로 보고 퀼 테긴 비문에는 이것이 qushu로 바뀌어 나타났다고 주장했으며, P. Pelliot는 Qoshu를 西突厥 十姓의 일부인 弩失畢五姓 중의 하나인 哥舒와 연관시켰는가 하면, Hun족 연구자인 O. Maenchen-Helfen은 Kusi로 읽고 月氏의 貴霜과 동일시하였다. 한편, A. Herrmann은 樓蘭과 姑師의 거리가 멀다는 점을 들어 姑師=車師에 반대한 바 있다(Hulsewé 1979 : 76 ~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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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읍은 모두 성곽을 갖고 있으며 염택에 임해 있습니다.주 012
각주 012)
5,000里=2,000km. 현재 西安에서 롭 노르까지의 직선거리가 대략 2,000km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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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택장안에서 대략 5천 리는 떨어져 있습니다. 흉노의 우방(右方)은 염택의 동쪽에서 농서(隴西)의 장성에까지 이르는 지역에 자리잡으면서 남쪽으로는 강(羌)과 접하여 한나라의 도로를 격절시키고 있습니다.”

  • 각주 001)
    萬里 : 1里=0.4km로 계산하면 4,000km가 되는 셈이며, 당시 한제국의 수도 長安에서 하서회랑·타림분지를 거쳐 대완까지의 거리에 해당될 것이다. 余太山 2005 : 10은 장건이 흉노에 포로로 끌려갔었기 때문에 그 거리를 다 합친 것이라고 보았으나, 그럴 경우 4,000km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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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蒲陶 : ‘葡桃’로도 표기되나 桃와는 무관하다. 포도는 장건이 그 씨를 처음으로 입수해 와 장안 주변에 심었다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중국에서 포도재배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蒲陶/葡桃라는 말 자체도 장건에 의해 처음 소개된 셈이 되는데, 이 말은 이란어 *buda(wa)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포도가 본격적으로 중국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전반 高昌(투르판)이 붕괴된 뒤 그곳의 포도재배 기술이 唐으로 전래된 이후부터였다. Laufer 1919 : 220ff;Schafer 1963 : 141 ~ 14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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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索隱』에는 “『外國傳』에 의하면 天下에 세 가지가 많은데, 中國은 사람이 많고[人衆], 大秦은 보물이 많고[寶衆], 月氏는 말이 많다[馬衆].”라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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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天馬 : 『集解』에는 “『漢書音義』에 의하면 大宛國에는 高山이 있고 그 위에 말이 있는데, 손에 넣을 수 없어서, 五色의 암말을 그 아래에 갖다 놓았더니 교미하여 汗血하는 망아지를 낳았고, 그래서 그것을 天馬의 자식이라 부른다고 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뒤의 本文에 의하면 처음에는 烏孫馬를 天馬라고 불렀는데, 大宛의 汗血馬를 구한 뒤에 烏孫馬를 西極馬라고 부르고 大宛馬를 天馬라고 불렀다. 武帝가 天馬에 특별한 집착을 보였던 이유에 대해서 匈奴와의 전쟁을 위한 駿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설명도 있고, 혹은 「天馬歌」에서 드러나듯이 崑崙山 정상에 사는 西王母를 만나 不老長生의 靈藥을 얻기 위해서라는 설명도 있다. 또, 한 가지 덧붙일 수 있는 것은 黃河의 治水와 관련된 설명인데, 예를 들어 『漢書』 卷6 「武帝紀」에 元狩 2년(전121) “馬生余吾水中”이라는 기사, 元鼎 4년(전113) “馬生渥洼水中”하여 “作天馬之歌”했다는 기사 등이 그러하다. 封禪과 黃河治水 그리고 西域遠征과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李成珪 20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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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扜冞(uo-mjie). 『集解』 : “徐廣이 말하기를 『漢紀』에 拘彌國은 于窴에서 三百里 떨어져 있다고 한다.” 『索隱』 : “扜冞는 國名이다.” 『後漢書』 卷78 「西域傳」 : “玉門을 나서서 鄯善·且末·精絕를 거쳐 三千餘里 가면 拘彌에 도달한다.” 同 : “拘彌國. 거처는 寧彌城이고 長史의 거처인 柳中에서 4,900리 떨어져 있다. 낙양에서 12,800리 떨어져 있고, 관할하는 호수는 2,173, 인구는 7,251, 병사는 1,760명이다.” 등의 기록 참조. 이로 미루어 볼 때 扜冞(우미) 혹은 拘彌(구미;g’iu-mjie)는 于窴(우전;즉 현재의 호탄) 부근의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Chavannes와 같은 학자들은 捍, 捍麽, 汗彌(한미) 등이 더 정확한 음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黃文弼은 이곳을 현재 호탄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흘러가는 케리야강 중상류 지역에 위치한 Kara Dong과 동일지점으로 보았다. Hulsewé 1979 : 94 ~ 95. 자세한 내용은 『漢書』 「西域傳」 扜彌國條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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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于窴’(jiu-d’ien). 타림분지 南邊의 주요한 오아시스 도시인 Khotan(현재 和田). 고대 중국 史書에는 于窴 이외에 于闐, 烏纏, 于循, 于殿, 屈丹, 喚那 등의 字面으로도 표기되었으며, 몽골제국시대에는 斡端, 忽炭 등으로도 표기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이곳을 Lih-yul(Lih國의 뜻) 혹은 U-then이라고 불렀고, 인도식 호칭은 Kustana인데, 프라크리트 방언으로는 Kustanaka이다. 고대문헌의 于窴·于闐 등은 U-then을 옮긴 것이고, 『大唐西域記』의 瞿薩旦那(‘大地의 젖’이라는 뜻)는 Kustana를 음사한 것이다. 호탄은 곤륜산맥에서 北流하는 두 개의 강, 즉 유룽카시(Yurungqash, 白玉河)와 카라카시(Qaraqash, 黑玉河)에 의해서 형성된 큰 오아시스로, 동서 35km 남북 20km의 규모이다. 주민들은 농경과 과수재배를 통해서 생활을 해 왔으며, 河床에서 채취되는 軟玉(nephrite)은 고대 이래로 매우 유명하다. 호탄의 고대 주민은 印歐語에 속하는 호탄語(Khotanese)를 사용했으며, 중국측 기록에 尉遲(伏闍), 즉 Vijaya라는 姓을 가진 王家의 지배 아래에서, 동쪽으로는 Niya(精絶)에서 서쪽으로는 Guma(皮山)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대 于闐國의 都城은 호탄시 서쪽에 있는 Khalche 부근의 요트칸(Yotkan) 유적지에 폐허로 남아 있다. 현재 중국에서 于田이라고 부르는 도시는 케리야(Keriya)에 해당된다. 『歷史事典』 8 : 308 ~ 309;蘇北海 1988 : 46 ~ 64; Whitfield 2004 : 134ff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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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西海 : 여기서는 아랄海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西海’라는 명칭은 문맥에 따라 카스피海나 地中海 혹은 페르시아만을 지칭할 가능성도 있어, 하나의 확정된 지리적 명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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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鹽澤 : ‘鹽水’라고도 기록되었으며, 현재의 롭 노르(Lop Nor;羅布泊). 사막지역이어서 호수에 염분이 많이 남아 鹽澤이라 불리웠으며 蒲昌海 혹은 泑澤이라고도 불리웠다. 이에 관하여 『正義』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漢書』에 ‘鹽澤은 玉門·陽關에서 三百餘里 떨어져 있고, 넓이와 길이가 三四百里이며, 그 물은 모두 地下로 潛行하다가, 남쪽으로 가서 積石山에서 나와 中國의 黃河가 된다.’고 하였다. 『括地志』에 ‘蒲昌海는 泑澤, 鹽澤, 輔日海, 穿蘭, 臨海라고도 부르며, 沙州의 西南쪽에 있다. 玉門關은 沙州 壽昌縣의 서쪽 六里되는 지점에 있다.’고 되어 있다.” 타림河가 사막의 지하로 伏流했다가 湧出하여 형성된 이 호수에 관해서는 스벤 헤딘의 고전적인 업적이 있다(Hedin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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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索隱』;“『漢書』 「西域傳」에 의하면 ‘黃河는 두 개의 원천이 있는데 하나는 蔥嶺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于窴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다. 『山海經』에 의하면 ‘黃河는 崑崙의 東北쪽 구석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다. 郭璞은 ‘黃河는 崑崙에서 나와서 地下로 潛行하다가, 蔥嶺山 于窴國에 이르면 다시 갈래가 나뉘어 지상으로 나왔다가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泑澤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積石으로 흘러가서 中國의 黃河가 된다.’고 기록했다. 泑澤은 곧 鹽澤이며 一名 蒲昌海라고도 한다. 「西域傳」은 ‘하나의 원천은 于闐 南山 아래에서 나온다.’고 하여 郭璞이 『山海經』에 주석을 단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廣志』에는 ‘蒲昌海는 蒲類海 동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 인용문에서도 드러나듯이 19세기 말 중앙아시아에 대한 과학적인 지리탐사에 의해 황하의 원류가 정확하게 파악되기 이전 중국인들은 崑崙山에서 發源한 黃河가 地下로 潛行하여 東流하다가 于窴에 이르러 여러 갈래로 나뉘어 奔出하고, 그것이 다시 합하여 鹽澤으로 들어간 뒤 거기서 다시 伏流하여 흐르다가 積石山에서 다시 湧出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소위 ‘黃河伏流重源說’인데,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武田雅哉 19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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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樓蘭(ləu-lân) : 카로슈티(Kharoshti) 문헌에 보이는 Krora’imna 혹은 Krorayina와 동일. 소그드인들에 의해서 씌어진 소위 ‘古代書翰(Ancient Letters)’에서 樓蘭은 kr’wr’n으로 표기되었다(Henning 1948 : 611). S. Hedin과 A. Stein에 의해 타림분지 東邊의 롭 노르 부근에서 폐허가 발견·조사되었고, 현지에 남아 있는 佛塔, 카로슈티 문자가 씌어진 木簡, 헬레니즘 양식의 木彫 등을 통해 이 도시의 고대 주민이 印歐語族에 속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원전 2천 년기 초반에서 기원후 초기 수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古墓에서 수많은 미이라들이 발견되었고, 그 외형적 특징뿐만 아니라 遺傳因子 조사를 통해서 이들이 유라시아 서부의 코카서스계 인종과 동일 계통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소위 ‘樓蘭의 美人’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로는 Mair 1995;Mallory & Mair 2000 참조. 누란의 도읍인 扜泥城은 蒲昌海, 즉 롭 노르 북변에 있었고, 호수 남쪽에서 발견된 Miran유적지는 伊循城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누란이 언제부터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기원전 176년 흉노의 單于가 한나라에 보낸 서한, 그리고 기원전 126년 張騫의 귀환보고에서 樓蘭이 特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 전부터 동서교통의 要地로서 번영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漢이 기원전 115년 河西를 장악하고 타림분지의 도시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게 되면서 樓蘭에 대한 지배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기원전 77년에는 傅介子를 보내어 그 왕을 살해한 뒤 國名도 鄯善으로 바꾸고 屯田을 실시하여 이곳을 한제국의 전진기지로 만들었다. 鄯善이라는 명칭은 Cherchen/Charchan (현재의 且末)과 같은 어원을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곳에서 발견된 3세기 후반의 한문문서들은 西晋도 이곳을 경영했었음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前涼의 西域長史인 李栢이 쓴 서한의 草稿(소위 ‘李栢文書’라고 불리움)를 통해서 4세기 전반까지도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점차 타림河의 水量과 河道의 변화에 따라, 도시에 물을 공급하던 호수가 사라짐에 따라 도시 자체도 폐허화되고 사막 속에 묻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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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姑師(kuo-ṣi) : 현재 투르판 부근의 도시국가. 기원전 60년대에 한제국이 투르판 지역을 정복한 뒤 ‘車師(kiwo-ṣi)’라고 불렀다(車師에 관해서는 『漢書』 「西域傳」의 譯註 참조). 이 명칭의 語源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岑仲勉은 qusi의 對音으로 보고 퀼 테긴 비문에는 이것이 qushu로 바뀌어 나타났다고 주장했으며, P. Pelliot는 Qoshu를 西突厥 十姓의 일부인 弩失畢五姓 중의 하나인 哥舒와 연관시켰는가 하면, Hun족 연구자인 O. Maenchen-Helfen은 Kusi로 읽고 月氏의 貴霜과 동일시하였다. 한편, A. Herrmann은 樓蘭과 姑師의 거리가 멀다는 점을 들어 姑師=車師에 반대한 바 있다(Hulsewé 1979 : 76 ~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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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5,000里=2,000km. 현재 西安에서 롭 노르까지의 직선거리가 대략 2,000km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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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장건
지명
대완, 대월지, 대하, 강거, 대완, 한나라, 한나라, 대월지, 대하, 우미(扜冞), 우전(于窴), 우전, 염택(鹽澤), 염택, 황하, 황하, 누란(樓蘭), 고사(姑師), 염택, 염택, 장안, 염택, 농서(隴西),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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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이 대완, 대월지, 대하, 강거 및 주변 나라에 대한 풍속, 지리 등을 천자에게 아룀 자료번호 : jo.k_0001_0123_001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