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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張騫)이 월지(月氏)에 사신으로 가다가 흉노에 붙잡혀 머물렀으나 한나라의 절(節)을 잃지 않음

  • 국가
    대완(大宛)
대완(大宛) 주 001
각주 001)
大宛(d’âi-iwɐn) : 이하 고유명사의 古代音은 별도의 注記 없이 Karlgren 1972에 복원된 唐音으로 표기한다. 본서에서는 ‘대완’이라는 독음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史記索隱』(이하 『索隱』으로 약칭)은 “音菀, 又於袁反.”이라고 하여 발음은 ‘완’ 혹은 ‘원’에 가까운 것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대완은 일반적으로 파미르 고원 바로 서쪽에 위치한 페르가나(Ferghana) 지방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Pulleyblank(1966 : 25)가 大宛의 原音이 *taxwar였다고 주장하고 지리적으로는 토하라(Tokhara)인들이 살던 소그디아나 지방을 가리킨다고 추정한 이래 여러 학자들이 그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대완에 대하여 『史記正義』(이하 『正義』로 약칭)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漢書』에 의하면 大宛國은 長安에서 12,550리 떨어져 있다. 東으로는 都護의 治所에 이르고, 西南으로는 大月氏에 이르며, 南으로도 역시 大月氏에 이르고, 北으로는 康居에 이른다고 하였다. 『括地志』에는 ‘率都沙那國은 蘇對沙那國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본디 漢나라 때의 大宛國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率都沙那國 혹은 蘇對沙那國은 모두 Suturshana를 音寫한 것으로 사마르칸드와 호젠드 중간에 위치한 도시(Usrushana라고도 불리움)를 지칭한다. 이 도시에 대해서는 Barthold 1977 : 165 ~ 1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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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한 내용은 장건(張騫)에 의해서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했다. 장건은 한중(漢中)주 002
각주 002)
漢中 : 『索隱』은 陳壽(233 ~ 297)의 『益部耆舊傳』(亡佚)을 引用하여 “騫은 漢中 成固人”이라 했는데, 漢中은 漢代 郡名이고, 成固는 현재의 陝西 城固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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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건원(建元)주 003
각주 003)
建元 : 前漢 武帝時 年號로 기원전 140 ~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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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에 랑(郞)주 004
각주 004)
郞 : 皇帝 侍從官의 通稱으로 議郞, 中郞, 侍郞, 郞中 등을 포함. 郞은 廊, 즉 ‘宮廷의 回廊’에서 연원한 말로서, 황제를 陪從扈衛하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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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었다. 당시 천자께서 흉노(匈奴)주 005
각주 005)
匈奴 : 紀元前 209년 冒頓(묵특)이 單于(선우)를 칭하고, 東胡·丁靈 등을 병합하여 초원을 통일한 뒤에 세운 遊牧國家. 紀元後 48년 南北分裂을 거쳐 156년경에는 鮮卑에게 초원의 패권을 빼앗겼다. 흉노에 관한 보다 상세한 역사적인 사실들에 관해서는 江上波夫 1948;內田吟風 1975;Barfield 1981;사와다 1996; 디 코스모 2002 등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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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투항한 사람을 심문했는데, 그들 모두가 말하기를 흉노가 월지(月氏) 주 006
각주 006)
月氏(ngiwɐt-źie) : 『正義』 : “氏音支. 涼·甘·肅·瓜·沙等州는 본시 月氏國의 땅이었다. 『漢書』에서 [월지가] 본디 敦煌과 祈連 사이에 살았다고 한 것은 옳다.” 이 같은 기록을 근거로 학자들은 月氏의 原住地가 ‘敦煌﹑과 祈連 사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Haloun(1935)이 月氏의 古音을 *zgudscha, 즉 스키타이 (앗시리아 문헌의 Skuja)라는 假說을 제시했고, 일본의 榎一雄(Enoki 1959)도 이를 받아들여 月氏가 바로 스키타이였으며, 匈奴의 대두 이전에 감숙지방뿐만 아니라 몽골리아의 대부분과 천산산맥 북방 및 타림분지의 도시들을 지배하던 大勢力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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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왕을 격파하고 그 머리로써 술마시는 그릇[飮器]주 007
각주 007)
飮器 : 『漢書』 卷61 「張騫·李廣利傳」에 보이는 ‘飮器’에 대해서 顔師古는 注를 붙여(이하 顔注로 약칭) “「匈奴傳」에 ‘月氏의 왕을 공파하고 그 [머리로써 그릇을 만들어] 같이 마시고 血盟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飲酒之器가 바로 이것이다. 韋昭가 이를 두고 椑榼(술통)이라 하고, 晉灼가 獸子(변기통)라고 했는데, 모두 옳지 못하다. 椑榼은 오늘날의 偏榼이니 술을 가득 담을 뿐이지 마시는 용도가 아니다. 獸子는 용변을 볼 때 사용하는 褻器이다.”라고 설명하였다. 敵의 頭蓋骨로 飮器를 만드는 풍습은 고대 유라시아 유목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보였고 일찍이 헤로도투스(Herodotus)도 언급한 바 있는데, 이 풍습에 관해서는 Ma Yong : 1989; Sinor 1993 등을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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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삼았으며,주 008
각주 008)
역사상 月氏에 대한 匈奴의 공격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미 冒頓 집권(전209) 직후부터 匈奴의 압력을 받아 敦煌 祁連山 부근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紀元前 176년 冒頓의 공격을 받은 月氏는 甘肅의 祁連山 지방을 떠나 天山 北方의 伊犁(Ili)河 流域으로 西遷하여 ‘大月氏’가 되었으며, 이때 西遷하지 못하고 甘肅地方에 남아 있던 집단은 ‘小月氏’라고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 老上單于의 治世(174 ~ 161)에 재차 침공이 벌어져 月氏王은 殺害되고 그 頭蓋骨이 酒器로 만들어지는 치욕을 당했다. 史書에는 이때 月氏가 “遁逃”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敗北를 의미할 뿐 여전히 伊犁河 유역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원전 139년 張騫이 흉노에 포로로 잡혔을 때 單于가 “月氏는 우리 북쪽에 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만약 月氏가 아무다리아 연안으로 이주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그가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烏孫王 昆莫이 흉노의 도움을 받아 宿敵인 月氏를 공격하고 伊犁河 유역을 차지하게 되자, 이때 비로소 月氏는 南下하여 아무다리아 부근으로 이동하고 아무다리아 남방의 大夏를 복속하게 된 것이다. 다만, 王城은 여전히 아무다리아 북방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Enoki 1959;余太山 1995 : 203 ~ 213;사와다 1996 : 43 ~ 46;小谷仲男 1999 : 24 ~ 60 참조. 이 밖에 월지의 西遷에 관한 최근 중국측 연구로는 錢伯泉 1994; 錢伯泉 1997; 高榮 2004 등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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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지는 도망쳐서 항상 흉노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지만 함께 공격할 [세력이] 없다고 하였다. 한나라가 드디어 오랑캐[胡]주 009
각주 009)
胡 : 古音은 *g’o/γuo. ‘胡’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본격적인 ‘遊牧民’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獯粥·山戎 등과 같은 農牧複合住民을 가리키는 용어는 아니었다. 이 ‘胡’라는 명칭은 漢代에는 北方·西北方의 遊牧民들, 특히 匈奴를 의미하였지만, 隋唐代가 되면 주로 중앙아시아의 소그드(Soghd)人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게 된다. ‘胡’의 어의와 그 변화에 대해서는 Průšek : 1971;디 코스모 2002 : 175 ~ 183;모리야스 2006 참조. 그러나 『唐書』 卷221 「西域傳下」에 “拂菻·大食諸胡七十二國”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반드시 소그드인만을 지칭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도 있다(桑山正進 1992 : 110 ~ 111). ‘胡’라는 단어의 연원은 非中國語 계통인 것으로 보이며, 현대 몽골어에서 ‘아들’을 뜻하는 kö’ü와의 유사성이 주목된다(船木勝馬 1978). 그렇다면 『漢書』 권94上 「匈奴傳」에 “單于가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서한을 전달하기를 ‘南쪽에는 大漢, 北쪽에는 強胡가 있다. 胡라는 것은 하늘의 자랑스런 아들(天之驕子也)이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때 “胡는 하늘의 자랑스런 아들”이라는 구절은 胡의 그러한 뜻을 활용한 정치적 레토릭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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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멸하려고 도모할 때 이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월지와] 연락을 하고자 하였다. 경로가 부득이 흉노의 영내를 지나가게 되어 이에 능력 있는 사신을 모집했는데, 장건이 랑의 신분으로 응모하여 월지에 사신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는 당읍씨(堂邑氏)에 속하는 오랑캐 노예인 감보(甘父) 주 010
각주 010)
甘父 : 『索隱』에 “堂邑縣人의 집에 속한 胡奴이며, 이름은 甘父이다. 아래에서 ‘堂邑父’라고 한 것은 대체로 후대의 역사가들이 생략해서 부르는 것으로 ‘堂邑父’라고만 하고 ‘甘’字를 생략한 것이다. 甘은 혹시 그 姓을 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한편 顔注에는 : “堂邑氏의 노비로서 본래는 胡人이었고 이름이 甘父였다. 아래에서 ‘堂邑父’라고 한 것은 대저 그 주인의 姓을 따서 자기의 성씨로 한 것이며, 그 이름만 부르면 父이다.”라고 되어 있다. 堂邑은 원래 楚지방의 諸侯家門이었는데, 紀元前 116년에 臨淮郡으로 편입되었다. 甘父는 이 堂邑侯에 종속된 匈奴人(胡奴)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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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함께 농서(隴西) 주 011
각주 011)
隴西 : 郡名으로 현재 甘肅 臨洮의 남쪽에 해당. 隴山은 六盤山 南端의 別稱이며, 隴西, 즉 隴右는 六盤山 以西를 지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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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나섰다. 흉노[의 영내]를 지나가다가 흉노가 그들을 붙잡아 선우(單于)주 012
각주 012)
單于(ziän-jiu). 여기서는 匈奴의 제3대 군주 軍臣單于(전160 ~ 127)를 지칭한다. 單于는 匈奴 君主의 稱號이며 ‘선우’라고 발음한다. 이를 dān-hwah로 읽고 고대 투르크의 官稱號 tarxan의 古形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Pulleyblank 1963 : 256), 다른 방증자료가 없는 한 그 같은 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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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보내서 만나게 하였다. 선우가 그를 붙들어 두면서 말하기를 “월지는 우리 북쪽에 있는데, 한나라가 어떻게 사신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월(越)나라 주 013
각주 013)
越 : 南越을 가리키며 현재의 廣東·廣西 및 베트남 북부. 당시 匈奴가 이미 越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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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사신을 보내고자 한다면 한나라가 내가 하려는 일을 들어주겠는가?”라고 하였다. [흉노는] 장건을 10여 년주 014
각주 014)
十餘歲 : 建元 二年(전139)부터 元光 六年(전129)까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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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 머무르게 하였고 부인을 맞아주었으며 아들까지 생겼다. 그러나 장건한나라의 절(節)을 붙들고주 015
각주 015)
持漢節 : 節은 使臣이 奉命出行할 때 반드시 지니고 가는 일종의 信標로, 『後漢書』 卷1에는 逸失된 『漢官儀』를 인용하여 “節은 대나무로 만들어졌고 자루[柄]의 길이는 8尺(약 185cm)이며, 깃대장식[旄]은 소 꼬리털[牛尾]이고 세 겹으로 되어 있다.”는 설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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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지 않았다.

  • 각주 001)
    大宛(d’âi-iwɐn) : 이하 고유명사의 古代音은 별도의 注記 없이 Karlgren 1972에 복원된 唐音으로 표기한다. 본서에서는 ‘대완’이라는 독음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史記索隱』(이하 『索隱』으로 약칭)은 “音菀, 又於袁反.”이라고 하여 발음은 ‘완’ 혹은 ‘원’에 가까운 것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대완은 일반적으로 파미르 고원 바로 서쪽에 위치한 페르가나(Ferghana) 지방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Pulleyblank(1966 : 25)가 大宛의 原音이 *taxwar였다고 주장하고 지리적으로는 토하라(Tokhara)인들이 살던 소그디아나 지방을 가리킨다고 추정한 이래 여러 학자들이 그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대완에 대하여 『史記正義』(이하 『正義』로 약칭)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漢書』에 의하면 大宛國은 長安에서 12,550리 떨어져 있다. 東으로는 都護의 治所에 이르고, 西南으로는 大月氏에 이르며, 南으로도 역시 大月氏에 이르고, 北으로는 康居에 이른다고 하였다. 『括地志』에는 ‘率都沙那國은 蘇對沙那國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본디 漢나라 때의 大宛國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率都沙那國 혹은 蘇對沙那國은 모두 Suturshana를 音寫한 것으로 사마르칸드와 호젠드 중간에 위치한 도시(Usrushana라고도 불리움)를 지칭한다. 이 도시에 대해서는 Barthold 1977 : 165 ~ 1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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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漢中 : 『索隱』은 陳壽(233 ~ 297)의 『益部耆舊傳』(亡佚)을 引用하여 “騫은 漢中 成固人”이라 했는데, 漢中은 漢代 郡名이고, 成固는 현재의 陝西 城固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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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建元 : 前漢 武帝時 年號로 기원전 140 ~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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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郞 : 皇帝 侍從官의 通稱으로 議郞, 中郞, 侍郞, 郞中 등을 포함. 郞은 廊, 즉 ‘宮廷의 回廊’에서 연원한 말로서, 황제를 陪從扈衛하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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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匈奴 : 紀元前 209년 冒頓(묵특)이 單于(선우)를 칭하고, 東胡·丁靈 등을 병합하여 초원을 통일한 뒤에 세운 遊牧國家. 紀元後 48년 南北分裂을 거쳐 156년경에는 鮮卑에게 초원의 패권을 빼앗겼다. 흉노에 관한 보다 상세한 역사적인 사실들에 관해서는 江上波夫 1948;內田吟風 1975;Barfield 1981;사와다 1996; 디 코스모 2002 등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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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月氏(ngiwɐt-źie) : 『正義』 : “氏音支. 涼·甘·肅·瓜·沙等州는 본시 月氏國의 땅이었다. 『漢書』에서 [월지가] 본디 敦煌과 祈連 사이에 살았다고 한 것은 옳다.” 이 같은 기록을 근거로 학자들은 月氏의 原住地가 ‘敦煌﹑과 祈連 사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Haloun(1935)이 月氏의 古音을 *zgudscha, 즉 스키타이 (앗시리아 문헌의 Skuja)라는 假說을 제시했고, 일본의 榎一雄(Enoki 1959)도 이를 받아들여 月氏가 바로 스키타이였으며, 匈奴의 대두 이전에 감숙지방뿐만 아니라 몽골리아의 대부분과 천산산맥 북방 및 타림분지의 도시들을 지배하던 大勢力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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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飮器 : 『漢書』 卷61 「張騫·李廣利傳」에 보이는 ‘飮器’에 대해서 顔師古는 注를 붙여(이하 顔注로 약칭) “「匈奴傳」에 ‘月氏의 왕을 공파하고 그 [머리로써 그릇을 만들어] 같이 마시고 血盟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飲酒之器가 바로 이것이다. 韋昭가 이를 두고 椑榼(술통)이라 하고, 晉灼가 獸子(변기통)라고 했는데, 모두 옳지 못하다. 椑榼은 오늘날의 偏榼이니 술을 가득 담을 뿐이지 마시는 용도가 아니다. 獸子는 용변을 볼 때 사용하는 褻器이다.”라고 설명하였다. 敵의 頭蓋骨로 飮器를 만드는 풍습은 고대 유라시아 유목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보였고 일찍이 헤로도투스(Herodotus)도 언급한 바 있는데, 이 풍습에 관해서는 Ma Yong : 1989; Sinor 1993 등을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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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역사상 月氏에 대한 匈奴의 공격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미 冒頓 집권(전209) 직후부터 匈奴의 압력을 받아 敦煌 祁連山 부근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紀元前 176년 冒頓의 공격을 받은 月氏는 甘肅의 祁連山 지방을 떠나 天山 北方의 伊犁(Ili)河 流域으로 西遷하여 ‘大月氏’가 되었으며, 이때 西遷하지 못하고 甘肅地方에 남아 있던 집단은 ‘小月氏’라고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 老上單于의 治世(174 ~ 161)에 재차 침공이 벌어져 月氏王은 殺害되고 그 頭蓋骨이 酒器로 만들어지는 치욕을 당했다. 史書에는 이때 月氏가 “遁逃”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敗北를 의미할 뿐 여전히 伊犁河 유역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원전 139년 張騫이 흉노에 포로로 잡혔을 때 單于가 “月氏는 우리 북쪽에 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만약 月氏가 아무다리아 연안으로 이주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그가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烏孫王 昆莫이 흉노의 도움을 받아 宿敵인 月氏를 공격하고 伊犁河 유역을 차지하게 되자, 이때 비로소 月氏는 南下하여 아무다리아 부근으로 이동하고 아무다리아 남방의 大夏를 복속하게 된 것이다. 다만, 王城은 여전히 아무다리아 북방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Enoki 1959;余太山 1995 : 203 ~ 213;사와다 1996 : 43 ~ 46;小谷仲男 1999 : 24 ~ 60 참조. 이 밖에 월지의 西遷에 관한 최근 중국측 연구로는 錢伯泉 1994; 錢伯泉 1997; 高榮 2004 등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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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胡 : 古音은 *g’o/γuo. ‘胡’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본격적인 ‘遊牧民’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獯粥·山戎 등과 같은 農牧複合住民을 가리키는 용어는 아니었다. 이 ‘胡’라는 명칭은 漢代에는 北方·西北方의 遊牧民들, 특히 匈奴를 의미하였지만, 隋唐代가 되면 주로 중앙아시아의 소그드(Soghd)人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게 된다. ‘胡’의 어의와 그 변화에 대해서는 Průšek : 1971;디 코스모 2002 : 175 ~ 183;모리야스 2006 참조. 그러나 『唐書』 卷221 「西域傳下」에 “拂菻·大食諸胡七十二國”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반드시 소그드인만을 지칭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도 있다(桑山正進 1992 : 110 ~ 111). ‘胡’라는 단어의 연원은 非中國語 계통인 것으로 보이며, 현대 몽골어에서 ‘아들’을 뜻하는 kö’ü와의 유사성이 주목된다(船木勝馬 1978). 그렇다면 『漢書』 권94上 「匈奴傳」에 “單于가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서한을 전달하기를 ‘南쪽에는 大漢, 北쪽에는 強胡가 있다. 胡라는 것은 하늘의 자랑스런 아들(天之驕子也)이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때 “胡는 하늘의 자랑스런 아들”이라는 구절은 胡의 그러한 뜻을 활용한 정치적 레토릭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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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甘父 : 『索隱』에 “堂邑縣人의 집에 속한 胡奴이며, 이름은 甘父이다. 아래에서 ‘堂邑父’라고 한 것은 대체로 후대의 역사가들이 생략해서 부르는 것으로 ‘堂邑父’라고만 하고 ‘甘’字를 생략한 것이다. 甘은 혹시 그 姓을 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한편 顔注에는 : “堂邑氏의 노비로서 본래는 胡人이었고 이름이 甘父였다. 아래에서 ‘堂邑父’라고 한 것은 대저 그 주인의 姓을 따서 자기의 성씨로 한 것이며, 그 이름만 부르면 父이다.”라고 되어 있다. 堂邑은 원래 楚지방의 諸侯家門이었는데, 紀元前 116년에 臨淮郡으로 편입되었다. 甘父는 이 堂邑侯에 종속된 匈奴人(胡奴)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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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隴西 : 郡名으로 현재 甘肅 臨洮의 남쪽에 해당. 隴山은 六盤山 南端의 別稱이며, 隴西, 즉 隴右는 六盤山 以西를 지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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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單于(ziän-jiu). 여기서는 匈奴의 제3대 군주 軍臣單于(전160 ~ 127)를 지칭한다. 單于는 匈奴 君主의 稱號이며 ‘선우’라고 발음한다. 이를 dān-hwah로 읽고 고대 투르크의 官稱號 tarxan의 古形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Pulleyblank 1963 : 256), 다른 방증자료가 없는 한 그 같은 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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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越 : 南越을 가리키며 현재의 廣東·廣西 및 베트남 북부. 당시 匈奴가 이미 越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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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十餘歲 : 建元 二年(전139)부터 元光 六年(전129)까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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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持漢節 : 節은 使臣이 奉命出行할 때 반드시 지니고 가는 일종의 信標로, 『後漢書』 卷1에는 逸失된 『漢官儀』를 인용하여 “節은 대나무로 만들어졌고 자루[柄]의 길이는 8尺(약 185cm)이며, 깃대장식[旄]은 소 꼬리털[牛尾]이고 세 겹으로 되어 있다.”는 설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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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장건(張騫), 장건, 장건, 감보(甘父), 장건, 장건
지명
대완(大宛), 월지(月氏), 월지, 한나라, 월지, 월지, 농서(隴西), 월지, 한나라, 월(越)나라, 한나라,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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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張騫)이 월지(月氏)에 사신으로 가다가 흉노에 붙잡혀 머물렀으나 한나라의 절(節)을 잃지 않음 자료번호 : jo.k_0001_0123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