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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이 부인과 당읍씨 감보와 함께 한나라로 돌아옴

  • 국가
    대완(大宛)
일년여 머무르다가 귀환하였는데, 남산(南山) 주 001
각주 001)
南山 : 타림분지의 남쪽에 위치한 산맥, 즉 곤륜(崑崙)에서 알친[阿爾金]으로 이어지는 산맥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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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라서 강족(羌族)주 002
각주 002)
羌族 : 현재 감숙성 서남쪽, 즉 청해 부근에 거주하던 티베트 계통의 목축민. 漢代에는 ‘西羌’이라 불리웠으며, 흉노의 세력 아래에 있으면서 중국에 자주 침입했다. 한무제는 河西四郡을 설치하여 흉노와의 접촉을 단절했고, 宣帝·元帝 때에도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했지만, 後漢 이후 羌族은 중국 내부의 혼란을 틈타서 後秦(384 ~ 417)과 같은 왕조를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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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는 땅을 통과해서 돌아가려고 했으나 다시 흉노에게 붙들리게 되었다.주 003
각주 003)
張騫이 귀환하는 도중 匈奴에 붙들린 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가 羌族이 거주하는 羌中路를 통과했다면 그 路線은 대체로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파미르를 넘어서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의 산지를 거쳐서 오늘날의 靑海와 甘肅 사이로 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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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여 머물렀는데 선우가 사망하자 좌록리왕(左谷蠡王)이 그 태자를 공격하고 자립하면서 나라 안에 난리가 일어났고,주 004
각주 004)
‘左谷蠡王’은 흉노국가에서 單于·左賢王·右賢王 다음으로 높은 지위이다. 『集解』 : “服虔曰 : 谷音鹿, 蠡音離.”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谷蠡의 발음은 luk-li, 즉 ‘록리/녹리’가 된다. 본문에 언급된 사건은 『史記』 「匈奴列傳」에 元朔 3년(126) “匈奴의 君臣單于가 사망하자, 君臣單于의 동생 左谷蠡王 伊稚斜가 자립하여 單于가 되어, 君臣單于의 太子 於單을 攻破했다.”라는 내용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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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은 오랑캐 부인과 당읍씨 감보와 함께 도망쳐서 한나라로 돌아왔다.주 005
각주 005)
일반적으로 張騫이 月氏로 출발한 해는 기원전 139년이고 귀환한 해는 기원전 126년으로 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흉노의 左谷蠡王이 반란을 일으킨 해가 元朔 3년(전126)이었고, 그가 1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제의 조정에서 흉노에 대한 정벌을 최초로 논의한 것이 기원전 133년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보다 먼저 장건을 파견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Hulsewé 1979 : 209 ~ 210의 주 77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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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장건을 태중대부(太中大夫)주 006
각주 006)
太中大夫 : 『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上」에 의하면 太中大夫는 郎中令에 소속된 관직이며 秩比千石이며 궁정 안의 議論을 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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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삼고, 당읍씨 감보를 봉사군(奉使君)으로 삼았다. 장건의 사람됨은 힘이 세고 마음이 넓으며 신실하여 만이(蠻夷)들도 그를 아꼈다. 당읍씨 감보는 원래 오랑캐 사람이었으므로 활을 잘 쏘고, 사정이 급해지면 짐승을 사살하여 식량을 제공했다. 처음에 장건이 떠날 때에는 백여 명이 있었으나 13년이 지나서 오로지 두 사람만이 돌아오게 되었다.

  • 각주 001)
    南山 : 타림분지의 남쪽에 위치한 산맥, 즉 곤륜(崑崙)에서 알친[阿爾金]으로 이어지는 산맥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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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羌族 : 현재 감숙성 서남쪽, 즉 청해 부근에 거주하던 티베트 계통의 목축민. 漢代에는 ‘西羌’이라 불리웠으며, 흉노의 세력 아래에 있으면서 중국에 자주 침입했다. 한무제는 河西四郡을 설치하여 흉노와의 접촉을 단절했고, 宣帝·元帝 때에도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했지만, 後漢 이후 羌族은 중국 내부의 혼란을 틈타서 後秦(384 ~ 417)과 같은 왕조를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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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張騫이 귀환하는 도중 匈奴에 붙들린 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가 羌族이 거주하는 羌中路를 통과했다면 그 路線은 대체로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파미르를 넘어서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의 산지를 거쳐서 오늘날의 靑海와 甘肅 사이로 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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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左谷蠡王’은 흉노국가에서 單于·左賢王·右賢王 다음으로 높은 지위이다. 『集解』 : “服虔曰 : 谷音鹿, 蠡音離.”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谷蠡의 발음은 luk-li, 즉 ‘록리/녹리’가 된다. 본문에 언급된 사건은 『史記』 「匈奴列傳」에 元朔 3년(126) “匈奴의 君臣單于가 사망하자, 君臣單于의 동생 左谷蠡王 伊稚斜가 자립하여 單于가 되어, 君臣單于의 太子 於單을 攻破했다.”라는 내용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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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일반적으로 張騫이 月氏로 출발한 해는 기원전 139년이고 귀환한 해는 기원전 126년으로 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흉노의 左谷蠡王이 반란을 일으킨 해가 元朔 3년(전126)이었고, 그가 1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제의 조정에서 흉노에 대한 정벌을 최초로 논의한 것이 기원전 133년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보다 먼저 장건을 파견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Hulsewé 1979 : 209 ~ 210의 주 77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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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太中大夫 : 『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上」에 의하면 太中大夫는 郎中令에 소속된 관직이며 秩比千石이며 궁정 안의 議論을 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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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장건, 감보, 장건, 감보, 장건, 감보, 장건
지명
남산(南山), 한나라,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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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이 부인과 당읍씨 감보와 함께 한나라로 돌아옴 자료번호 : jo.k_0001_0123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