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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전왕((滇王)이 한나라에 항복하고 군현의 설치와 입조를 요청하자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왕인(王印)을 내려줌

  • 국가
    서남이(西南夷)
상이 왕연우(王然于)를 사자로 보내 남월의 패망과 남이를 주멸한 군사적 위세로써 전왕(滇王)을 넌지시 깨우쳐 입조하도록 하였다. 전왕이라는 자는 그 무리가 수만 인에 그 곁 동북쪽에 노침(勞濅)과 미막(靡莫)주 001
각주 001)
『索隱』;‘勞濅’‘靡莫’은 勞寢과 靡莫이며, 두 國은 滇王과 同姓이다(勞寢·靡莫. 二國與滇王同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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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어 모두 동성(同姓)으로 서로 의지하는 까닭에 기꺼이 들으려 하지 않았다. 노침과 미막은 여러 차례 [의] 사자와 관리 및 사졸을 침범하였다. 원봉(元封) 2년(전109)에 천자가 파촉의 군대를 일으켜 노침과 미막을 쳐서 멸하고, 그 군대로 을 압박하였다. 전왕이 처음 과 관계를 가진 이래로 늘 선의(善意)를 가졌기 때문에주 002
각주 002)
‘始首善’에 대한 여기에서의 해석은 우선 『漢書』의 師古注를 좇았다. 師古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항상 善意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漢書』 卷95 「西南夷傳」, 3842쪽). 안사고는 ‘初始以來’라고 하여 ‘漢과 滇과의 관계가 시작된 이래’의 의미로 해석하였데, 그 의미가 모호한 측면이 있다. 한편, ‘始’를 ‘비로소’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즉, 군대가 滇에 가까이 닥치자, 비로소 스스로 앞장서 善意를 표시하였다는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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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멸당하지 않았다. 전왕이 서남이(西南夷)의 전례(前例)를 좇아주 003
각주 003)
‘離難西南夷’에 대한 해석은 『考證』을 좇았다. 『考證』은 먼저 中井積德의 견해를 소개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離難’은 滇王의 이름이고, ‘西南夷’는 衍文이다(9쪽). 한편, 『漢書』에서는 ‘難’자와 ‘南’자를 빼고 “離西夷”로 적었고, 顔師古는 여기에 注하여 “東向하여 漢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西夷가 이미 ‘請臣置吏’하였다 적은 것을 고려하면, “離西夷”는 ‘西夷를 좇아’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瀧川資言, 1935 : 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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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들어 항복하고, 군현의 설치와 입조(入朝)를 요청하였다. 이에 익주군(益州郡) 주 004
각주 004)
益州郡 : 기원전 109년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滇池縣(雲南 晉寧縣 동북의 晉城鎭)에 있었다. 그 강역은 雲南의 怒江 이동, 洱海 이서 및 姚安·元謀·東川 이남, 曲靖·宜良·華寧·蒙 이서, 哀牢山 이북의 지역에 상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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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설치하고,주 005
각주 005)
『考證』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中井積德이 말하기를, “‘離難西南夷’ 5자는 뜻이 통하지 않으며, 『한서』에서는 ‘離西夷’ 3字만 적었다. 顔師古는 이르기를, “東向하여 漢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살피건대, ‘西南夷’ 세 자는 아래 문장에 이어지는 衍文이다. 離難은 滇王의 이름이다. 丁謙이 말하기를, “漢의 益州는 지금의 雲南省 城이며, 三國時에 이르러 비로소 四川을 益州로 여겼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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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왕에게 왕(王)의 인(印)을 내려 다시 그 민의 수장이 되도록 하였다.

  • 각주 001)
    『索隱』;‘勞濅’‘靡莫’은 勞寢과 靡莫이며, 두 國은 滇王과 同姓이다(勞寢·靡莫. 二國與滇王同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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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始首善’에 대한 여기에서의 해석은 우선 『漢書』의 師古注를 좇았다. 師古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항상 善意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漢書』 卷95 「西南夷傳」, 3842쪽). 안사고는 ‘初始以來’라고 하여 ‘漢과 滇과의 관계가 시작된 이래’의 의미로 해석하였데, 그 의미가 모호한 측면이 있다. 한편, ‘始’를 ‘비로소’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즉, 군대가 滇에 가까이 닥치자, 비로소 스스로 앞장서 善意를 표시하였다는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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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離難西南夷’에 대한 해석은 『考證』을 좇았다. 『考證』은 먼저 中井積德의 견해를 소개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離難’은 滇王의 이름이고, ‘西南夷’는 衍文이다(9쪽). 한편, 『漢書』에서는 ‘難’자와 ‘南’자를 빼고 “離西夷”로 적었고, 顔師古는 여기에 注하여 “東向하여 漢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西夷가 이미 ‘請臣置吏’하였다 적은 것을 고려하면, “離西夷”는 ‘西夷를 좇아’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瀧川資言, 1935 : 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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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益州郡 : 기원전 109년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滇池縣(雲南 晉寧縣 동북의 晉城鎭)에 있었다. 그 강역은 雲南의 怒江 이동, 洱海 이서 및 姚安·元謀·東川 이남, 曲靖·宜良·華寧·蒙 이서, 哀牢山 이북의 지역에 상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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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考證』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中井積德이 말하기를, “‘離難西南夷’ 5자는 뜻이 통하지 않으며, 『한서』에서는 ‘離西夷’ 3字만 적었다. 顔師古는 이르기를, “東向하여 漢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살피건대, ‘西南夷’ 세 자는 아래 문장에 이어지는 衍文이다. 離難은 滇王의 이름이다. 丁謙이 말하기를, “漢의 益州는 지금의 雲南省 城이며, 三國時에 이르러 비로소 四川을 益州로 여겼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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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왕연우(王然于)
지명
남월, , 파촉, , , 익주군(益州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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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왕((滇王)이 한나라에 항복하고 군현의 설치와 입조를 요청하자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왕인(王印)을 내려줌 자료번호 : jo.k_0001_0116_0090